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경남뉴스가 창간 2주년(4일)을 맞아 '경남-부산-울산 인물열전'을 시작합니다. 유명한 인물을 위주로 탐색하지만 조선의 백정 신분해방 민란인 '형평운동' 등 민초들도 소개하겠습니다. 서부인 진주편, 중부 창원편, 동부의 부산·울산편으로 나눠 진행됩니다.
이봉조 씨의 글은 ▲일생의 개요-색소폰의 대가(1) ▲결혼과 현미 씨와의 외도(2) ▲대중음악가로서 그의 발자취(3)로 구분해 싣습니다.
진주 출신인 색소폰의 대가 이봉조 씨의 일생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가수 현미(본명 김명선) 씨입니다. 그는 지난해 4월 4일 자택에서 쓰려진 채 발견돼 병원에 옮겨졌으나 숨을 거뒀습니다. 일세(一世)를 풍미하며 나이 팔십을 훌쩍 넘어서도 에너지가 넘쳤던 대형 가수 현미 씨는 나이 85세로 불현듯 먼길을 떠났습니다.
현미 씨는 오래 전인 지난 2007년 데뷔 50주년을 맞아 가진 기자회견에서 “팔십이든 구십이든 이가 확 빠질 때까지, 은퇴는 목소리가 안 나올 때까지 노래를 할 것이다. 멋지고 떳떳하게 사라지는 게 참 모습”이라며 의욕을 보였었지요. 언제나 당당하고 끊고 맺음도 정확했습니다.
그의 갑작스런 타계 소식에 이자연 대한가수협회장은 "목소리도 크시고 건강하셔서 100세 이상까지도 끄떡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날 저녁에도 지인과 식사를 하셨다더라”라며 황망해했다지요.
가요계의 천재로 불렸던 이봉조 씨를 현미 씨의 일생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사랑도 사랑이지만, 한국의 유명 가요 중 상당수가 두 사람 사이에서 탄생됐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정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부부처럼 오랜 기간 가정을 꾸리고 살았습니다. 언론에 비친 기사에서도 '남편-아내'로 설정해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부인의 사적인 얘기는 별로 없습니다. 지금도 읊조리는 '만남'의 가수 노사연 씨와 배우 한상진 씨의 이모로도 알려져 있지요.
두 사람 간의 일화와 비화는 현미 씨가 중년을 넘기면서 방송 등에서 털어놓으면서 하나 둘씩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현미 씨는 1938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8남매 중 3째로 태어나 거주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6·25전쟁)이 나자 1·4후퇴 때 남쪽으로 피난을 왔습니다. 당시 가족이 뿔뿔이 헤어진 아픔이 있습니다. 일부는 남북이산가족 찾기에서 만나기도 했습니다.
작곡가 이봉조-가수 현미의 만남은 당시 한국 가요계의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가요계는 1930년대 이후 트로트와 신민요가 주요 장르로 자리잡았지만 1950년대 미8군 쇼의 영향으로 '한국식 팝'이 새로운 주류 장르가 됐습니다. 이어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일제 식민지와 6·25전쟁의 척박함에서 벗어나면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젊은 세대의 취향을 담은 록과 포크가 가요계에 빠르게 자리했습니다.
대중음악 장르 생태계의 다양성이 이 무렵 대폭 확대됐다는 말입니다.
작곡가 이봉조 씨는 당시 유행하던 '한국식 팝'을 중심으로 각종 장르를 넘나들며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습니다. 1950~60년대 10여 년간 한국 가요계를 선도한 대표적인 대중음악가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현미 씨는 이 무렵인 1957년 미8군 무대를 통해 가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최승희 씨로 대표되는 '칼춤'의 무용수로 미8군 무대에 올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출연하기로 한 여가수가 일정을 펑크 냈고, 그녀가 대타로 나서 일약 관심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이봉조 씨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당시 이봉조 씨는 미8군 부대 밴드마스터이자 작곡가로 가요계에선 유명한 인사였지요.
스타의 탄생은 이처럼 우연에서 시작되는 경우를 자주 목도합니다. 현미 씨로서는 대타로 나선 가수 데뷔도 그렇고, 이봉조 씨와의 만남도 그렇습니다. 우연이란 다리가 놓이고, 인연에 이어 필연으로 자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반인들에게도 적용되는 일반공식으로 볼 수도 있겠지요.
당시 이봉조 씨는 연애결혼(1956년)한 부인 노전숙 씨와의 사이에 1남(이영대) 3녀(영숙·영미·지수)를 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봉조 씨가 현미 씨와 외도를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1958년 노전숙 씨와는 별거에 들어갔고, 이후 꽤 오랫동안 지속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현미 씨는 그 당시는 물론 이후에도 이봉조 씨가 미혼인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봉조 씨의 이야기로 옮깁니다.
이봉조 씨가 대중음악가로서 공식 등장한 때를 1958년으로 봅니다. 그가 지휘하던 악단이 그해 12월 열린 전국경음악경연대회에서 밴드부 1위로 선정돼 알려졌기 때문이지요.
이봉조 씨는 미8군 쇼와 일반 무대를 넘나들며 연주가로서 밴드마스터로서 이름이 알려질 무렵입니다.
물론 그가 이전인 1956년 무렵 작곡가 박춘석, 재즈음악가인 엄토미 등과 함께 서울 유명 살롱에서 재즈를 연주하고 있었다는 후대 기록은 있습니다. 참고로 이봉조 씨는 1931년생, 박춘석 씨는 1930년생, 엄토미 씨는 1922년생입니다. 이봉조 씨의 재즈 음악은 엄토미 씨에게서 사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몇 년 후인 1962년 첫 음반을 발표하면서 작곡가로서 본격 활동을 시작합니다. 작곡가 손석우 씨가 설립한 비너스레코드에서 만든 현미 씨의 데뷔 음반에 실린 ‘슬픈 거리를’이 그의 첫 작품이었습니다. 손석우 씨는 1950년대부터 '한국식 팝'의 선구자로 활약해온 작곡가입니다.
그런데 히트를 친 노래는 그가 작곡한 ‘슬픈 거리를’이 아니라 그가 같은 해에 작사와 편곡을 한 번안곡인 ‘밤안개’였습니다.
'밤안개'가 히트를 치면서 이봉조 씨는 이 음반을 통해 새로운 흐름을 선도하는 신진 작곡가로서 큰 기대를 모았습니다. '밤안개' 이후 운명처럼 가장 가까운 음악 콤비가 됐지요. 이후 본처 몰래 살림을 차리면서 사실상 부부로 지냈고 둘은 많은 노래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봉조 씨는 당시 현미 씨 외에도 윤복희, 정훈희, 펄시스터즈, 김추자 등 1960~1970년대를 풍미한 스타 가수들과 숱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1970년 국내 가요계에서 처음 참가한 외국가요제인 일본 도쿄국제가요음악제에서는 이봉조 씨가 작곡하고 정훈희 씨가 부른 '안개'가 500여 편 출품작 중 베스트 10에 선정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정훈희 씨의 대표곡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중간 정리를 하면 그는 1962년 '이봉조 악단'을 만들어 미8군 무대를 누볐고, 소속 가수였던 현미 씨는 이 해에 내놓은 1집 앨법 수록곡인 ‘밤안개’로 일약 스타로 발돋움하게 됐지요. 구성진 목소리로 혜성처럼 나타나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봉조-현미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 곡은 유명한 미국 재즈 가수 냇 킹 콜(Nat King Cole)의 ‘It’s lonesome old town’을 편곡한 곡입니다. 한때 이봉조 씨 자신이 작사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다만 원곡이 시골 밤 풍경을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멜로디인 반면 ]밤안개'는 현미 씨의 시원한 가창력과 어울리는 세련된 멜로디가 돋보인다는 평을 듣습니다. 지금까지도 가수 현미 씨를 말하면 떠오르는 대표곡이 '밤안개'입니다.
이후 현미 씨는 이봉조 씨가 도움으로 히트곡들을 양산합니다.
둘의 인연에서 '보고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없이', '애인' 등 잇단 히트곡이 나오면서 최희준 등 당대의 최고 가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됩니다.
현미 씨는 그의 실질적인 남편인 이봉조 씨가 사망한 뒤에도 30여 년을 홀로 지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난 자녀(남)들은 모두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현미는 지난 2022년 10월 TV조선 ‘스타다큐 마이웨이’에 출연해 먼저 저 세상으로 간 이봉조 씨에 대한 일화를 전하며 애틋함을 드러냈습니다. 다음은 방송 내용입니다.
그는 이봉조 씨를 두고 “그분 덕분에 내가 스타가 됐다. 나의 은인이자 스승이요, 애인이요, 남편이라고 생각한다”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이봉조 씨와의 첫 만남을 두고선 “눈이 새카맣고 잘생겼었다. 추운 겨울에 트럭을 타면 내게 겉옷과 양말을 양보하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었다”며 "그렇게 3년을 매일같이 만났고 결혼하기로 했고,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현미 씨는 “총각이라고 해서 연애를 시작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딸이 둘 있는 유부남이었다. 스무 여섯 살인데 유부남일 줄 어떻게 알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현미 씨의 뱃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이봉조 씨는 본처를 버리고 현미 씨를 선택했고 두 사람은 두 아들을 낳고 인연을 이어갔습니다. 현미 씨와의 사이엔 2남(고니(이영곤), 이영준)을 두었습니다.
그러다 1974년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갑니다.
이봉조 씨가 다른 여가수와 일본 여행을 가는 등 염문설이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현미 씨는 “이봉조 씨에게는 이미 자식이 둘 있었고 나에게서 또 둘을 낳았다. 그럼 나는 그 사람을 돌려보내는 게 기본이라고 생각했다”고 당시 상황을 언론에서 말했습니다.
현미 씨는 이봉조 씨에게 헤어질 것을 통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날 밤 이봉조 씨는 술을 마시고 현미 씨를 찾아와 야구방망이로 살림을 부수기 시작했고 현미 씨는 “잠옷 바람에 밍크코트 하나 입고, 애들을 데리고 도망 나왔다. 그날 영원히 헤어졌다”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둘의 인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주위 지인들에 의하면 이봉조 씨는 이별 이후에도 오래 동안 현미 씨를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현미 씨는 방송에서 "1987년 이봉조 씨가 다시 찾아왔는데 그 잘생긴 사람이 말라서 위아래 틀니를 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했습니다.
당시 이봉조 씨는 “내가 이렇게 불쌍하게 살고 있는데 나를 이렇게 놔둘 거냐”고 했고, 현미 씨는 고민 끝에 “내가 영감을 모실 테니까 건강하게 다시 살자”고 화답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집 나가 외도를 하던 사람의 끝이 좋지 않다는 말이 있듯이 다시 합치기로 약속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87년 8월 31일 이봉조 씨는 56세의 젊은 나이로 심장마비로 세상을 뜹니다. 평소 협심증과 당뇨 등 지병을 앓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88서울올림픽 공연분야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현미 씨는 이 방송에서 “우리 운명이 거기까지밖에 안 됐나 보다”라고 하며 안타까움에 이어 허전함을 내비쳤습니다.
현미 씨는 사망할 때까지 이봉조 씨로부터 받은 첫 연애편지를 액자에 담아 보관하고 있었고, 집 현관에는 이봉조 씨의 서예 작품도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현미 씨는 이와 관련해 “이봉조 선생님이 이 집안을 지키고 있다.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 생활했다고 합니다.
그의 노래 '당신이 무작정 좋았어요'(1967년) 노래 말처럼 이봉조 씨를 무척, 그리고 오래 사랑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물론 앞서 간 이봉조 씨와 다시 만난다는 전제를 두면 또 다른 영혼의 사랑은 잇게 되겠지요.
연예계에서는 한 남자를 사랑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산 현미 씨를 들어 '평소 솔직하고 화끈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은' 가수 중의 한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현미 씨는 세상과 작별하기 몇 년 전인 2019년 1월 경남 남해의 뜻있는 예술인들이 현미 씨를 찾아와 남해에 이봉조음악관을 세우려고 한다고 하자 평소 이봉조 씨가 쓰던 색소폰, 자필 악보, 생활용품, 상장과 상패 등 손때 묻은 유품들을 흔쾌히 기증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봉조 씨는 남해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자랐습니다.
이봉조 씨는 자신의 평생 트레이드 마크인 재즈와 색소폰 말고도 작곡가로서 현미 씨 외에도 고등학생이던 정훈희 씨를 발굴해 '안개'로 데뷔시켰지요. 이 노래는 지금도 국민 가요급으로 애창되고 있습니다. 뮤지컬 배우 출신의 윤복희 씨를 훈련시켜 가수로 진로를 바꾸게도 했습니다.
정훈희는 현미 씨의 타계 소식에 한 언론에서 "연예인 끼를 타고난 가요계의 왕언니"라며 "춤을 정말 잘 췄고 허스키한 음색도 독보적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다른 많은 여가수와 작곡과 노래로 수많은 인연을 맺었는데도 별 염문이 없이 현미 씨와 그토록 진한 연인 관계를 이었는지 참인연은 따로 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