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메뉴

'시대의 지성' 이어령 선생 떠나다···숙환으로 별세

정기홍 기자 승인 2022.02.26 15:37 | 최종 수정 2022.02.26 16:46 의견 0

이 시대의 한국 대표 지성인이자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가 암 투병 끝에 26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유족 측은 이날 "이 전 장관이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고인은 1933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호적상 1934년생)해 문학평론가, 언론인, 교수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대표 석학이자 우리 시대의 최고 지성으로 불렸다.

고인이 1991년 펴낸 '축소지향의 일본인' 표지

노태우 정부 때 신설된 문화부의 초대 장관(1990~1991)을 했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

고인은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부여고를 나와 서울대와 동(同)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내가 돌상에서 돌잡이로 책을 잡을 걸 어머니가 두고두고 기뻐하셨다"며 "이런 어머니 밑에서 자라서 책을 읽고 상상력을 키웠다"고 회상했다.

1960년 서울신문에서 첫 기자 생활을 했다. 이어 1972년까지 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조선일보 등의 논설위원을 역임하면서 당대 최고의 논객으로 활약했다. 언어의 마술사란 말을 들을 정도로 수사학에 뛰어났고, 혼자 서너 시간 말을 쏟아낼 정도의 달변가이기도 했다.

1966년 이화여대 강단에 선 이후 1989년까지 문리대학 교수를, 1995∼2001년 국어국문학과 석좌교수를 지냈으며 2011년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됐다.

20대 초반에 문단 원로들의 권위 의식을 질타한 평론인 '우상의 파괴'를 1956년 한국일보 지면을 통해 발표하며 평단에 데뷔했다. 문학의 저항적 기능을 해야 한다고 역설해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고인은 노태우 대통령의 6공화국 때 문화공보부가 공보처와 문화부로 분리되면서 1990년 출범한 문화부의 초대 장관에 임명됐다.

문화예술인으로는 처음으로 문화부를 이끈 고인은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 전통공방촌 건립, 도서관업무 이관 등 4대 사업으로 문화정책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장관으로서 가정 잘한 일은 행정용어 노견(路肩)을 갓길로 바꾼 것"이라고 자랑했다.

88서울올림픽에서는 개폐회식 대본을 집필하고 개막식에서 '굴렁쇠 소년'을 연출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지난 10월 노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조시(弔詩) '영전에 바치는 질경이 꽃 하나의 의미'로 추모하고 국가장의 유족 측 장례위원에도 이름을 올렸다.

대학 때인 1956년 비평가로 등단한 뒤 문학을 바탕으로 인문학 전반을 아우른 필력으로 생전에 60여권의 책을 집필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0), '축소지향의 일본인'(1984), '이것이 한국이다'(1986), '세계 지성과의 대화'(1987), '생각을 바꾸면 미래가 달라진다'(1997), '디지로그'(2006), '지성에서 영성으로'(2010), '생명이 자본이다'(2013) 등이 대표 저서다.

그는 '디지로그'를 통해 디지털 기반과 아날로그 정서가 융합하는 세상을 말하며 비빔밥과 같은 우리 문화와 정서에서 조화의 힘이 있다고 강조했다. 1990년대 초부터 정보화 사회의 도래를 일찍 감지하고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표어를 제시했다.

고인은 또 개신교 신앙을 고백한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2010)를 출간하면서 저술 활동 50년 만에 새로운 내면을 드러내기도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에서 검사로 활동하다 개신교 신앙을 갖게 된 맏딸 민아 씨에게 닥친 암과 실명 위기, 손자 질병 등을 겪으면서 세례를 받기도 했다. 민아 씨는 지난 2012년 위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아울러 소설 '장군의 수염', '환각의 다리', 희곡 '기적을 파는 백화점', '세번은 짧게 세번은 길게' 등 소설과 희곡, 시집 등도 펴냈다.

이 전 장관은 2017년 암이 발견돼 두 차례 큰 수술을 받았지만, 항암치료를 받는 대신 저서 집필에 마지막 힘을 쏟았다.

고인은 자신을 '이야기꾼'이라 칭하며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를 탐구하는 마지막 저작 시리즈 '한국인 이야기' 집필에 몰두해왔다. 12권으로 계획한 시리즈 중 지난해 2월 첫 권인 '너 어디에서 왔니'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고인은 "생과 죽음이 등을 마주 댄 부조리한 삶. 이것이 내 평생의 화두였으며,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죽음 아닌 탄생의 이야기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또 '이어령 대화록' 시리즈로 '메멘토 모리'를 펴내는 등 생의 마지막까지 우리 삶의 본질적인 물음에 답했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이 1987년 별세 한 달여 전, 가톨릭 신부에게 물은 24가지 질문에 대해 고인이 자신의 관점으로 답한 책이다.

그는 "내 인생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고가는 삶이었다. 미지에 대한 목마름으로 도전했다. 우물을 파고 마시는 순간 다른 우물을 찾아 떠났다"며 '호기심이야말로 창조의 근원'임을 강조했다. 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은 "집에 오면 늘 글을 썼고, 몇 년마다 1년씩 외국에 나가 책 한 권을 써냈다"고 회상했다.

고인은 지난해 10월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대학 때 만난 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 장남 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차남 이강무 백석대 교수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며 5일 가족장으로 치른다.

저작권자 ⓒ 더경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