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경남뉴스는 부·울·경 곳곳에서 역사의 켜를 지니고 있는 문화재와 집안 전통문화를 찾아 그 흔적을 짚어보고, 이를 지켜오는 후세들의 노력들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소개합니다. 많은 애독을 바랍니다. 편집자 주
진양 정씨 은열공파 후손들이 지난 12일 경남 진주시 진주성 내에 있는 청계서원에서 춘향제를 봉행했다. 춘향제(春享祭)란 봄에 향교나 서원 등에서 지내는 제사로, 해마다 음력 3월 15일 제례를 올린다.
이날 춘향제 봉행에서는 고려 현종 때 병부상서(兵部尙書·지금의 국방부 장관)로 거란의 침입을 막은 은열공(殷烈公) 정신열(鄭臣烈) 선생과 우리 민족에 목면(木棉·솜) 옷을 입게 한 그의 후손 문충공(文忠公) 정천익(鄭天益) 선생, 나라와 문중을 빛낸 7인의 선조를 함께 배향(配享) 했다.
진주성 내에 있는 청계서원 정문 모습. 진주성에 들른 방문객이 서원 정문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정문 현판글은 창제문(蹌濟門)으로,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예도(禮度)에 맞게 허리를 굽히고 빨리 걸어 돕는다'는 뜻이다. 계단 오른쪽 옆 안내판엔 서원의 연역 등을 적어 안내하고 있다.
정신열 선생은 거란을 물리친 공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에 봉해졌었다. 정천익 선생은 고려 공민왕 때 판부사(判府事·종2품)를 거쳤다. 그는 1364년 봄 사위 문익점(文益漸) 선생이 원나라에 서장관(書狀官·중국 사신 지휘부의 관직)으로 갔다가 귀국하면서 주머니에 넣고 온 목면 종자 한 개를 살려 종자를 보급했다.
이어 목화씨를 뽑는 씨아(取子車)와 목화로 실을 뽑는 물레(繅絲車)를 만들었고, 베를 짜는 개량 베틀을 제작 보급했다. 이로 인해 한겨울에도 삼베옷 등으로 춥게 지내던 백성들이 따뜻한 솜 무명옷을 입을 수 있게 돼, 우리 민족의 의생활 문화에 신기원을 세우는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진주성 내 청계서원 모습. 고즈넉한 진주성의 북장대 인근에 있다. 왼쪽의 작은 문은 옆문이다. 여러 백년을 살아온 고목(古木·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서원 바로 옆에 서서 지난 세월을 묵묵히 지켜왔다.
이날 행사장에 정창현 더경남뉴스 발행인 겸 기자가 들러 행사 전체 분위기를 담았다. 춘향제를 ▲춘향제 봉행 모습 ▲행사 전후 스케치 ▲대종회 총회 등 3개로 나눠 싣는다.
■춘향제 봉행 모습
이날 진주성 내 북장대 근처 청계서원에서 열린 춘향제에는 후손 200여 명이 참례해 꽤 붐볐다.
요란한 봄비가 예보됐으나 다행히 제례가 끝날 때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행사가 계획했던대로 진행됐다.
올해 진양 정씨 은열공파의 '춘향제 집사분정(執事分定)'을 적은 종이 표지. 집사분정이란 사당 등의 제례에서 순서와 제관 각자의 역할을 정하는 것이다. 맨 오른쪽에 세로로 '을사년(乙巳年). 경덕사(景德祠) 숭은사(崇恩祠) 춘향제(春享祭) 분정(分定)'으로 쓰고 3명의 헌관과 집사 이름을 써놓았다. 분정이란 대종회에서 춘향제를 모실 주요 제관과 집사를 정한다는 뜻이다.
올해 춘향제 제관인 헌관(獻官)은 ▲초헌관 정태순(鄭泰淳) 장금상선 회장(22세) ▲아헌관 재영(在英) 23세 ▲종헌관 승환(承煥) 위즈코프 CEO(22세)가 맡았다.
또 제례 집사(執事)는 ▲집례(執禮) 재균(載均) 23세 ▲대축(大祝) 재을(載乙) 23세이 맡아 행사를 진행했다.
이날 춘향제 행사를 진행한 제례위원장으로, 집례를 수년간 진행해온 정재균 씨는 "주말이라 많은 종인들과 진주성을 찾은 시민들이 함께해서 향제가 더욱 빛났다"며 "내년에는 보다 개방적인 행사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고 행사 진행 소감을 밝혔다.
집례(執禮)란 제사 때 홀기(笏記·제례나 혼례 때 의식 순서를 적은 글)를 읽는 직책이고, 대축(大祝)은 축문을 읽고 축문을 태우고 음복을 도와주는 제관이다. 알자(謁者)는 초헌관을 인도하는 집사다.
■봉행 행사장 스케치
이날 청계서원에서 진행된 춘향제는 먼저 은열공 정신렬 선생 모신 사당 경덕사(景德祠)에서 봉행됐고, 곧이어 문충공 정천익 선생을 모신 숭은사(崇恩祠)에서 진행됐다.
두 행사장 모습을 나눠 행사 순서대로 싣는다.
▶은열공 정신열 선생 모신 사당 경덕사(景德祠)
12일 진주성 내 청계서원에서 열린 진주 정씨 은열공파 춘향 제례에서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헌관 등이 은열공 정신열 선생을 모신 사당 경덕사(景德祠)로 들어서고 있다.
정신열 선생은 고려의 향리직(鄕吏職)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 휘 정자우의 6세손이다.
정자우(호장)-정한여(鄭漢汝)-정거중(鄭居仲)-정국유(鄭國儒)-정인순(鄭仁順)-정신렬(鄭臣烈)로 이어진다.
정신열 선생은 어려서 천자문에 영특하고 충효가 지극했으며, 특히 성리학에 밝아 당대의 유종(儒宗·선비들이 존경하는 대 학자)으로 통했다고 전한다.
춘향 제례 행사를 진행한 정재균 집례자가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단상으로 오르고 있다. 아래 오른쪽 붉은색 제례복의 3명은 헌관이고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들은 집사들이다.
춘향 제례를 진행하기 전 정재균 집례자 등이 신위전(神位殿)에 큰절을 올리고 있다.
정재균 집례자 등이 춘향 제례를 진행하기에 앞서 신위전 준비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제례 집사 중의 한 명인 알자(謁者)가 헌관들을 제단으로 인도하기 위해 예를 갖추고 인사를 하고 있다.
초헌관인 정태순 진양 정씨 대종회 신임 회장이 제단으로 오르기 전에 손을 씻고 있다.
제관이 계단을 오를 때는 동쪽 계단을 이용하며, 오른발 먼저 올리고 왼발을 모은 다음 다시 반복해서 오른발을 먼저 올린다. 계단을 내려갈 때는 서쪽 계단을 이용하며, 왼발을 먼저 내리고 오른발을 모은 다음 다시 왼발로 먼저 내딛는다.
초헌관은 먼저 제례에 모실 조상의 신위를 맞이하기 위해 신위전으로 가서 개독(開櫝·신주를 모신 독을 여는 것)을 하고 제례상 진설(陳設)이 잘 되었는지를 점검한다. 이는 제례 중 맨 앞서 하는 것으로, 조상신을 맞이하는 강신례(降神禮) 또는 영신례(迎神禮)라고 한다.
정태순 초헌관이 신위전에서 진설(陳設)이 잘 돼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진설이란 제사를 지내기 전 제구(祭具)와 제기(祭器), 제수(祭需) 등을 차린 것이다.
정태순 초헌관이 제단에서 내려온 뒤, 모든 제관이 제례를 하기 위해 서 있다.
제관들이 큰절을 올리고 있다.
이어 정태순 초헌관이 다시 계단을 올라가 제단에서 향을 피우고 있다.
정태순 초헌관이 신위에 첫잔을 올린 뒤 옆에 있던 대축(大祝)이 축문을 읽고 있다. 대축이란 제향 때에 초헌관이 술을 따르고 나서 신위 옆에서 축문을 읽는 사람을 이른다.
정태순 초헌관에 이어 정재영 아헌관이 신위전으로 이동하고 있다.
정재영 아헌관이 잔을 올리고 있다.
정재영 아헌관이 잔을 올린 뒤 큰절을 하고 있다.
정승환 종헌관이 세 번째 잔을 올리고 있다.
정승환 종헌관이 잔을 올린 뒤 큰절을 하고 있다.
3명의 헌관이 다시 큰절을 올리고 있다.
3명의 헌관이 신위에 올렸던 술과 음식을 음복하고 있다.
춘향 제례 마지막 과정인 폐백(幣帛·신에게 바친 물건)과 축문(祝文·제사 때 신명께 고하는 글)을 태우고 땅에 묻는 망례례 모습
모든 제례를 마치고 향초의 불을 끄고 있다.
진양 정씨 은열공파의 춘향제 제관들이 카메라 앞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문충공 정천익 선생을 모신 숭은사(崇恩祠)
이날 춘향제는 경덕사에 이어 곧이어 바로 옆에 있는 숭은사(崇恩祠)에서 진행됐다. 이곳에는 정천익 선생과 정씨 문중 7인의 선조가 모셔져 있다.
앞서 소개했지만, 문충공 정천익 선생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에 판부사(判府事·종2품) 벼슬을 했고, 그해 치사관(致仕官·나이가 많아 관직에 물러난 최고위직 관리)이 돼 경남 단성 사월리 고택에 돌아왔다.
정천익 선생은 이듬해인 1364년, 그의 사위 문익점 선생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목면 씨앗을 갖고 들어오자 반씩 나눠 심었고 그 중 정천익 선생이 심은 한 개만 살아나 꽃을 피웠다. 이어 3년에 걸친 노력으로 번식 배양에 성공해 씨아와 물레, 베틀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따뜻한 목화 솜으로 만든 무명옷을 입혔다.
청계서원 숭은사(崇恩祠)에서 헌관 등 제관들이 봉례(奉禮·예를 받듦)를 하기 위해 나란히 서 있다.
제관들이 큰절을 올리고 있다.
초헌관인 정태순 진양 정씨 대종회장이 제단으로 오르기 전에 손을 씻은 뒤 닦고 있다.
정태순 초헌관이 계단을 오르고 있다.
정태순 초헌관이 잔을 올리고 있다.
큰절을 올리는 정태순 초헌관
헌관 3명이 차례로 신위에 잔을 올린 뒤 제단 아래로 내려와 서 있다.
3명의 헌관이 함께 다시 마지막 큰절을 올리고 있다.
3명의 헌관이 음복을 하고 있다.
경덕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숭은사에서도 폐백(幣帛·신에게 바친 물건)과 축문(祝文·제사 때 신명께 고하는 글)을 태우고 땅에 묻는 망례례를 하는 모습이다.
제관이 춘향 제례가 마무리되자 신위의 문을 닫고 있다.
제관이 춘향 제례가 마무리된 뒤 신위 문을 하나씩 차례로 닫고 있다. 숭은사엔 정천익 선생과 7인의 선조가 모셔져 있다. 이상 정창현 기자
※춘향제 봉행 지식
문중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제례 봉행은 초헌관이 예찬(禮饌·제사 음식)을 살피는 점시(點視·하나하나 검사해 봄)→초헌관이 신을 맞이하는 강신례(降神禮) 또는 영신례(迎神禮)→초헌관이 향을 피우는 전폐례(奠幣禮·헌관이 3번 향을 올리고 신주 앞에 폐백을 드리던 예)→초헌관이 첫 술잔을 드리는 초헌례(初獻禮)→초헌관이 축문을 낭독하는 독축(讀祝)→아헌관이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아헌례(亞獻禮)→종헌관이 세 번째 술잔을 올리는 종헌례(終獻禮) 순으로 진행된다.
이어 초헌관의 음복례와 변두(籩豆)를 거두는 철변두, 축문을 불사르는 망례례를 끝으로 모든 봉행의 예가 마무리된다.
변두(籩豆)란 제사 때 쓰는 그릇인 변(籩)과 두(豆)를 뜻한다. 풀이하면 제기 이름 변(籩), 제수 두(豆)다. 또 제수(祭需)란 제사 때 들어가는 재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