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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경남뉴스 창간 2주년 기획-부울경 인물열전] 진주편- 작곡, 색소폰, 영화 등 대중음악계 이봉조 씨 흔적들(3)

정기홍 기자 승인 2024.06.08 21:33 | 최종 수정 2024.06.15 00:22 의견 0

더경남뉴스가 창간 2주년(4일)을 맞아 '경남-부산-울산 인물열전'을 시작합니다. 유명한 인물을 위주로 탐색하지만 조선의 백정 신분해방 민란인 '형평운동' 등 민초들도 소개하겠습니다. 서부인 진주편, 중부 창원편, 동부의 부산·울산편으로 나눠 진행됩니다.

[진주 등 서부경남편] 경남 진주는 '유서 깊은' 고장입니다. 진주는 예부터 '남 진주-북 평양'으로 불리며 풍류와 멋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경상 우도 중심지에 이어 해방 이후 지금껏 숱한 전국 인재를 배출한 고장입니다. 진주농고와 진주고, 진주사범학교를 중심으로 한 교육은 전국 제일로 인재 산실이었습니다. 지금도 "아이들을 제대로 공부시키려면 진주로 보내라"는 말은 바이블(bible, 성서·경전)과 같이 회자됩니다. 또한 삼성·LG·GS 등 글로벌 기업을 탄생시킨 명문의 고장입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이봉조 씨의 글은 앞서 ▲일생의 개요-색소폰의 대가(1) ▲결혼과 현미 씨와의 외도(2)를 짚었고, 이번 회에서는 대중음악가로서의 발자취(3)를 살펴봅니다.

그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했던 선도 역할과 끼친 영향은 아주 다양하고 실로 대단합니다. 작곡-색소폰-영화음악-재즈로 나눠 짚습니다.

상당수 대중음악가가 가요와 방송, 영화를 두루 넘나들었지만 이봉조 씨의 활동은 유독 두드러집니다. 대중음악에서만은 진주의 큰 자랑거리입니다.

▶이봉조 씨의 음악계 활동 개요

1960~1970년대 전반기는 이전 시기와 비교해 한국 대중음악이 각 분야에서 기지개를 켜던 때였습니다.

6·25전쟁이 끝난 뒤 1950년대의 피폐함에서 일단 벗어나고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개발 드라이브로 살만해지자 대중의 구매력이 생기면서 전축, 라디오 같은 대중음악 관련 매체의 보급도 확대됐습니다.

1950~1960년대의 대중음악은 양적인 성장과 질적인 성장을 함께합니다.

양적인 성장을 예로 들면 이봉조 씨의 작품이 아니지만 이미자 씨의 '동백아가씨'(1964년)의 경우 음반 판매량이 음반계 처음으로 10만 장을 넘겼습니다. 1960년대 최고의 히트곡이자, 지금도 애창되는 불후의 명곡입니다.

질적으로는 대중음악의 장르가 다양해졌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가요의 주요 장르였던 트로트와 신민요 말고도 1950년대엔 가요계의 최상의 무대였던 미8군 쇼를 기반으로 '한국식 팝'이 형성돼 새로운 주류 장르로 떠올랐습니다.

또 1960년대 중반 이후엔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아닌 젊은 세대의 취향을 담은 록과 포크가 새롭게 인기를 끌었지요.

작곡가 이봉조 씨는 이때 혜성처럼 나타나 한국식 팝을 중심으로 걱종 장르를 넘나들며 히트곡들을 쏟아냈습니다.

경북 경주 한국대중음악박물관의 이봉조 전시관에 소장된 이봉조 씨의 유품들

한국대중음악박물관에 전시된 이봉조 씨의 친필 시 '나는 한 방울 빗물'

▶작곡가로서의 이봉조

이봉조 씨는 작곡·작사이자 재즈 색소폰 연주자입니다. 이른바 작곡자 및 연주자이지요. 미국의 대중음악계의 팔방미인인 '스텐 게츠'의 이름을 따서 '한국의 스탠 게츠'로 불렸지요.

1962년 발표한 'It's a Lonesome Old Town' 번안곡 '밤안개'를 비롯해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없이', '종점', 개그맨 이주일의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 등 히트곡은 수없이 많습니다.

이봉조 씨의 작곡 및 편곡 경음악집

수많은 명곡을 탄생시킨 그는 당대를 누볐던 스타 가수들의 대표곡을 작곡하고, 색소폰을 직접 연주하고, 재즈의 선율을 입힌 영화음악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하지만 대중가요계에서 여러 장르를 넘나들었지만 작곡가로서의 영역과 입지가 가장 큽니다. 그의 색소폰 연주가 많이 각인돼 있지만 본류는 작곡입니다.

지난 1962년, 그는 자신이 곡(曲·작곡 음악)을 붙인 첫 작품을 내놓습니다.

작곡가 손석우 씨가 운영하던 비너스레코드 사에서 발표한 음반에 실린 '슬픈 거리를'인데, 작곡가로서의 활동 서막이자 본격화를 예고한 작품이지요. 손석우 씨는 1950년대 한국식 팝(pop·클래식, 예술음악에 반해 대중이 즐기는 통속 음악)의 선구자 역할을 해온 인물입니다.

이 음반은 또한 가수 현미 씨의 데뷔판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사실상 부부관계로 알려졌지만 당시 내연의 관계였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네요.

하지만 그가 히트를 시킨 노래는 같은 해에 현미(玄美·본명 김명선) 씨가 불렀던 한 '밤안개'입니다. 미국의 대가수 냇 깅 콜(Nat King Cole)의 'It's A Lonesome Old Town'의 번안곡(飜案曲·가사만 바꾼 곡)이지요.

이봉조 씨가 편곡해 현미 씨가 불러 대히트를 시킨 '밤안개' 레코드판

앞선 글에서 언급했지만, 두 사람은 미8군사령부 공연 무대에서 만난 이후 음악 콤비이자 사실상 부부이기도 해 현미 씨가 이봉조 씨의 곡을 많이 불렀습니다.

현미 씨는 1957년부터 미8군 무대에서 칼춤 무용수로 활동했습니다. 그 때 이봉조 씨가 현미 씨를 눈여겨봤고 '아, 목동아'라는 팝송 번안곡으로 음반을 만들어줍니다. 이 음반을 사실상 현미 씨의 데뷔곡으로 보기도 합니다.

'밤안개'가 대히트를 치면서 이봉조 씨는 작곡가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하고 이후 '보고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없이', '애인' 등을 내놓아 잇따라 히트를 쳤습니다.

이봉조 씨가 작곡해 현미 씨가 부른 히트곡들을 담은 레코드판

이봉조 씨는 현미 씨 외에도 최희준, 남일해, 윤복희, 차중락, 정훈희, 펄시스터즈, 김추자, 박경애, 최백호, 김세환 씨 등 1960~1970년대를 풍미한 스타 가수들의 대표작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불렀던 상당수의 노래는 방송 드라마나 영화의 주제가로 불려졌습니다.

이봉조 씨와 가수 정훈희 씨와의 음악 관계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영역입니다.

해외 활동은 내연의 관계인 현미 씨보다 더 많이 했고, 결과물도 좋았습니다. 이유는 국제 음악제에선 허스키 목소리인 현미 씨보다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은 정훈희 씨가 수상에 훨씬 유리해서였다고 합니다.

이봉조 씨는 1970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1회 국제가요음악제에 정훈희 씨와 함께 참가해 안개'로 베스트 10에 선정됩니다. 국내 가요계 사상 첫 해외 음악제 수상이었다고 합니다. 전체 출품작이 500여 편이었다니 '안개'의 수상은 괄목할 만합니다. 이후 정훈희 씨의 대표작이 됐었지요.

이 수상은 국내에만 머물던 우리의 대중가요가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은 첫 계기가 돼 그 의미가 상당했습니다. 우리 가요의 해외 무대 진출을 잇는 계기가 되는 등 한국 대중음악계의 지형이 바뀌었다고 평가합니다.

이후 이봉조 씨는 일본은 물론 유럽의 그리스, 남미의 칠레에서 열린 국제가요제에도 두루 참가했습니다.

1971년 열린 그리스 아테네국제가요제에서 정훈희 씨가 '너'를 불러, 1973년엔 현미 씨가 '나의 별'로 입상했습니다.

칠레가요제에도 연이어 참가해 1974년(18회) 정훈희 씨가 '좋아서 만났지요'로, 1975년(19회) 김추자 씨가 '무인도'로, 1979년(20회) 정훈희 씨가 '꽃밭에서'로 수상했습니다. '꽃밭에서'는 최고 가수상을 받았습니다.

'꽃밭에서'는 우리 가요계의 또 다른 디바인 패티김까지 탐냈지만 이봉조 씨는 정훈희 씨에게 곡을 줬습니다.

둘 간의 콤비는 도쿄국제가요제 '안개' 이후 국제가요제에서 6차례나 입상을 합니다.

1970년 제1회 도쿄국제가요제에 참가한 정훈희 씨와 이봉조 씨. 이봉조 씨가 색소폰을 메고 지휘를 하고 정훈희 씨가 노래 '안개'를 부르고 있다. 유튜브 캡처

당시 국내 가요계는 1975년 터진 '연예인 대마초 사건'으로 큰 타격을 받아 암울했던 시기였습니다. 가요계에선 그의 '꽃밭에서'가 이 터널을 빠져 나가는 한 줄기 빛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이 음반은 발표를 하지 못합니다. 정훈희 씨도 대마초 사건에 엮여 1981년까지 6년간 방송과 공연 활동을 못했습니다. 정훈희 씨가 대마초가 발견된 현장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79년 말 그에 대한 혐의가 풀려 무대에 설 수 있었고, 이 곡으로 그는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정훈희 씨의 음색도 좋지만 예쁜 가사, 부드러운 멜로디가 돋보이는 곡입니다.

이 시기에 이봉조 씨는 자신이 작곡한 '무인도', '꽃밭에서' 등의 노래로 전성기를 누립니다.

이봉조 씨가 당시 개척한 이런 국제가요제 활동이 오늘날 K-팝의 씨앗이 됐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국내 방송국에서도 가요제를 개최하고, 대중음악이 더욱 활발해지게 됩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71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봉조 씨와 정훈희 씨의 첫 만남 이야기도 재미있네요.

두 사람은 1960년대 최고 무대였던 남대문 근처 그랜드호텔 나이트클럽 밤무대에서 만났습니다. 당시(1967년)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여고생 정훈희(17) 양을 보고 번안곡 '안개' 곡을 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정훈희 양은 당시 고1학년으로 방학 때 부산에서 서울에 놀러왔다가 그랜드호텔 나이트클럽 악단장이던 작은아버지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외국 노래를 불렀고, 클럽 옆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던 이봉조 씨가 듣고 번안곡 '안개'를 주기로 한 것이지요.

당시 이 곡을 탐내는 가수가 많았는데 이봉조 씨는 정훈희 씨에게 "이 곡은 니(너의) 곡이다"라고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정훈희 씨는 이후 언론에 "이봉조 선생님이 이미 색소폰 연주로만 발표한 미완의 '안개'의 LP(레코드판)를 건네며 연습해오라고 했고, 1주일 뒤 '안개'의 가사를 주셔서 데뷔곡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정훈희 씨의 가족은 가수인 아버지를 비롯해 4명의 오빠가 악기를 다루는 등 음악가 집안입니다.

이 곡은 제1회 도쿄국제가요음악제 수상을 계기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1960년대 주류였던 트로트와 차별화 한 팝 멜로디, 운치 있는 가사와 정훈희 씨의 특유의 고운 음색이 어우러졌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안개' 등 5곡을 수록한 정훈희 씨의 이 데뷔앨범은 당시로선 엄청난 40만 장이 판매됐습니다.

이봉조 씨가 정훈희 씨와 많은 콤비를 이룬 것은 자신이 발굴한 가수여서 평소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와 함께 가수 현미 씨가 1964년에 내놓은 '떠날 때는 말없이'는 이봉조 씨의 작곡 근간을 엿볼 수 있는 웅장한 곡입니다. 20여 명의 경음악단 연주와 중간에 삽입된 이봉조 씨의 색소폰 연주가 특징입니다.

가사엔 이별의 쓸쓸함과 비장함이 녹아 있고 현미 씨 특유의 허스키하면서 애틋한 목소리가 잘 조화된 곡입니다.

이후 같은 해 개봉한 신성일-엄행란의 동명 '떠날 때는 말 없이' 영화 주제가로 선보여 대중에게 오랫동안 각인되었지요.

현미 씨의 '떠날 때는 말 없이' 레코드판

▶'이봉조의 상징' 색소폰 연주

이봉조 씨가 작곡해 히트된 가요는 수없이 많고 그를 작곡가로 기억하지만, 그의 또다른 상징마크는 색소폰입니다. 지금도 방송에서 색소폰을 부는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합니다.

그는 작곡가라는 타이틀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예술인이었습니다. 그를 '한국의 스탄 게츠'(1927~1991년)로 부르는 이유입니다.

스탄 게츠는 우크라이나계 미국인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재즈 색소포니스트, 영화배우로 불렸습니다. 그래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미상은 미국 레코드 예술과학아카데미가 주최하는 음반업계 최고 권위의 상으로, 영화의 아카데미상에 비견됩니다.

스탄 게츠가 1970년대 초 인삼이 색소폰을 연주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말을 듣고 한국을 방문했을 때 TV 쇼 프로그램에서 두 사람이 협연해 화제가 됐었지요.

이봉조 씨의 색소폰 경음악 레코드판

이봉조 씨의 색소폰 연주 실력은 소싯적부터 악기를 다루는 남다른 소질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는 경남 남해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음악 분야에 소질이 뛰어나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이어 그는 경남 진주중 학창 시절에 학교 밴드부에 들어가 색소폰을 불렀다고 합니다. 1952년 대학(한양대 건축학과)에 가서도 음악을 끊지 못해 학생 신분으로 당시 최고의 라틴음악 악단이었던 김광수악단에 들어가 활동을 했습니다.

때마침 일본 오키나와에 있던 미8군사령부가 용산으로 옮겨오면서 그는 대학 4학년 때 친구의 권유로 미8군에서 연주하며 존 콜트레인, 소니 롤린스 등 재즈 색소폰 연주 거장들의 음악을 접하게 됩니다.

시끄러운 색소폰 연습 소리에 하숙집을 5번을 옮겼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로 열정이 대단했다고 지인들은 전합니다.

그는 대학 시절 테너 색소폰 연주자인 엄토미(본명 엄재욱) 씨를 사사(師事·스승으로 섬김)한 이후 1956년엔 작곡가 박춘석 씨와 엄토미 씨 등과 함께 서울의 유명 살롱에서 재즈를 연주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서울시청 토목과에서 2년간을 근무하다가 1961년 퇴직을 하고 미8군 무대의 밴드마스터(악단 지휘자)로 본격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후 이력이 붙은 그는 1962년 이봉조악단을 직접 만들어 4~5년간 미8군 무대를 누빕니다.

이 무렵 부산문화방송(MBC) 개국(1959년) 등 민간방송이 속속 개국해 그의 활동 영역이 크게 넓어졌습니다.

이봉조악단은 1964년 MBC에서 주최한 '전국경음악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아 이름을 크게 알렸습니다.

이어 그해 말 동양TV방송국(TBC)이 개국하면서 전속 악단장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이후 TBC의 간판 프로그램이었던 '쇼쇼쇼' 악단을 10년간 이끌었습니다.

이봉조 씨는 이후 미8군 쇼와 일반 무대를 넘나들며 연주가로서, 밴드마스터로서 각광을 받았습니다.

그는 1980년에는 KBS 전속 악단장, 1987년에는 88 서울올림픽 문화행사 공연분야 준비자문위원을 지냈습니다.

▶영화음악 작품도 즐비

1964년 국산 영화 제작이 처음으로 100편을 넘어서는 등 한국 대중문화가 호황기를 탑니다. 당연히 대중가요계에 깊숙히 자리한 이봉조 씨도 바쁜 하루를 보냅니다.

작곡가 이봉조 씨는 영화 음악에도 특별히 관심이 많았습니다. 당시 두 영역의 결합은 새로운 트렌드였기도 했습니다.

그는 1963년부터 많은 영화에서 음악을 맡았고, 몇 몇 작품에는 직접 출연도 했습니다. 1968년에 개봉한 이색 음악영화 '가요 반세기'엔 핵심 스태프로 참여했습니다.

드디어 1963년, 그는 영화 '가정교사'의 음악을 맡으면서 영화음악감독으로 데뷔를 합니다.

다음 해인 1964년엔 극영화 '맨발의 청춘'으로 제2회 청룡영화상 음악상을 수상하면서 영화음악 장르에서도 입지를 굳힙니다. 노래 '맨발의 청춘'은 그가 작곡해 최희준 씨가 불렀습니다.

영화 '맨발의 청춘' 포스터

가수 최희준 씨의 '맨발의 청춘' 레코드판

이봉조 씨는 1960~1970년대 한국의 영화음악 거장으로 자리를 잡으며 무려 110편의 영화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영화 '연애교실' 삽입곡은 1971년 제17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에서 음악상을 수상했습니다.

'연예교실'은 배우 신성일 씨의 감독 데뷔작인데 신성일 씨와 친분이 있었던 이봉조 씨가 이 작품에 붙일 주제가 ‘사랑의 교실’을 작곡해주었습니다.

이봉조 씨가 작곡한 다른 곡과 달리 색소폰을 뺀 구성이 가장 큰 특징으로 청춘의 느낌이 물씬 와닿는 경쾌한 멜로디로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배우 신성일 씨의 첫 감독 데뷔 영화인 '연예교실' 포스터

배우 신성일 씨의 첫 감독 데뷔 영화인 '연예교실' 주제가인 '사랑의 교실' 음반

영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포스터

영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의 서울과 부산 지역 신문에 난 광고

▶재즈 영역의 이봉조

이봉조 씨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곡가이지만 재즈도 관통했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한국의 1~2세대 재즈 음악가이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있지요.

그는 이봉조악단을 만들어 미8군 나이트클럽에서 연주 활동을 하면서 틈틈이 미군들이 즐겨 듣는 재즈 음악에 열중했습니다.

이봉조 씨의 색소폰 사운드 레코드판

우리나라 재즈 역사를 살펴봅니다.

재즈는 1920년대 말 한국에 처음 소개됐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음악의 대세였던 트로트나 창과 다른 감미로운 멜로디와 흥겨운 리듬은 금세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지요.

하지만 1940년대 발발한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사회 분위기 탓에 암흑기를 맞게 됩니다. 이어 6·25전쟁 3년도 겪었습니다.

휴전 이후 세상이 평혼해지자 재즈는 다시 미8군 쇼를 중심으로 대중음악으로 자리하면서 꽃피웁니다. 재즈는 1960년대 들어 한국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데 이봉조 씨가 그 역할을 한 재즈 음악가의 한 명입니다.

이봉조 씨는 1962년 이봉조악단을 결성해 4~5년간 미8군 무대를 누볐습니다. 이후 재즈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스타일의 대중음악, 영화음악을 활발하게 작곡하며 작곡가로서 대중에게 확실하게 인상을 남기게 되지요.

이봉조 씨의 연재는 3회로 마칩니다.

'진주 사람' 이봉조 씨는 모든 것이 부족했던 어려운 시절에 사람들의 위안이 되었던 많은 주옥같은 노래들을 내놓으며 대중가요의 고급화와 세계화에 앞장선 인물입니다.

고향 남해에선 오래 전부터 '이봉조 음악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부부였던 현미 씨가 별세 전에 유품 기증 등 전폭적으로 돕겠다고 했는데 잠시 주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잘 추진돼 남해나 진주에 근사한 이봉조 기념 시설이 하루빨리 생겼으면 합니다.

■이봉조 씨(1931년 5월~1987년 8월)의 가요계 이력을 요약했습니다.

▶경력

경남 남해 창선 출생. 진주중, 진주고, 한양대 졸

▶작곡

번안곡 '밤안개'를 비롯해 '너', '좋아서 만났지요', '무인도', '꽃밭에서', '떠날 때는 말없이' 등 300여 곡의 가요를 작곡했습니다.

▶대중가요

'밤안개'(1962), '아빠 안녕'(1964), '검은 상처의 부르스'(1964), '과거를 가진 여자'(1965), '부베의 연인'(1966), '낙엽'(1968), '너'(1971), '떡국'(1971), '검은 장미'(1973), '그렇게 살래요'(1974), '좋아서 만났지요'(1974), '무인도'(1974), '꽃밭에서'(1978) 등입니다. 레코드 10장(LP)과 주옥과 같은 300여 곡의 가요를 남겼습니다.


이상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진주인물열전

▶영화음악

'가정교사'(1963), '맨발의 청춘'(1964), '떠날 때는 말없이'(1964), '보고싶은 얼굴'(1964), '비련십년'(1965), '상해 오십오번지'(1965), '잃은 자와 찾은 자'(1966), '측발의 청춘'(1966), '상처뿐인 청춘'(1967), '가요반세기'(1968), '청춘고백'(1968), '명동 나그네'(1969), '타이페이 삼만리'(1971),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1971), '어느 사랑의 이야기'(1971), '연애교실'(1971), '청춘 하이웨이'(1973), '즐거운 나의 집'(1973), '죽어서 말하는 여인'(1973), '언제나 님과 함께'(1973), '애인교실'(1973), '하숙인생'(1973), '마음은 짚시'(1974), '그건 너'(1974), '70인의 여죄수'(1974), '지옥의 초대장'(1975), '독사'(고영남, 1975), '이브의 건넌방'(변장호, 1987) 등입니다.

※독자분들께 양해드립니다. 필자가 연재 초입에 몸이 좋지 않아 부득이 석 달 가까이 글을 쓰지 못 했습니다. 앞으로 그간 못 쓴 글 부지런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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