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의 한 아파트단지에 이색 보따리장수가 왔습니다.
5일 장터를 돌던 보부상과 집집마다 다니던 옛날의 방물장수 분위기는 많이 탈색됐지만 긴 줄로 가지런히 놓인 생필품을 담은 상자가 옛날 정겨움을 다시 불러줍니다. 저 속엔 오만, 온갖 생필품이 다 들었겠지요.
서울의 어느 지역 임대아파트단지 모습인데 이 '방물장수'는 토요일마다 오는 듯했습니다. 방물(생필품)을 파는 장사판'입니다. 노란 상자는 다시 트럭에 실려 또다른 서민 아파트 단지로 이동하겠지요.
방물이란 정확히 말하면 '여자가 쓰는 화장품, 바느질 기구, 패물 등의 물건입니다. 요즘 트럭으로 이동하는 생필품 이동장터와는 많이 다르지만, 부려놓은 방물판은 옛날의 추억을 일깨우기에 충분합니다.
방물장수의 어원은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 조정에, 조선이 중국에 조공물품을 바치던 것들을 통칭해 '방물(方物)'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유래된 게 아닐까 싶네요.
옛날로 치면 5일장을 순례하듯이 다니던 보부상입니다. 여러 물품을 시가로 생산해 농촌 곡식과 바꾸는 행상(行商)인 셈이지요.
그 옛날 울타리 없이 살던 시절, 가을걷이가 끝난 늦가을 농한기에 방물장수가 하나 둘씩 동네에 들어왔었지요.
큼지막한 보퉁이에 바늘, 실, 골무 같은 생필품에서부터 요즘엔 좀체 구경하기 힘든 머리핀, 참빗, 좀약 등 잡다한 물건을 싸들고 와 팔았습니다.
이들이 보통 며칠을 머무는데 집 주인은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그저 재워줬지요.
요즘으로 치면 생필품을 트럭에 싣고 방송을 하면서 다니는 트럭인 셈이지요.
또한 요즘의 나눔장터인 작은 벼룩시장도 형태만 달라졌을 뿐 방물장수의 맥을 이은 것으로 봐도 되겠네요. 코로나19 발생 직전엔 집에서 개인이 수공예로 만든 작은 액세서리 등과 가정에서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내와 싸게 팔았습니다.
애들과 함께 나와 생필품도 싸게 사고, 흥정하는 경제교육도 시키고, 기분전환 운동도 하고 참 좋은 장터인데요. 이제 코로나도 잠잠해지고 있으니 다시 서겠지요.
참고로 조선시대의 보부상을 알아봅니다.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허생원과 조선달이 강원도 봉평장에서 평창장으로 넘어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장돌뱅이, 봇짐장수 등으로 이해하면 되겠네요. 봇짐에 짚신 두어컬례 걸어놓은 정취도 많이 예스럽지요.
보부상은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으로 구분했습니다. 보상은 '물건을 보자기에 싸서 메고 다니며 파는 사람', 즉 보따리장수이고 부상은 '물건을 등에 지고 다니며 파는 사람'입니다. 등짐장수인 셈이지요.
우리나라 마지막 보부상은 김재련 선생입니다.
특히 여자 보상을 ‘방물장수’로 불렀는데 집을 방문해 여성의 필수품인 연지·분·머릿기름 등 화장품류와 거울·빗·비녀 등 장식품, 바느질 도구, 패물에 이르기까지 참 다양한 것들을 팔았습니다.
아마도 취급하는 물품에 따라 나눈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떠돌이 장사꾼인 방물장수와 비슷한 낱말로 '도부꾼(도부장수)'이란 게 있습니다. 신분을 낮춰서 부르는 말입니다. 이마 보통 팔 물건을 보퉁이에 싸서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이 마을 저 마을,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바삐 옮겨다닌다는 '도부'(달리기)에서 파생된 낱말이 나닐까 생각합니다.
방물장수는 노인과 여자가 주로 행상을 해 ‘아파(牙婆)’라고도 불렀답니다.
이들은 농안의 좀을 없애는 좀약을 빼놓지 않고 갖고 다녔습니다. 햐얀 좀약은 안방의 상징인 장롱 속에 항시 대롱대롱 달려 있었지요. 잘 산다는 집의 자개장 안에도 어김없는 필수품이었습니다. 냄새는 엄청 자극적이었습니다.
방물장수는 본업 외에도 바깥 출입이 제한됐던 사대부집은 물론 여염집의 여자들에게 세상 소식을 알려 주거나 심부름을 맡기도 했습니다. 세상물정을 알려 주는 겁니다.
이뿐이었겠습니까? 대갓집 안채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어 단골 마나님의 말동무도 되어 주고, 집안의 큰일인 혼사(婚事)일에 관여했습니다. 집안 내력과 사는 형편을 휀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중매를 하는 '매파(媒婆)'로서의 능력을 말함입니다.
달리 가문들의 사정을 염탐하는 정보수집꾼으로 이용됐다고도 하는군요.
아무튼 중년을 넘긴 분들에겐 어릴 때 방물장수가 참 값진 추억거리일 겁니다. 보자기나 바구니에 한가득 넣고다녀 호기심을 무던히도 자아냈지요. 뜨내기장수면 어떻습니까. 오가는 흥정 속에 사람 사는 냄새가 나면 그게 사는 일상이 아닐까 합니다.
■ 참고 내용
조선시대에는 화장품이 종로통에 있는 백화점격인 ‘육주비전(六綢備廛)’에서 주로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육주비전은 조정으로부터 독점적 상업권을 받고 나라의 수요품을 조달한 여섯 종류의 큰 상점입니다. 육의전(六矣廛)으로 알려져 있지요.
당시 시골에도 화장품을 취급하는 곳이 있었지만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화장품 판매 기록은 17세기 숙종 때 설화에도 나옵니다. 화장품만을 취급하는 방물장수를 일컬어 ‘매분구(買粉嫗)’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화장품, 화장도구 등을 직접 전달했다고 합니다. 당시 여자들의 외출이 쉽지 않은 때여서 이들은 바깥 세상이 돌아가는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사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조선의 방물장수 대부분은 서울의 육의전에서 물건을 사서 전국을 떠돌며 팔던 상인들이었습니다. 실제 불과 20년 전만 해도 종로통에는 육의전에서 붐볐던 상인과 같은 거리 노점상인들이 많았습니다. 뱀장수 등 오가면서 보는 구경거리가 쏠쏠했지요.
우리나라에서 화장품의 방문판매가 다시 도입된 것은 1960년대 초였습니다.
쥬리아화장품이 1962년 방문판매를 하면서 급성장을 보이자 한국화장품, 태평양, 피어리스 등이 방문판매 조직을 갖추기 시작했었지요.
1980년대 초반에는 방문판매가 전체 화장품 유통의 80% 이상을 차지하며 20여년 간 황금기를 보냈습니다.
방문판매가 유독 한국에서 발달한 것은 우리 특유의 사람 관계 중요와 정(情)을 중심으로 한 학연, 지연, 혈연 등을 중시하는 인적 네트워크 때문입니다.
하지만 화장품을 접할 수 있는 채널이 2000년대 들어 홈쇼핑, 할인점, 온라인 쇼핑몰 등으로 다변화되고 접근성이 쉬워지면서 방문판매 채널 비중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