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전 IMF 때 경남 양산 통도사 시주함 훔친 소년, 말 없이 용서했던 스님에게 보은했다
정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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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9 13:16 | 최종 수정 2024.09.09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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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생각이 없었습니다"
최근 경남 양산 통도사 자장암 스님들이 시주함을 열고서 큰 감동을 받았다는 사연이 소개됐다. 5만 원짜리 현금 200만 원이 든 봉투와 함께 편지 한 통이 함께 있었다. 이름은 남기지 않았다.
이 편지의 주인공은 27년 전(1997년 IMF 구제 금융 때) 자신이 자장암 시주함에서 3만 원을 훔쳤다며 "곧 아기가 태어날 예정인데, 아기에게 당당하고 멋진 아버지가 되고 싶다. 감사하고 죄송하다"고 고백했다.
편지를 쓴 이는 이어 "그리고 몇일(며칠) 뒤 또 돈을 훔치러 갔는데 한 스님이 제 어깨를 잡고,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고개를 좌우로 저으셨습니다. 그날 아무 일도 없었고 집으로 왔습니다"라고 적었다.
그 당시 편지 주인공의 어깨를 잡았던 스님은 통도사 주지를 역임하고 지금도 자장암에 수행 중인 감원(監院·절의 재산을 맡아보는 승직) 현문 스님이다.
현문 스님은 조선일보와의 통화에서 "그 소년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일은 또렷이 기억난다. IMF가 터졌던 그 무렵에 시주함이 자주 털리곤 했다"고 전했다.
CCTV도 없던 시절이어서 현문 스님은 시주함 겉면에 '함은 깨지 말아 달라'고 써붙이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현문 스님은 꾸짖지도 않았고, 돈을 훔치려던 이유를 묻지도 않고 소년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문밖으로 보냈다고 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편지 주인공은 "그날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남의 것을 탐한 적이 없습니다. 일도 열심히 하고 잘 살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스님이 주문을 넣어서 착해진 거 같습니다. 그동안 못 와서 죄송합니다”라고 적었다. 이어 "잠시 빌렸다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곧 애기가 태어날 거 같은데 애기한테 당당하고 멋진 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그날 스님 너무 감사했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라며 끝을 맺었다.
현문 스님은 "그 편지를 보면서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구나' 싶어 감동받았다. 특히 곧 아이가 태어난다는 대목에서 가슴이 뭉클해졌다"고 했다. 이어 "그 소년이 그 일을 계기로 옳은 마음으로 살아왔다는 것이 얼마나 기특하냐.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나고, 그분도 당당하고 멋진 아버지로 살아가길 기원한다"고 응원했다.
현문 스님은 "3만 원을 훔쳤던 소년이 왜 66배 금액인 200만 원을 봉투에 넣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감사하는 마음과 자신이 표시할 수 있는 정성을 최대한으로 담은 액수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사찰의 묵언수행(默言修行), 즉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하는 참선과 같았던 현문 스님의 말 없는 가르침이 소년의 삶을 바꿔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묵언(默言)은 잠잠할 묵(默), 말씀 언(言)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