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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흔적] 경남도청 이전사···진주에서 부산 그리고 창원, 다음 이전지는?

정기홍 기자 승인 2022.04.21 15:59 | 최종 수정 2022.05.22 21:34 의견 0

더경남뉴스가 '창간 기획 2탄'으로 경남을 비롯한 부·울·경의 기록물을 찾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분야별 흔적을 소개합니다. 평소 지나쳤던 작은 역사도 끄집어내 탄성을 자아내도록 하겠습니다. 학생들에겐 흥미로운 학습거리도 될 듯합니다.

첫 번째는 경남도청의 변천사로 정했습니다. 근대식 도청이 생긴 곳은 진주입니다. 이어 일제가 수탈을 쉽게 하기 위해 부산으로 옮겼고, 부산시가 직할시(지금의 광역시)가 된 이후 창원으로 옮겨 지금에 이릅니다. 옛 '경남의 수도'였던 진주에 서부청사가 있다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경남도기록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경남도청의 연역입니다.

경남도의 시발은 조선시대 관찰사였네요.

관찰사(觀察使)라···. 기자도 잘 몰라 찾아봤습니다.

조선시대에 각 도에 파견된 지방행정의 최고책임자(지방 장관)라고 돼 있네요. 각 고을의 수령(요즘 시장·군수)을 감찰하는 일을 맡았고, 지금의 도지사나 광역시장입니다. 조선 초기엔 도관찰출척사(道觀察黜陟使) 등으로 불리다가 1466년(세조 12년)에 관찰사라고 했답니다. 임기는 조선 초기엔 1년이었다가 후에 2년으로 됐습니다.

조선 후기 8도. 네이버

달리 감사(監司)라고 했고 도백(道伯)·방백(方伯)·외헌(外憲)·도선생(道先生)·영문선생(營門先生) 등으로도 불렸다는데 '도백'은 지금도 자주 듣는 말입니다.

경남의 첫 도청(관찰사 주재)은 진주에 생겼습니다. 조선 8도일 때 경상도 관찰사가 대구(달성·이전엔 상주)에 있었지만 고종 때 8도를 13도로 나누면서 경상도도 둘로 분리됐고, 그때까지 실제 경상우도(한양에서 경상도로 보면 우측을 뜻함)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진주에 관찰사를 두었지요. 관찰부의 건물 이름은 전국 통일인 '선화당(宣化堂)'이었고, 건물 위치는 지금의 남성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가 각 도에 행정 관리인 도 장관(도지사)을 임명했습니다.

진주에 있던 도청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1924년 부산으로 강제 이전을 합니다. 일제가 한반도에서 수탈한 곡물과 광물, 수산물 등을 부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하려면 행정관청이 바로 옆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지요. 이 와중에 6·25전쟁이 터져 부산까지 밀리면서 경남도청은 피난정부의 임시 중앙청 역할도 했습니다.

6·25전쟁이 끝난 10년 후인 1963년 부산시는 부산직할시로 승격됩니다. 이때부터 서서히 경남도청 이전 말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직할시로 경남에서 독립 됐는데 경남도청이 왜 부산에 있어야 하냐는 것이지요. 이후 진주와 마산은 이를 두고 끊임 없이 으르릉거렸지요.

그로부터 10년 정도 후인 1973년 창원에 대규모 국가기계공업단지(2530만㎡·766만평)가 생겼고, 또 10년 후인 1983년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옮깁니다. 기존 마산시에다가 기계공단이 생기면서 창원이 단번에 경남의 중심지로 부상했기 때문입니다. 진주 지역에서는 경남도청 되찾아오자는 운동이 거세게 일었으나 경제 규모에서 창원이나 마산에 뒤지고 지리적으로도 서쪽에 치우쳐 있어 여론이 불리했다고 보면 되겠지요. 진주와 마산은 이와 관련해 오랜기간 앙금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경남도청 창원 이전 과정을 잠깐 보겠습니다.

1976년 9월에 경남도청 창원출장소가 개소했습니다. 박정희 정부 때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1979년 10월 26일 발생했으니 이로부터 3년 전입니다.

왜 날짜를 세었냐 하면 마산 출신 박종규 박 대통령 경호실장 때문입니다.

당시엔 군사정권 때여서 암살 등 사건이 일어날 우려가 커 경호실장은 심복 중의 심복을 임명했습니다. 박종규의 별명은 권총을 잘 쏜다고 해서 '피스톨박'이었습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를 가졌다고 보면 됩니다. 권총을 잘 쐈다는 것 외에도 사람 만날 때 자주 권총을 꺼내 겨눠서 생긴 별명이라고도 합니다.

당시 시중 저잣거리에선 대규모 기계공단이 창원에 자리한 것도 그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단 말도 있었습니다. 위의 내용을 보면 도청을 창원으로 이전하려는 작업이 오래 전부터 있었다는 느낌도 옵니다.

경남학원을 만들어 이사장도 했지요. 사립인 경남대(옛 합천 해인사와 진주에 있던 해인대)가 진주에 있는 국립대인 경상대를 제치고 지역명인 경남대를 가져간 것도 박종규의 입김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경남대 총장을 하고 통일부 장관도 한 박재규 씨가 친동생입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 따로 소개합니다.

위의 사진 아래 왼쪽 도청 건물을 짓는 모습이 새롭게 보입니다. 허허벌판이었네요. 경남도기록원 홈페이지에 가시면 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더경남뉴스처럼 행간에 숨은 이야기 설명은 없겠지요.

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경남 주민들은 지금도 경남도청을 부산에 빼앗겼고, 되찾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집안도 비슷하지만 '뼈대가 있는' 집안은 망해도 언젠가는 되살아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집안의 유전자(DNA)가 후대로 이어지기 때문으로 봅니다.

지난 1월에 창원시가 특례시 지위를 획득하면서 창원에 있는 경남도청의 이전 문제가 불거지고 있습니다.

창원시장은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었지만, 부산에서 창원으로 이전한 과정을 보면 지금과 비슷합니다.

우선 진주에 경남도청 서부청이 생겼습니다. 창원에도 경남도 창원출장소를 먼저 만들었지요. 경남 서부지역으로 치우쳤다는 지리적 여건은 요즘엔 불리한 게 전혀 아닙니다. 이제 대부분의 서류는 온라인으로 떼고 화상회의가 일상화 돼 있습니다. 양산 등 동부 쪽엔 지금의 진주 서부청사처럼 동부청사를 두면 되겠지요.

진주로서는 지금부터 경남도청 이전 건을 심도 있게 논의하고 준비해야 하겠네요. 명가(名家)의 전통은 이어진다고 합니다. 하나씩 준비하다 보면 '북평양 남진주'로 불리며 전국에서 유명세를 떨쳤던 진주의 옛 명성을 찾을 날이 오겠지요.

※ '경남도청 이전사'에 이어 다음은 '부산항 북항 변천사'를 짚어봅니다. 부산항이라고 하면 통상 북항을 이릅니다. 지금 1, 2차 재개발사업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이달 초에 수변공원도 모두 개방했습니다. 부산 시민들은 "140여년만에 군사 보호구역으로 단절됐던 곳이 개방됐다"며 크게 반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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