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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 멈춰서 읽는 시] 김상용 시인의 전원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

정기홍 기자 승인 2022.11.26 02:38 | 최종 수정 2022.11.26 18:20 의견 0

더경남뉴스는 운동길과 산책길에서 자주 보는 입간판 시를 소개합니다. 대체로 쉬운 시구여서 누구에게나 와닿습니다. 걷다가 잠시 멈추고서 시 한수에 담긴 여유와 그리움, 아쉬움들을 느껴보십시오.

'남으로 창을 내겠소'는 시인 김상용이 1939년에 쓴 시입니다. 원제목은 '南으로 窓을 내겠소'입니다.

길지 않은 이 시는 자연을 벗삼아 농촌생활을 소소하게 즐기겠다는 전원시입니다.

입긴판의 글체가 헐어 확실하게 읽히지 않아 다시 소개합니다.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이 시를 이해하려면 먼저 '한참 갈이'와 '공'이란 단어의 뜻을 알아야 하겠네요.

'한참 갈이'는 '한참갈이'의 잘못인 것 같습니다. 시인이 잘못 쓴 건지, 또한 일부러 그런 건지는 알 길은 없습니다.

다만 이런 것이 시의 고유한 특징이자 매력이기도 합니다. 상식과 정형을 깨는 시의 맛이기도 하지요.

한참갈이는 '소로 잠깐이면 갈 수 있는 작은 논밭의 넓이'를 뜻합니다.

'공'은 공짜입니다. 요즘 시쳇말로 쓰는 "꽁으로 먹을라고"를 연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전체 시풍을 음미해보시지요.

시인은 집을 고를 때도 남향을 선호하는 것처럼 '남(南)'을 밝고 건강한 이미지로 내세우고서 농촌의 자연과 전원생활을 그립니다.

'한참갈이'와 '새 노래'를 통해 큰 욕심을 내지 않는 '무욕'과 작은 것에 족함을 아는 '안분지족'의 속을 내보입니다.

시인은 지나는 구름을 빚대 이러한 전원생활을 떨치고 세속으로 나오라고 한들 하지 않는다는군요. 구름이 '꾄다(꼬신다)고 넘어기지 않겠다'고 거절합니다.

나아가 허망한 세속의 삶과 물질적 유혹을 멀리하고, 이어 공짜로 들려주는 새노래를 듣고 가꿔놓은 옥수수가 익으면 같이 쪄먹자고 제안합니다.

그러고선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다면 그냥 웃겠다고만 합니다.

여기서 불교에서 말하는 '염화미소(拈華微笑)'를 끌어온다면 시인의 나무람은 없을까 싶네요.

염화미소는 '꽃을 집어 들고 웃음을 띠다'란 뜻인데 '말이 아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을 이릅니다. 말을 안 해도 소박한 전원생활의 만족감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주고 받는다는 것이겠죠. 이게 전원생활입니다.

짧은 전원시이지만 시인이 시를 읽는 독자에게 던질 건 다 던진 시로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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