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음력 7월 15일, '백중(百中)'입니다. 24절기가 아니고, 잡절 명절입니다.
예로부터 벼논에 난 잡초를 뽑는 논매기가 마무리되는 이때 고된 농사일을 내려놓고 장만한 음식을 먹으면서 놀이를 즐기며 잠시 쉽니다. 한해 벼농사를 짓는 기간 중 여유가 있는 시기입니다. 이때 하는 놀이를 '백중놀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3번의 김매기인 '세벌김매기'가 끝난 뒤 여름철 무더운 철에 휴식을 취하는 날이지요. 농민(농업인)들의 여름철 잔칫날로 자리 잡아 농민의 명절입니다. 소작인들의 울분을 달래는 한편으로 사회 결속을 다지기 위한 것이지요.
불교 문화인 백중과 김매기 시기가 겹쳐 백중놀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날 풍속으로는 백중(百中)놀이, 씨름, 들돌 들기, 호미걸이(경기), 밀양백중놀이, 풋굿(경상) 등이 있습니다.
백중을 달리 하는 말이 많은데 김매기에 사용된 호미를 씻어서 걸어둔다는 의미로 호미씻는 날이라고 하거나 머슴날(칠석), 머슴의 생일, 머슴 명일(전북 전주), 상놈 명절(경남 함안)이라고 합니다. '머슴 위하는 날', '머슴들 쉬는 날', '머슴에게 옷 해주는 날' 등으로 부릅니다.
불교 색체의 축수(祝手·두 손바닥을 마주 대고 빔)한 날, 망혼일(亡魂日), 중원(中元) 등으로도 말합니다.
백중의 또다른 이칭으로는 백중(白中), 백중(百衆), 백종(百種)이 있습니다.
민간에서는 일반적으로 백중으로 통일해 씁니다.
불가에서 백중(百中)은 아귀(배고픔과 목마름의 고통에 시달리는 영혼)가 된 중생을 구제해주는 '우란분재(盂蘭盆齋)'가 열리는 날입니다. 부처의 탄생, 출가, 성도, 열반일을 합한 4대 명절에 더해 우란분재(盂蘭盆齋)가 행해지는 5대 명절에 해당합니다. 우란분(盂蘭盆)은 범어 ‘Ullamana’를 음사(音寫)한 오람파라(烏籃婆拏)가 와전된 것입니다.
그런데 논농사에서 김매기 끝나는 시기와 백중이 겹쳐 불교 문화인 백중과 농경사회의 축제적 성격이 뒤섞인 백중놀이가 만들어졌습니다.
백중에 관한 기록들은 여러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7세기 김육(金堉)의 '송도지(松都志)'에 7월 15일을 백종이라 불렀고 남녀가 주식(酒食)을 차려놓고 삼혼(三魂)을 부르며 우란분재의 고풍(古風)이라 했습니다.
'송남잡지(松南雜識)'에서는 '백종(百種)·백중(白中)'을 같이 썼습니다.
'규합총서(閨閤叢書)', '이운지(怡雲志)',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百種’으로만 명기돼 있습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7월 15일은 속칭 백종이라 부르며 백종에는 중들이 백 가지의 화과(花菓)를 갖춰서 우란분을 설치하고 불공을 드린다고 했습니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는 백종절이라고 하여, 중원일에 백종의 꽃과 과일을 부처님께 공양하며 복을 빌었으므로 그날의 이름을 백종이라 붙였다고 했습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를 그대로 인용하여 백종일이라 불렀습니다. 사찰에서 행하는 우란분회와 달리 민간에서는 망혼일이라 하여 여염집에서 중원 달밤에 채소, 과일, 술, 밥을 갖추어 죽은 어버이 혼을 부른다고 했고요.
한편 충청도 풍속에 15일에는 노소가 저자로 나와 마시고 먹으며 즐길 뿐더러 씨름놀이도 하고, 경사대부 집에서 초하룻날이나 보름날에 올벼[早生稻]를 사당에 천신한다고도 했습니다.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도 백종절이라고 했는데 서울 사람들은 성찬을 차려서 산에 올라가 가무를 즐겼다고 전합니다.
백종은 백 가지 맛을 이르는 것이며, 혹은 백가지 곡식의 씨를 중원에 진열하였으므로 백종이라고 한다고 하면서 이는 황당무계한 설이라고 지적했습니다.
20세기 초 장지연의 '조선세시기(朝鮮歲時記)'에서는 속칭 '백종절'이라 하고 '백중'이라고 했습니다.
도시의 사녀(士女)가 주찬을 성대하게 차리고 산에 올라가 가무로 놀이를 하니 그 풍속이 신라와 고려부터의 풍속이라고 전했습니다. 숭불(崇佛)로 인해 우란분공을 위해 백종의 채소와 과일을 구비해 백종이란 말이 생겼다고도 하고 혹은 백곡지종(百穀之種)에서 나왔다고는 하나 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전합니다.
백중에는 민간에서 망혼제(亡魂祭)를 지내고, 절에서는 스님들이 석 달 동안의 하안거(夏安居)를 끝내는 날입니다. 즉 우란분재와 백중은 조상영혼의 천도, 참회와 중생제도, 나아가서 일꾼들이 즐기는 농촌축제의 날인 셈이지요.
따라서 백중에는 한마디로 '먹고, 마시고, 놀면서' 하루를 보냅니다.
백중놀이는 두레먹기란 놀이에서 잘 드러납니다..
백중에 열리는 두레먹기야말로 두레일꾼들이 모처럼 노동의 피로를 풀어내는 축제였지요.
백중놀이는 지역에 따라 명칭이 다소 상이하게 나타나는데 호미걸이, 호미씻이, 술멕이, 풋굿, 질먹기, 진서턱(진세턱) 등이 대표적입니다.
여름철 우물고사도 중요한 행사였는데 지역에 따라서 백중과 칠석에 혼재돼 나타나므로 칠석놀이와 동일한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백중날에 머슴들에게는 백중빔이란 새 옷을 장만해 주었으며 모처럼의 휴가를 주어 백중장에서 즐기도록 했습니다.
두레에 들어가야 할 청소년은 진서라고 부르며 두레에 내게 되는 술은 진서술이라고 부릅니다.
진서턱을 내는 시기는 7월 백중 무렵에 곁들여서 함께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서턱은 전국적인 명칭은 아닙니다.
전라도에서는 모두 진서턱이 확인되지만 충청도에서는 금강을 기점으로 부여군 남쪽에서 일부 확인이 됩니다.
이로써 남도에 진서턱은 국한된 지역 명칭임을 알 수 있습니다.
꽁배술 풍습은 주로 충청도에서 많이 사용했습니다.
꽁배란 두레에서 심부름하는 청소년층을 일컬으며, 꽁배가 연령이 차서 두레성원이 되고자 할 때, 백중날 동이로 술을 내는 꽁배술을 거쳐 허락을 얻습니다.
호남이나 호서지방은 들돌들기, 돌독들기, 등돌들기, 진쇠돌들기, 당산돌들기가 많으며 경상도에서는 힘발림이라는 명칭도 썼습ㄴ다.
들돌을 두는 위치는 대개 여름철 노동의 피로와 더위를 피하는 휴식 장소이기도 한 당수나무 밑입니다. 들돌의 주된 기능은 역시 7월 백중에 마을 청장년들이 시원한 나무 밑에 모여 힘을 겨뤄 장사를 뽑는 것입니다.
경남 밀양 감천의 백중놀이에서 놀아지는 힘발림은 그해 가장 일을 부지런히 한 머슴들 중에서 씨름과 더불어 무거운 돌을 들도록 해 힘센 사람을 뽑아 좌상과 우상으로 삼았습니다.
한 해 농사짓기 전 두레농군을 입사시키는데도 쓰였습니다.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 청소년은 힘발림을 통과해야 했지요.
물론 별도로 꼼배기참이라고 하여 어른들에게 술을 올려야 했습니다.
전북 고창군 상평에서는 품앗이를 하려면 백중날 들독(들돌)을 들어서 품앗이를 결정했습니다. 들독을 못 들면 장정품앗이를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경기 일원에서는 호미걸이가 많이 쓰였습니다.
호미걸이는 호미나 악기를 낭대(農旗)의 버레줄에 주렁주렁 걸어두는 의례입니다.
삼남에 호미걸이 명칭이 없는 것으로 보아 경기 지역에 고유한 명칭으로 보입니다.
8월 초순, 칠석, 백중 등 형편에 맞게 이루어졌습니다.
장소는 시원한 정자나무 아래나 마을이 바라다보이는 탁 트인 산중턱이 많이 쓰였습니다.
백중놀이는 장터에서 별도로 열렸습니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백중놀이란 머슴들이 장터로 가서 노는 놀이를 뜻했습니다.
백중날은 머슴들이 주동이 되어 장터에 가서 씨름대회에 참가했고, 상인들은 시장 경기를 부추기는 방법의 하나로 씨름대회를 열었습니다. 음식장사, 술장사 등 난장(亂場)이 섰습니다.
머슴들은 씨름에 이기면 송아지를 끌고서 기세를 올리면서 자기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백중놀이에서 머슴의 역할이 두드러지는 대목입니다.
충청도에서는 백중보다 칠석날 두레먹기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충청 서해안과 내륙 모두에 칠석이 중시되었고 반면 백중은 아예 머슴날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백중날 머슴에게 돈도 주고 무명으로 여름 한복을 한 벌씩 해 주었기에 새 옷 입고 장에 나가서 술도 마시고 하루를 즐겼습니다.
칠석날 두레먹기가 성했다는 것일 뿐 획일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전라도에서는 술멕이와 풍장놀이, 장원례 등으로 부르는데 술멕이는 글자 그대로 ‘술먹는날’이란 뜻입니다.
충남과 전북의 경계선인 금강을 기점으로 술멕이의 경계선이 그어집니다.
따라서 남도에서 쓰인 풍습이 북상하다가 금강 유역에서 멈춘 것으로 보입니다.
술멕이날은 대개 칠월 칠석이나 백중날이었습니다.
날짜 선택에 어떤 일정한 경향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술멕이날은 마지막 김매기날에 행하는 만두레 행사와 분리되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술멕이날은 마을풍물패가 동원되어 당산굿을 쳤으며,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동네잔치를 벌였습니다. 술멕이날이 다가오면 사전에 도로닦기, 잡초제거 같은 대청소도 이루어졌고요.
풋굿은 경상도 말로 풋구, 푸꾸, 풋꾸라고 부릅니다.
문헌에 초연(草宴)이 많이 등장하지만 일반 민중들이 쓰던 말은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풋굿은 세벌논매기가 끝났을 때 백중에 합니다.
농민층이 많이 참가하는 행사이지만 지주가 많은 양반 출신들의 동성촌락인 경우에는 머슴잔치라는 인상이 짙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송석하(宋錫夏)는 경상 지방의 ‘나다리’를 보고하고 있으며, 이는 풋굿을 의미한 것으로 보입니다.
강원도의 질먹기에서 질은 김매기의 ‘김’에서 나온 말입니다.
김매기를 끝내고서 잔치를 먹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느 지방과 마찬가지로 음력 7월 15일 백중날 질을 먹습니다.
마을의 시원한 솔밭이나 성황당 마당 같은 곳에 모여서 김매기 노동의 결산을 먼저 합니다.
이날은 ‘머슴의 생일’이라고 해 머슴살이하는 고용인들에게 주인집에서 상을 차려냈습니다. 하루 종일 먹고 마시면서 피로를 풀어내는 방식은 다른 지방과 다를 게 없습니다.
농민들에게는 일년에 두 차례 거대한 농민축제가 존재했습니다.
겨울철 휴한기인 정월대보름과 여름철 휴한기인 7월 백중입니다.
하지만 대보름과 달리 7월 백중 풍습은 두레의 소멸과 더불어 거의 잊혀져가고 밀양백중놀이 등만 잔재로 남아 있습니다.
경남 밀양시 삼문동 밀양강 둔치에서 열린 밀양백중놀이 시연회. 밀양시
백중놀이로는 경남 밀양백중놀이가 가장 유명하지요. 밀양에선 백중을 '머슴날'이라고 합니다. 지난 1980년 국가무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밀양에선 백중놀이를 '꼼배기참놀이'라고 부릅니다.
'꼼배기참'이란 밀을 통째로 갈아 팥을 박아 찐 떡 또는 밀에다 콩을 섞어 볶은 음식을 말하는데 당시엔 매우 귀한 먹거리였다고 하네요.
꼼배기참이라는 밀양의 독특한 음식문화, 비옥한 농토와 농업의 발달, 신분 차별이 심했던 지역성이 더해져 지금의 밀양 백중놀이가 탄생한 것이지요.
밀양 백중놀이의 핵심은 그해 가장 농사를 잘 지은 '상일꾼'을 뽑아서 소 등에 태운 뒤 마을을 돌며 음주가무를 즐기는 것입니다.
씨름 또는 들돌들기에서 뽑힌 힘센 장사를 지게처럼 생긴 작두말에 태워 마당을 돕니다. 장사에게 삿갓을 뒤집어 정자관처럼 만들어 씌우고 양반 행세를 하게 합니다. 햇빛을 가려주는 일산을 든 놀이꾼이 뒤를 따릅니다.
또 서울 송파구에서는 이날 서울놀이마당에서 송파백중놀이를 개최합니다.
송파백중놀이는 도시형 백중놀이의 특징을 지녔습니다.
약 200년 전 한강 변 상업 중심지인 송파장 상인들이 손님을 끌어모으기 위해 전문 놀이패를 불러 큰 잔치를 벌인 것이 시초였습니다. 송파산대놀이와 씨름, 줄타기, 풍물놀이, 민요 등이 다채롭게 펼쳐집니다.
지난 1985년 한강 대홍수로 송파 일대가 폐허화 되며 명맥이 끊길 뻔했으나 1989년 (사)송파민속보존회의 첫 공연을 시작으로 복원된 이후 올해까지 33번째 정기공연을 이어오며 서울 유일의 전통문화유산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송파민속보존회는 국가무형유산 제49호 송파 산대놀이와 서울특별시 무형유산 제3호 송파 다리밟기를 보유한 단체입니다.
백중날 관련 속담은 ▲백중날은 논두렁 보러 안 간다 ▲백중 무수기에는 메밀농사 끝에 늘어진 불 보려고 구멍에 든 소라 다 나온다 ▲백중에 물 없는 나락 가을할 것 없다 ▲백중에 바다 미역하면 물귀신 된다 ▲칠월 백중사리에 오리 다리 부러진다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