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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경남뉴스 창간 기획-부울경 인물열전] 진주편-색소폰의 대가 이봉조(1)

정창현 기자 승인 2024.02.04 04:03 | 최종 수정 2024.03.15 18:23 의견 0

더경남뉴스가 창간 2주년(4일)을 맞아 '경남-부산-울산 인물열전'을 시작합니다. 유명한 인물을 위주로 탐색하지만 조선의 백정 신분해방 민란인 '형평운동' 등 민초들도 소개하겠습니다. 서부인 진주편, 중부 창원편, 동부의 부산·울산편으로 나눠 진행됩니다.

[진주 등 서부경남편] 경남 진주는 '유서 깊은' 고장입니다. 진주는 예부터 '남 진주-북 평양'으로 불리며 풍류와 멋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경상 우도 중심지에 이어 해방 이후 지금껏 숱한 전국 인재를 배출한 고장입니다. 진주농고와 진주고, 진주사범학교를 중심으로 한 교육은 전국 제일로 인재 산실이었습니다. 지금도 "아이들을 제대로 공부시키려면 진주로 보내라"는 말은 바이블(bible, 성서·경전)과 같이 회자됩니다. 또한 삼성·LG·GS 등 글로벌 기업을 탄생시킨 명문의 고장입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이봉조

이봉조 씨의 글은 이봉조 씨 일생의 개요 ▲결혼과 현미 씨와의 외도 ▲작곡·작사가로서의 삶으로 구분합니다.

이봉조 씨

이봉조 씨와 그의 애기 액소폰들

이봉조 씨를 요약하자면 연주자이자 작곡·작사자로 통합니다.

그를 말하면 곧바로 색소폰이 이어집니다. 우리나라의 재즈 색소폰 연주자의 대부격이지요. 재즈 테너 색소폰 연주자로서 한국의 '스탠 게츠(미국)'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여느 음악 분야 전문가가 그렇듯 작사가, 작곡가로 수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영화음악 장르에까지 외도를 한 음악계의 팔방미인이었지요.

이봉조 씨를 연재 맨 먼저 앞세운 것은 다름 아닌 트로트의 대부활을 주도한 TV조선의 '미스트롯3'에서 경남 진주 가람초교 5학년생 빈예서 양이 일약 '트로트의 신동'으로 불리며 1위를 달리고 있고, 이봉조 씨와 오랜 내연관계(이후 결혼식 올림)로 두 아들을 둔 대형가수 현미 씨가 지난해 4월 별세해 시의성이 있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진주의 인물은 수없이 너무 많지만 진주의 정체성을 두고 말할 땐 대체로 전국 종합지방문화제 효시인 '영남예술제(개천예술제)'를 만든 설창수 씨를 먼저 추천합니다. 다음에 소개합니다.

<출생과 성장>
이봉조(李鳳祚·1932~1987년) 씨는 정확히 말하면 진주 사람이 아닙니다. 인근 남해군 창선면 수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5월 1일생(호적상 1932년 5월 1일)입니다.

그 무렵 중서부 경남의 유복한 집안 자제들이 그렇듯 이봉조 씨도 어릴 때 경남의 중심도시인 진주로 유학을 왔습니다. 남해에선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쳐 음악적인 소양을 길렀다고 전합니다.

진주로 유학을 온 이후, 요즘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진주고등보통학교(5년째)를 졸업했습니다. 1951년 9월 중등교육 체계가 6년으로 바뀌면서 진주중학교(3년), 진주고등학교(3년)로 1년이 늘어나 분리됐지요.

진주시에서 펴낸 '진주인물열전'엔 동급생들이 전하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옵니다.

당시 진주고보 음악담당 교사는 진주 출신 유명 작곡가 이재호 씨였습니다. 이 교사는 목소리가 거칠어 노래는 그저 그랬지만 제자 이봉조의 음악적인 감각은 인정했다고 합니다.

1940년대 후반 사진에는 이 선생이 지휘하는 학교 악단 연주에 이봉조로 추정되는 연주자가 나옵니다. 이때가 지금의 고등학생 때라고 합니다. 지역 음악계에선 이를 비춰볼 때 이 선생이 이봉조 씨의 음악 세계를 갖추는 데 적지 않은 큰 영향을 준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는 평을 내놓습니다.

이봉조 씨는 이어 1952년 한양공대 건축공학과에 입학을 합니다. 당시로선 주목을 받지 못했던 공대를 택한 것이 이채롭는데, 이 대학을 택한 것은 나중에 이 학교 교수의 사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것을 보면 색소폰 때문에 택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학창시절엔 미군부대 존 콜트레인(1927~1967년), 소니 롤린스(1930년~) 등의 테너 색소폰 연주를 듣고서 감동해 진주고보 학교 밴드부에 들어가 색소폰을 불기 시작했다고 전합니다.

<재즈 심취 청년기>

그는 일찍이 미국의 재즈 음악에 심취했다네요.

대학 때엔 악단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연주자로서 기량을 쌓았고, 대학 때인 1954년부터는 용산 미8군에서 재즈 색소폰을 연주하고 공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2년간을 휴학했고 졸업은 1958년 했습니다.

이후 서울시청 토목과 별정직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틈틈이 미8군 무대에서 재즈 테너 색소폰을 연주하며 당시 테너 색소포니스트 엄토미 씨의 문하생으로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당시에는 요즘처럼 시험을 치러지 않고도 공무원이 되는 시절이었습니다.

낭중지추(囊中之錐·주머니 속의 송곳)란 말처럼 속에 든 끼는 버릴 수 없는 것. 1961년에 서울시 공무원을 그만두고 자신의 평생 직업이 된 재즈 음악가의 길을 걷습니다.

<색소폰 대가>

이봉조 씨가 KBS교양악단 단장으로 섹소폰을 연주할 때면 경남의 명문 학교를 나온 수재였자며 무척 특별하게 보았다고 전합니다.

당시엔 머리 좋은 애는 '공부'만 해야 하는 학풍으로 예술을 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요. 또한 당시엔 음악과 미술은 공부 잘 하는 학생이 하지 않는 직업으로 인식이 돼 있었습니다. 학생에게 눈 나빠진다며 미술을 하지 마라는 때였으니 짐작이 됩니다.

하지만 '딴따라'라며 경시한 풍조가 한 개인의 능력을 막을 수는 없었지요. 예술이란 영역이 이런 마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즘은 하고 싶어도 못 합니다.

<작곡·작사가 등 활약>

자신의 평생 트레이드 마크가 된 재즈 색소폰 말고도 그는 작곡가로 대형 가수 현미 씨와 정훈희 씨 등을 발굴했습니다. 뮤지컬 배우였던 윤복희 씨를 훈련시켜 가수로 진로를 바꾸게 했다는 이야기도 흥미롭네요.

주요 작곡 노래는 ▲보고 싶은 얼굴 ▲꽃밭에서 ▲무인도 ▲사랑의 종말 등이 있습니다.

1963년에는 영화 '가정교사'로 영화 음악감독으로 데뷔했고 1965년엔 영화 '광야의 호랑이'로 영화 음악연출가 데뷔했습니다. 이어 1967년 영화 '안개'를 통해 영화음악 연주감독으로 데뷔했네요.

이봉조 씨의 레코드판

짚어보면 색소폰 연주자, 테너 색소폰 연주자, 작사가, 작곡가, 편곡가, 영화 음악감독, 영화음악 연출가, 영화음악 연주감독 등 수없이 많네요. 음악 분야의 재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화려합니다.

그는 문화공보부 문화산업자문위원(1981년)도 역임했습니다. 1972년에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받았습니다.

<결혼과 외도>

이봉조 씨는 연애를 한 부인 노전숙 씨와 1956년 결혼해 1남(이영대) 3녀(이영숙, 이영미, 이지수)를 두고 있습니다.

이봉조-현미 씨. TV조선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외도로 1958년 노 씨와 따로 살았다고 합니다. 이봉조 씨와 오랜 내연의 가수로 알려진 현미 씨와 만남이 이즈음입니다. 유부남임을 속이고 결혼을 전제로 동거를 하면서 2남(고니(이영곤), 이영준)을 두었습니다. 나중에 결혼식을 올렸으나 유부남임이 탄로 나 부인 노 씨가 찾아와 다툼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알려져 있습니다.

파란만장한 생활을 하던 그는 88 서울올림픽 공연분야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던 1987년 8월 31일, 56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습니다. 평소 협심증과 당뇨 등 지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천재성을 지닌 사람은 단명한다는 말이 와닿는 대목입니다.

이봉조 씨의 묘는 남해나 진주에 없습니다. 충남 천안시 광덕면 신덕리 공동묘지에서 영면하고 있는데 왜 먼 충남에 모셔졌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네요.

고향인 남해의 예술인들이 지난 2019년 1월 현미 씨를 만나 남해에 이봉조음악관을 세우자고 권유했고 현미 씨는 음악관이 세워지면 흔쾌히 이봉조 씨가 평소 쓰던 색소폰, 자필 악보, 생활용품, 상장과 상패 등 유품들을 기증하기로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미 씨는 지난해 세상을 떠났고, 이후 음악관 건립 이야기는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다소 아쉬운 대목인데, 건립 계획이 구체화 되도록 힘이 모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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