23일, 오늘은 더위가 멈춘다는 처서(處暑)입니다. 24절기 중 14번째에 해당하는 절기로, 입추(立秋)와 백로(白露) 사이에 있습니다.
수 년 전만 해도 처서 절기엔 낮엔 더운 열기가 남아 있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선선했는데 2~3년 전부터 낮 최고기온이 35~36도를 오르내립니다.
옛말에 ‘입추는 배신해도 처서는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연일 찝니다. 극심한 무더위도 처서를 기점으로 곧바로 사그라진다는 ‘처서매직’은 더 이상 통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절기상 대서가 가장 덮다고 하지만 이는 중국 기준 절기로 한반도에서는 입추 절기가 가장 더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즘엔 이 말마저도 통하지 않습니아씨다.
하지만 처서 절기엔 모기와 파리가 사라져가고 가을 전령사인 귀뚜라미가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합니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속담도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처서가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선 뭉게구름 타고 온다는 했습니다.
처서를 이틀 앞둔 저녁 공원 나무에 매달려 우렁차게 울고 있는 매미. 아직도 열대야는 가시지 않고 있다. 정기홍 기자
고려사(高麗史)는 '처서 후 15일 간을 5일씩 삼분하는데 첫 5일 간인 초후(初侯)에는 매가 새를 잡아 제를 지내고, 둘째 5일 간인 차후(次侯)에는 천지에 가을 기운이 돌며, 셋째 5일간인 말후에는 곡식이 익어간다'고 적었습니다.
처서 절기가 지나면 풀이 더 이상 자라지 않습니다.
따라서 논두렁에서 자란 풀을 마지막으로 베거나 산소를 찾아 벌초를 합니다. 처서 1주일 정도 후의 주말에 조상의 묘를 벌초하는 요즘 풍습도 이 때문입니다.
요즘엔 과수원을 하는 농가가 많아 복숭아, 포도 등 여름철 과일을 수확하거나 여름 내 과수원에서 자란 억센 풀을 예치기로 베는 작업을 합니다. 폭염에 엄두를 내지 못하던 풀 베기 작업을 아침 저녁 시간대를 이용해 하는 것이지요.
이 절기는 음력 7월 15일 백중(百中·세벌 김매기 후 쉬는 날)의 호미씻이(洗鋤宴·세서연)도 끝나는 때여서 예전 농가에선 비교적 한가했습니다. 호미씻이란 '농가에서 농사일, 특히 논매기를 끝낸 음력 7월쯤 날을 받아 하루를 즐겁게 노는 일'이다.
'어정 칠월, 건들 팔월'이란 속담이 있는데 어정거리면서 칠월을 보내고 건들거리면서 팔월을 보낸다는 뜻입니다. 추수를 앞두고 다소 한가하다는 의미를 담은 속담입니다.
더불어 옛날 처서 절기엔 선비들이 책을 햇볕에 말리는 '포쇄(曝曬)'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부인들이 옷을 음지에서 말리는 '음건(陰乾·그늘 말림)'도 비슷한 풍습입니다.
긴 장마로 습해져 있던 것들을 처서 절기를 맞아 말리는 것이지요. 이때부턴 큰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처서에는 농산물 소출과 관련한 속담과 이야깃거리가 많습니다. 이 시기의 날씨는 한해 농사의 풍흉(豊凶)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에 따른 농점(農占·농사 관련 점꽤)도 다양합니다.
오곡을 익히기 위해선 햇살이 좋아야 하고 날씨는 쾌청해야 합니다. 벼 이삭이 패는 때이고 이때 강한 햇살을 받아야 벼가 잘 익습니다.
'처서에 장벼(이삭이 팰 정도로 다 자란 벼) 패듯'이란 속담은 무엇이 한꺼번에 성한 것을 비유할 때 사용합니다. 처서 무렵에 벼가 많이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처서에 비가 오면 독의 곡식도 준다'는 속담에는 맑은 바람과 쨍쨍한 햇살을 받아야만 나락이 입을 벌려 꽃을 올리고 나불거리는데, 비가 내리면 나락에 빗물이 들어가 제대로 자라지 못해 썩기 쉽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처서에 오는 비를 처서비(處暑雨)라고 하는데 곡식이 익는 데는 썩 좋지 않습니다.
경남 통영에서는 '처서에 비가 오면 십리 안에 천석이 감해지고, 백로에 비가 오면 십리 안에 백석을 감한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전북 부안과 청산에서는 '처서비가 오면 큰 애기들이 울고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안과 청산은 대추 농사로 유명한데 대추가 익어가는 처서를 전후해 비가 내리면 혼사를 앞둔 자식들의 혼수 장만 걱정이 앞선다는 말입니다.
처서비는 절기상 농사에 유익하지 않습니다. 다만 농사 기법이 현대화 된 요즘엔 이른 수확을 하는 과일과 곡식이 많아 다소 맞지 않은 것들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