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수원은 경남 진주와 함께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농업 분야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우리나라의 농업과 농업 연구 역사를 찾으려면 진주와 수원을 찾으면 대체로 해결할 수 있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남에 진주농고가 있다면 북엔 수원농고가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농업고가 요즘의 과학기술고나 외고처럼 전국의 수재들이 몰릴 때였고, 이후 농고 출신들은 국내 정·관계, 학계·경제계를 주름잡곤 했다. 전북의 곡창에 있는 익산농고가 진주농고와 수원농고를 넣어 일제시대 전국 3대 농업고로 자칭할 정도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진주농고는 진주농전을 거쳐 경남과학기술대로 바뀌었다가 작년에 경상국립대와 통폐합됐다. 수원농고는 서울대 농대로 바뀌었다. 서울에 가까운 수원엔 농촌진흥청도 있었다. 전북 전주로 옮겼다.
농업 관련 시설을 들러서 보기 위해 경기 수원을 찾았다. 수원의 농업 시설들은 수원의 서부권역에 위치한다. 여기산과 축만제(서호), 서호천을 따라 7.3㎞ 정도다. 수원시가 자료 도움을 줬다.
◇ 여기산을 출발해 항미정까지
출발은 옛 농촌진흥청의 뒷동산 같은 여기산(104.8m)에서 출발했다. 구릉에 가까울 정도로 야트막하다. 하지만 선사시대 농경문화의 발상지를 상징할 만큼 의미가 큰 곳으로, 경기도기념물 제201호로 지정돼 있다.
지난 1979년부터 1984년까지 이뤄진 발굴 작업에서 난방과 지붕 구조물이 발견됐다. 주거지 내부에서 발견된 검게 탄 볍씨는 일찍부터 서둔동 일대에서 벼농사가 이뤄졌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이 원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선사유적이 조선시대 정조대왕의 둔전으로, 그 이후 농촌진흥청이 자리해 농업 연구의 산실로 오랜 세월의 흔적을 쌓았다. 농촌진흥청이 지난 2014년 전북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50년 넘게 한국농업 연구와 발전의 심장 역할을 했다.
선거연수원 생활동의 뒤편을 통한 길로 여기산으로 오르면 산 중턱에는 돌을 뜨던 흔적을 볼 수 있다. 직각으로 돌이 패인 자리는 정조대왕 당시 수원화성 성벽으로 사용하기 위해 돌을 뜨던 자리라고 한다.
산길을 걷다 보면 한국농업의 거인들이 잠든 ‘우장춘 박사 묘역’이 나온다.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해 유명한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와 초대 농촌진흥청장 정남규, 제5대 농촌진흥청장 김인환 등 농업분야의 거장들이 영면한 곳이다. 우장춘 박사는 일본에서 출생했으나 해방 후 귀국해 민족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전육종과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가 1959년 사망해 여기산에 묻혔다.
이 일대에서 이어진 농업 연구의 역사는 정조대왕의 업적을 기반으로 한다.
정조대왕은 백성들이 잘 먹고 살 수 있도록 농업을 진흥하기 위해 축만제를 만들고 일대 황무지를 개간해 논밭을 만들었다.
이후 일제는 한국 농업의 지배 질서를 구축하려고 이곳에 권업모범장을 설치했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 아래에서 중앙농사시험장과 농사개량원으로, 정부 수립 후에는 농사기술원으로, 한국전쟁 후에는 농사원으로 바뀌었다가 1962년 농촌진흥청 이름을 붙였다.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농업기관의 이름은 수차례 변경돼도 터전은 서둔동 그대로다.
여기산과 옛 농업진흥청 남쪽에 자리잡은 호수를 만든 것이 축만제다. 수문 근처에 ‘축만제 표석’이 남아 있다.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축만제는 경기도기념물 제200호로 지정돼 있다.
정조대왕의 농업 진흥책을 대표하는 축만제는 1799년 완공됐고, 관개 혜택을 받는 아래쪽 축만제둔(서둔)을 장용영 군사들과 백성이 함께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수원 시민들에겐 서호라는 이름으로 더 친근하다. 도심속 여가 공간으로 완전히 자리잡았다. 둘레를 따라 수양버들과 갯버들, 당단풍나무, 메타세쿼이아, 소나무, 물오리나무, 튤립나무가 어우러지고 물억새와 갈대밭 사이로 백로와 가마우지, 청둥오리를 만날 수 있다.
축만제 남서쪽 끝으로 물이 빠져나가는 수문 바로 앞에는 항미정이 있다.
1831년 화성유수(留守)를 지낸 박기수가 축만제 남쪽의 풍광이 좋은 곳에 건립한 것으로, 수원시 향토유적 제1호이자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98호로 지정돼 있다.
유수란 고려·조선 시대에 수도 이외의 옛 도읍지나 국왕의 행궁이 있던 곳과 군사적인 요지에 두었던 유수부의 관직이다. 병자호란(1636년) 이후에는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수어청(守禦廳) 체제를 강화하면서 두었다. 이어 수원으로 천도를 하려던 정조대왕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하고 도성 중심의 내영(內營)과 화성(華城·수원) 중심의 외영을 설치하면서 이곳에도 유수를 두었다.
특히 아름다운 석양으로 수원팔경 중 하나인 서호낙조(西湖落照)를 감상하기에 좋다.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조가 1905년 융건릉을 참배하고 돌아가던 길에 항미정에 잠시 쉬어갔다고 한다.
◇ 앙카라학교공원~서둔야학
여기산과 축만제 일대를 둘러본 뒤 서호천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수원에서 농업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근대사를 풀어내는 공간이다.
서호초등학교 일대는 벌터라고 불렸는데 학교 앞 길다란 모양의 공원은 남다른 사연과 이름을 가진 곳이다. 터키 수도의 이름과 같은 ‘앙카라학교 공원’은 한국전쟁 당시 농촌진흥청에 주둔했던 터키군이 전쟁 고아들을 위해 세운 학교이다. 이 고아원을 기억하고자 조성된 공원이다.
한국전쟁과 터키군의 파병을 소재로 한 영화 '아일라'의 모티브이자 배경이기도 하다.
수원시는 터키군의 참전과 인도주의적인 선행을 알리고 기억하기 위해 서호천 옆에 부지를 마련해 공원을 만들었고, 서호초교 체육관은 앙카라관이라는 이름으로 아프지만 아름다운 역사를 기억한다.
길 건너편에는 서울농대와 경기상상캠퍼스가 자리하고 있다.
정문을 중심으로 가운데 길게 뻗은 길을 두고 눈이 시원할 정도로 짙은 녹음이 펼쳐지는 이곳은 서울대 농대의 고향이다.
1899년 설립된 상공학교가 관립농상공학교에서 농림학교로 개명된 뒤 1907년 서둔동으로 이전해 수원농림학교가 됐다. 조선총독부가 농림학교로 간판을 바꾸고 농림전문학교로 승격시킨 뒤 수원고등농림학교가 됐다.
해방 이후 1946년 국립 서울대가 개교하며 서울대로 편입됐다. 2003년 서울 관악캠퍼스로 이전할 때까지 한국의 농업 발전을 이끄는 연구자들을 배출하고, 민주화 운동기에는 불의에 항거한 학생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서울농대가 떠난 뒤 본관 등 건물 일부는 서울대 농생명과학 창업지원센터로 이용되고 있다. 나머지 빈 건물과 공간은 경기상상캠퍼스라는 공간으로 재탄생시켜 지역 주민과 예술인들이 활용하고 있다.
역사를 기억하며 리모델링 된 공간들은 새로운 창작의 거점이 된다. 특히 100년 넘게 우거진 숲과 잔디밭, 정자 등은 시민들이 맘껏 즐기는 소중한 힐링 공간이다.
후문쪽으로 빠져나오면 오른쪽은 ‘푸른지대’ 터이고, 왼쪽은 ‘탑동시민농장’이다.
지금은 사라진 푸른지대의 터는 수원이 한 때 딸기의 고장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의 추억 한페이지를 장식하는 곳이다. 1955년 서울농대의 지도를 통해 신품종 딸기가 재배되기 시작한 농장인데, 1970년대 수도권의 대표 유원지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이다.
자가용과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 하루만에 다녀오기 좋은 유원지로 푸른지대는 인근 지역 사람들이 봄이면 딸기, 가을에는 포도를 먹으며 하루를 즐겼다. 전성기에는 관광버스가 특별운행을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아지면서 종합테마파크처럼 매점과 벤치, 탁구대 등이 설치된 핫플레이스였다.
푸른지대 아래쪽 탑동시민농장은 원래 서울농대의 연습림이었다.
푸른지대에 놀러 온 사람들이 산책을 즐겼는데, 푸른지대가 사라지고 서울농대가 이전하면서 잊혀지는 듯했다가 당수동에 있던 시민 텃밭이 이전할 곳을 찾으면서 2019년부터 16.5㎡ 규모의 텃밭(1800개)이 만들어져 시민들의 여가와 행복이 심어져 있다.
탑동시민농장의 남쪽 끝에는 ‘서둔야학’ 건물이 남아 있다.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의 볼 품 없는 건물이지만 서울농대 학생들과 서둔동 청소년들이 꿈과 희망을 키워가던 흔적이다.
1965년 대학생 교사와 어린 학생들이 닭을 키우던 양계사를 뜯어내고 교사를 세웠고, 호롱불 아래서 야학을 하던 학생들은 푸른지대 주인 박철준이 전선을 지원해 전깃불 아래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1983년 문을 닫기까지 서울농대와 지역 주민들이 끈끈한 연결을 기억하며 서둔야학 건물은 그 자리를 지킨다.
수원시 관계자는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은 기관들이 이전했지만 여기산과 축만제는 농업연구의 중심지이자 농업혁명의 상징임에 변함이 없다”며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는 만큼 일대의 근현대 역사도 다시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수원의 농업 역사지를 찾아보면서 '진주 농업'의 옛 영화를 찾는 노력을 절대 게을리해선 안 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