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 세 집을 돌아다니며 보름밥을 얻어먹어야 한 해의 액운을 몰아낸다"
오늘(15일)은 이 같은 풍습이 이어지던 대보름(上元)이다. 중년층 이상이면 어릴 때 조리를 들고 옆집에 오곡찰밥을 얻으려 다니던 추억이 기억으로 생생하게 떠오른다.
정월대보름은 한 해의 첫 보름이자 보름달이 뜨는 날로 큰명절로 친다. 상원(上元)이란 중원(中元·음력 7월 15일 백중날)과 하원(下元·음력 10월 15일)에 대칭이 되는 말이다. 예전에는 설날 만큼이나 비중을 크게 뒀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정월 대보름날 아침엔 어린애들은 조리를 들고 이웃집을 돌아다니며 차진 보름밥을 얻어와 먹는다. 물론 각종 나물 반찬과 부럼도 조리에 한가득 얻어와 형제들과 나눠먹는다.
이날 행사 중엔 마주치는 사람마다 재빨리 하는 '더위 인사'가 있다. 먼저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효과를 본다며 이날 아침이면 경쟁하듯이 "내 더위 사라"는 인사를 건넨다.
우리 세시풍속 행사의 20%가량이 대보름날에 치러질 정도로 절기 중 가장 다채롭다.
'한국의 세시풍속'(최상수 저)에는 한해 동안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세시풍속 행사는 총 189건이라고 소개한다. 이 중 정월 한 달이 세배·설빔 등 78건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정월 78건 중에서 대보름날 하루에 관계된 세시풍속 항목은 40여건에 이른다. 이날에는 동제(洞祭), 줄다리기, 달집태우기 등 크고 작은 행사들이 진행된다.
임동권이 쓴 '한국세시풍속'에도 한해 192건의 세시행사를 수록하고 있다. 이 중 정월 한 달에 전체의 절반을 넘는 102건이 속해 있다. 14·15일 대보름날 관련 항목수가 55건에 이른다.
해가 아닌 달의 움직임을 표준으로 삼는 음력을 사용하는 우리의 전통사회가 첫 보름달이 뜨는 대보름날을 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는 예부터 보름달이 가지는 뜻이 강했다.
음력 대보름을 농경을 기본으로 했던 우리 문화의 상징적인 면에서 보면 달-여신-대지의 음성원리(陰性原理) 또는 풍요원리를 기본으로 했던 것이다.
동제(洞祭)가 그렇고, 줄다리기 같은 것들도 그 전형이다.
양보다 음을 중시해 동제신도 여신이 남신의 2배를 넘는 주류를 이룬다. 첫 보름달이 뜨는 시간에는 여신에게 대지의 풍요를 빌었다.
경남 창녕의 영산(靈山)줄다리기는 암줄과 숫줄의 모의 성행위를 통해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거나 풍년을 기원했다. 줄다리기는 본래 첫 보름달이 뜨는 밤에 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대낮에 '그러한 짓'을 하는 자는 없고 해가 져야 이뤄진다고 해 이것을 성행위처럼 여겼다. 생산의 의미에서 여성을 상징하는 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한다.
대보름의 뜻은 풍요의 원점이 된다. 실제 농경을 위해서는 음력이 한 달씩이나 자연계절에 차이가 생길 수 있어 계절이 정확한 태양력 요소인 24절기를 쓴다.
대보름날 행해지는 농점(農點·흉풍 농사 점)으로서는 달집태우기, 사발재점, 그림자점, 달불이, 집불이, 소밥주기, 닭울음점 등이 있다.
한반도 북부 지방에서는 단오가 큰명절이었지만 중부 이남에서는 단오를 그렇게 큰 명절로는 여기지 않았다. 7월 보름인 백중보다 비중이 작았다. 따라서 씨름, 그네, 또는 백중 장(場)같은 세시풍속 행사는 단오보다 7월 보름에 성했다.
이유는 단오 때는 1년 농사 중 제일 큰일의 하나인 모내기가 끝나지 않은 바쁜 때이고, 백중 때는 김매기도 다 끝나고 가을 추수만을 남긴 한가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달을 표준으로 하는 상원이나 추석은 중국은 물론 한반도에서도 중요한 명절이었다. 상원은 중국 한나라 때부터 8대 축일(祝日)의 하나로 여겼다.
하지만 당송대(唐宋代) 이후의 기록에는 중국의 추석은 한식·단오·중구(重九· 9월 9일)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명절로 소개한다. 우리는 중국과 달리 신라의 가위(嘉俳) 기록 이후로 보름달의 비중이 훨씬 컸다.
대보름날을 설날처럼 여기는 관습은 아직까지 많이 남아 있다.
조선 시대의 '동국세시기'에는 “이날 온 집안에 등잔불을 켜놓고 밤을 새운다. 마치 섣달그믐날 밤 수세(守歲)하는 예와 같다”고 적고 있다.
각 지방엔 비슷한 관습들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전남에서는 열나흗날 저녁부터 보름날이 밝아야 운수가 좋다고 믿어 집안이 환해지도록 불을 켜놓는다. 선주들도 배에 불을 켜놓는다.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고 해서 잠 안자기 내기를 하는 곳이 있다. 이른바 보름 전날 밤 ‘보름새기’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대보름을 ‘소정월(小正月’)로 부르고, 지금은 양력설을 쇠고 있다. 다만 이날을 국가공휴일로는 지정해 두었다.
대보름날에는 절식으로 약밥·오곡 밥, 묵은 나물과 복쌈, 부럼, 귀밝이술 등을 먹는다.
이날 새벽에는 호두, 땅콩, 잣, 밤, 은행 등의 부럼을 깨 먹었다. 딱딱한 열매를 뜻하는 부럼과 몸에 나는 종기인 ‘부스럼’이 비슷하게 소리가 나기에 한 해 동안 부스럼 없이 건강하기를 빌며 “아이고 부스럼이야”라고 외친다.
호두는 본래 동북아시아 산이다. 추자(楸子)라 하는데 한(漢)나라의 무제(武帝) 때 장건(張騫)이 서역에서 새로운 추자를 들여와 이것을 호두(胡桃)라고 했고 당추자(唐楸子)라 부르기도 했다. 경상 지역에서는 호두를 ‘추자’라고 불렀다.
기풍·기복 행사로는 볏가릿대(禾竿) 세우기, 복토(福土) 훔치기, 용알뜨기, 다리밟기, 나무 시집보내기, 백가반(百家飯) 먹기, 나무아홉짐 하기, 곡식 안내기 등을 행한다.
이날에는 농점(農點)도 하는데 달집태우기, 사발재점, 그림자점, 달불이, 집불이, 소밥주기, 닭울음점 등이 있다.
제의와 놀이도 있다.
지신밟기, 별신굿, 안택고사, 용궁맞이, 기세배(旗歲拜), 쥐불놀이, 사자놀이, 관원놀음, 들놀음과 오광대탈놀음 등이다.
고싸움, 나무쇠싸움 등의 각종 편싸움도 행해지고 제웅치기, 나무조롱달기, 더위팔기, 개보름쇠기, 모기불놓기, 방실놀이 뱀치기 등의 액막이와 구충(驅蟲) 행사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