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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흔적] '돌아오는 부산항'···부산의 심장 '북항' 어떻게 변해 왔나

정창현 기자 승인 2022.05.22 18:16 | 최종 수정 2022.06.15 22:10 의견 0

더경남뉴스가 '창간 기획 2탄'으로 경남을 비롯한 부·울·경의 기록물을 찾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분야별 흔적을 소개합니다. 평소 지나쳤던 작은 역사도 끄집어내 탄성을 자아내도록 하겠습니다. 학생들에겐 흥미로운 학습거리도 될 듯합니다.

국내 최고의 항구인 '부산항 북항' 재개발 열기가 후끈하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 가요에 등장하는 부산항이라 함은 부산의 여러 항구 중 가장 큰 '북항'을 말한다.

향후 '부산의 100년을 책임진다'는 대개조 재개발 프로젝트는 1, 2차로 나눠 진행 중이다. 지난 5월 4일, 1차 사업으로 북항 인접 구역을 시민공원으로 꾸며 근대항으로 개항한지 146년만에 전면 개방했다. 기반공사인 1차 사업은 올해 말 끝날 예정이고, 이어 이들 터에 각종 테마 건물을 건립하는 2차 사업이 시작된다.

이를 계기로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1876년)로 근대 항구로 개항한 부산항의 곡절의 발자취를 추적해 본다.

그 옛날 부산항 모습. 1891~1930년대로 추정되며 작가 미상이다. 위키백과 제공

뱃고동을 울리는 항구는 오는 사람을 맞는 곳이라기보다는 '보내는, 이별의 장소'로 연상된다. 흔히들 마도로스(외항선 선원)와 님을 보내는, 애 타는 여인을 떠올린다. 부산항도 이런 분위기가 물씬한 항구였다. 이런 정취로 인해 부산항을 배경으로 한 가요도 엄청 많이 생산됐다.

하지만 굴지의 국제항으로 자리를 굳힌 지금의 부산항은 더 이상 낭만적이거나 애처로운 감성만 깃든 옛 항구는 아니다.

부산국제여객터미널 등이 있는 북항은 물동량 기준으로 한때 한국의 제1의 항구였고 지금도 명성은 잇고 있다.

다만 시설들이 오래돼 폭증하는 컨테이너 물동량을 제때 처리하지 못하면서 인근에 신설한 부산신항(전체 5부두 중 진해신항인 2~3부두 포함)이나 전남 광양항으로 절반을 내줬다. 하지만 재개발로 국제 경제비즈니스 중심지로 탈바꿈을 꿈꾸고 있다.

부산신항은 지난 1997년 착공해 순차적으로 완공을 했고, 지금도 총 6부두까지 확장하기로 하고 공사가 진행 중이다. 북항의 물동량을 가져간 부산신항은 북항이 갖고 있던 한국 최대의 컨테이너항 명성을 뒤이으면서 국제무역항이자 세계적인 항구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북항 서쪽인 경남 창원시 진해구와 접해 있다.

이 또한 넓게 보면 모두가 부산항이다.

'해양도시 부산'의 지도를 바꾸고 원도심을 개발할 부산항 북항 재개발사업 2단계 사업 예정지의 현재 모습.

북항 재개발이 진행 중인 북항 내항쪽 부두 현황. 외항으로는 6부두(자성대부두) 이후 시계방향으로 7~8부두, 감만부두, 신선대부두가 있다. 부산시 제공

부산항 북항 개발 계획도. 부산항만공사 제공

북항을 포함한 큰 틀의 부산항은 오래 전부터 환적항(換積港)으로서의 명성을 이어왔다. 환적항이란 인근의 항만으로부터 화물을 받아 모선으로 옮겨 싣는 항이다.

부산항은 세계에서 해양 물동량이 제일 많은 태평양~대륙 간의 중간 기항(寄港·항해 중인 배가 목적지 아닌 항구에 잠시 들르는 것)으로서의 조건을 대부분 갖췄다. 태평양을 횡단한 선박과 횡단하기 전에 정박하기가 좋은 위치 조건이다.

동북아시아 지역은 동남아시아에 비교해 태풍 등의 피해가 적는 등 선박의 기항 조건이 좋다. 또한 부산항은 환적항의 첫째 조건인 24시간 풀가동돼 환적 기간이 단축 되고, 접항료 비용도 저렴하다는 것이 최고 장점으로 꼽힌다.

경쟁 상대인 일본의 항만보다 이러한 서비스면에서 장점을 갖고 있다. 일본의 모든 무역항은 주말·공휴일이면 문을 닫는다. 24시간 언제든 선박을 받을 준비를 해둔 부산항과 비교해 큰 마이너스 요소다. 일본의 항만들은 이처럼 가성비가 떨어져 물동량이 상대적으로 적다.

부산항이 세계적 무역항으로 성장했던 것은 일본 항만들의 이런 한계를 전략적으로 이용해 일본의 환적 수요를 부산으로 상당 부분 빼온 것이 한몫 했다.

이런 결과로 2019년에는 세계 2위 환적항에 오르기도 했다. 그해엔 전체 물동량으로도 세계 5위를 했다.

전체 물동량(2020년 기준)은 중국의 상하이항, 싱가포르항, 중국 닝보항, 중국 선전항, 중국 광저우항에 이어 세계 6위로 자리했다가 만성적인 화물 적체로 지난해 상반기 물동량 일부를 광양항으로 분산시켜 한 단계 내려간 7위를 지키고 있다. 싱가포르는 태평양과~유럽 중간 기항이란 위치적 이점 때문이고 중국은 물동량이 많다.

1407년 부산포가 개항한 이후 지금까지의 부산항 북항 변천사를 알아본다.

부산은 옛날부터 일본과 인접해 왜구의 침입과 교류가 동시에 이뤄져 무역 요충지였다.

지금으로부터 615년 전인 조선 1407년(조선 태종 7년)에 부산포(지금의 동구 자성대 앞 포구)가 개항됐다. 왜구가 노략질을 해대자 대신 무역을 활성화 하기 위해 갈을 터준 것이다. 이후 세종 때 와서는 부산포 거주 왜인은 60여가구였고, 조일무역을 위해 오가는 상인도 6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교류가 활발했다고 한다.

부산이란 지명도 부산포와 연관돼 있다. 조선 전기까지 부산(富山·부유한 산)으로 불렸으나 부산포 위에 있는 산 모습이 솥뚜껑을 엎어놓은 것 같아 부산(釜山·솥뚜껑 산)으로 불리게 됐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 때는 부산포가 되려 왜군의 조선 침략 근거지로 이용되기도 했다. 왜군은 그해 음력 4월에 부산포로 들어와 부산진성을 침략했다. 부산진첨절제사 정발 장군을 비롯한 군민 1000여명은 목숨을 걸고 항전했으나 왜군은 1만 8700여 명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이 싸움 과정에서 군민들을 비롯한 순국한 정발 장군과 정발의 막료(幕僚·스태프)였던 이정헌, 정발의 첩인 열녀 애향, 충직한 노복(奴僕·남자종)이었던 용월의 슬픈 항전 이야기가 너무도 애뜻하게 전해진다.

개항 270년 후인 1678년에는 지금의 상공회의소와 대사관 역할을 했던 '초량왜관'이 설치돼 이곳을 통해 많은 교역이 이뤄졌다. 이를 바탕으로 한 '동래 내상'은 조선 후기에 대표적인 상인 집단 중 하나로 성장했다.

그러다가 일본의 강압적인 '강화도조약'에 의해 1876년 부산항이라는 이름으로 개항을 하게 된다. 이를 근대 개항으로 부르고 있고, 올해로 146년이나 됐다.

이때부터 일본인 외에도 많은 외국인도 들어와 부산항이 해외 문물이 들어오는 통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어 1894년에는 본격적으로 항구를 개발하려고 항구 조설공사(造設工事) 시작했다. 조설공사는 일본어투로 이른바 증설공사를 말한다.

1907년엔 부산세관도 문을 열었다. 모든 과정은 한반도 생산 물자들을 일본으로 수송하려는 일본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항구 매립공사는 일제강점기에 와서 대대적으로 이뤄진다.

부산항을 일본의 대륙 진출 전진기지로 만들기 위해서였고, 일본이 한반도에서 생산한 곡물과 물자를 자국으로 실어나르기 위해서는 보다 현대적인 부두와 항구가 필요했다.

매립은 주로 북항(영도 대교동 일대)과 남항(남포동 일대)에서 이뤄졌다. 북빈(北濱) 제1기 공사는 '북빈 매축공사'(1902~1908년)다. 남빈 공사도 마찬가지로, 북빈과 남빈은 북항과 남항의 일본식 표현이다.

항구 매립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1905년에 경부선을 개통하고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 간을 오가는 여객선인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도 취항한다. 한일합방이 되던 해인 1910년에는 경부선이 부산항과 연결되고 부산역도 만들어진다.

일제는 수탈을 더 쉽게 위해 우편과 금융을 담당하는 부산우체국도 개설된다.

일본과의 교역(수탈) 행정 편의를 위해 1924년에는 경남 진주에 있던 경남도청을 부산으로 옮기는 결행도 한다.

모든 사업은 수탈과 만주 공략을 위한 일제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됐다.

북항과 남항에 이어 부산진 매립 공사(1, 2차)도 해 대규모 매립은 지속 이어졌다.

1934년에는 국내 유일의 도개교인 영도대교가 건설된다. 배가 들어오면 다리 상판을 들어올렸다 내리는, 일명 '영도다리'로 불리는 다리다. 한때 보수를 위해 중지했다가 중지 47년만인 지난 2013년부터 다시 가동 중이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육중한 다리가 수직으로 올라갈 때마다 구경을 하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든 적도 있었다.

영도다리 밑은 한국전쟁 때는 피난민들이 가족을 찾기 위해 모였던 민족 애환의 장소이기도 했다. 당시를 노래한 가사에는 '영도다리 난간'이 더러 언급된다.

일제는 1935년까지 부산항 매립 공사가 끝나자 2~5갑문과 1부두를 만들었다.

이 모든 공사들은 해방되는 1945년 전까지 지속 진행됐다. 일제가 침략 수단으로 만든 일련의 공사들이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부산항 기틀은 대부분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산항 개발 1단계 사업(1941~1958년)은 기존 2, 3부두를 개축하고 1, 6부두, 8부두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6·25가 발발, 국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면서 부산은 3년 간 임시수도 역할을 담당한다. 전쟁 중에는 북항을 비롯한 부산항은 미군의 군수물자 등을 하역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부산은 이때 모든 영역에서 한국의 중심지 역할을 해 행정과 경제 등의 수행 기반을 깔았다.

2단계 사업(1958~1961년)은 2, 3부두 개축 사업을 이어하고 7부두를 개축하고, 9부두를 만들었다.

북항은 한국의 경제개발 초기인 1961년에 3단계 사업을 진행했다. 1989년 끝날 때까지 무등부두를 만들었고 재설장도 갖추게 됐다.

1989년부터 1994년까지 진행된 신사업 때는 교개부두를 만들었다.

이후 경제가 가파르게 성장하면서 부산항의 화물은 항상 쌓였고 처리는 항시 밀렸다.

기존 부두로는 화물을 처리할 수 없게 되자 부산항 3단계 개발사업을 추진해 북항을 확장했다.

북항으로 연결되는 철도출입선인 우암선은 단선이었는데 물동량 해소도 못하고 도심 구간으로의 확장도 어려워,부둣가를 따라가는 새로운 복선을 만들어 신선대부두까지 연장했다. 이것도 모자라 북항에 인접한 부산진역을 아예 화물전용역으로 바꿨다.

이처럼 북항은 한국의 해상관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일반 항구에서 벗어나 컨테이너와 여객을 실어나르는 선박과 주변 부가가치 시설도 엄청난 항구로 자리한 것이다.

국내 총 해상 수·출입 화물(2020년 기준)의 57%, 컨테이너 화물 75%, 전국 수산물 유통량의 34%를 처리하고 있다.

특히 1995년 고베 대지진으로 기반시설이 붕괴된 고베항 물동량의 상당수를 유치해 물동량 기준으로 세계 3위로 올라서기도 했다.

하지만 단편적인 확장만으로는 북항으로 밀려드는 컨테이너 물량을 소화할 수 없어 정부는 대체 항구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이른바 '부산신항 프로젝트'다. 2020년 전체 공사 일정은 일단 끝났고, 지금은 순차적으로 확장 공사를 하고 있다.

정부와 부산시는 이와 함께 북항과 원도심 개발을 아우르는 북항 재개발사업을 대대적으로 진행 중이다. 이른바 북항 인근 원도심을 함께 개발하면서 향후 부산의 100년의 청사진을 담은 대개조 사업이다.

북항 재개발사업은 크게 1차와 2차로 구분돼 있다. 북항 재개발사업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 북항 재개발

1차 재개발 사업은 올해 말을 목표로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다. 이미 바다와 인접한 수변공원을 1차(지난해 12월)와 2차(올해 5월 초)에 걸쳐 시민들에게 공개해 휴식공간으로 제공했다.

2차 재개발 사업은 1차에서 닦아놓은 기반시설에다 각종 시설들을 세운다. 특히 이곳에는 부산시가 유치를 추진 중인 2030부산세계박람회 부지로 정해져 있어 현장 실사 전에 기본적인 사업이 깔려고 사업 속도를 붙이고 있다.

부산시 제공
북항 개발 조감도. 부산항북항통합개발추진단 제공

북항 재개발 사업과 진해신항 등 부산항 개발은 건설을 진행 중인 가덕도 신공항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부산 시민들은 "중국과 싱가포르 등 세계적인 컨테이너 항구 근처에는 어김없이 국제공항이 위치해 있다"며 빠른 건설을 재촉하고 있다.

부산항 북항에 건설될 트램(노면전차). 트램이 완공되면 트램에 몸을 싣고 부산항대교 풍경을 볼 수 있다. 해양수산부 제공


다음은 1차 재개발사업으로 지난해 12월과 올해 5월 초에 개방한 북항 수변공원 시설 내용이다.

□ 부산항의 또다른 이야기

1876년(고종 13년) 부산포란 이름으로 개항한 부산항은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우리의 가족들이 강제로 일본으로 이주한 슬픔의 항구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부산항에는 연일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징병과 징용으로 일본, 동남아시아의 각지로 끌려갔던 동포들이 부산항으로 속속 귀국했기 때문이다. 귀국한 가족을 맞이하는 기쁨과 이국 땅에서 지낸 고통의 세월을 눈물로 푼 회한의 항만이었다.

부산항은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된 외항선과 원양어선 선원, 베트남전쟁 파병 군인들을 떠나보낸 곳이기도 하다. 북항 3부두에서는 외항선과 원양어선 선원들이 외화 획득을 위해 대거 출국했고, 베트남 파병 때는 전쟁터로 가는 군인과 그곳에서의 무운을 비는 환송객들로 북적댔다.

부산은 또한 1950~1953년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로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피란민들을 모두 포용하며 먹여 살린 도시다. 이후 부산은 북한 실향민들에게 제2의 고향이자 새로운 삶의 터전이었다.

이런 고난의 세월을 이겨내고 부산은 경제 성장기에 우리가 세계로 진출하고 해외 문물을 받아들이는 관문 역할을 해냈다.

또한 부산항을 말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노래다.

부산은 6·25 전쟁 등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와 이에 따른 희로애락이 오롯이 녹아 있어 대중가요계의 트로트 생산기지 역할을 했다.

1950년대 초 부산에서 설립된 미도파레코드사는 국내 최고의 음반사였던 지구레코드사의 전신이다.

부산항을 배경으로 한 노래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과 '잘 잊거라 부산항', '울며 헤진 부산항' '부산갈매기' 등 셀 수도 없다.

자료에 따르면 부산을 주제로 한 대중가요가 2500여 곡인데 이 중 부산항을 소재로 한 노래가 800여곡이다. 민족의 희로애락이 오롯이 부산항을 매개로 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부산항 참고자료

학생 등 부산항을 더 알고 싶은 독자분을 위해 첨부한 자료입니다. 위의 기사를 읽다가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아래 자료에서 찾아보면 보다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 부산항의 물동량 개요

통상 부산항이라 함은 중심항이 북항을 포함한 부산에 있는 항구들을 합친 개념이다.

지난 2018년에는 물동량이 2159만 TEU(twenty-foot equivalent unit·6.1m 길이의 컨테이너 크기)를 기록해 세계 무역항 물동량 6위를 차지했다. 이후 광양항으로 물동량을 분산하면서 지난해 2분기엔 7위를 기록했다.

매년 발표되는 항만 물동량 톱10은 1위 상하이 양산항을 비롯한 닝보항, 선전항, 칭다오항, 광저우항, 텐진항, 홍콩항 등 중국계 항만이 많다. 부산항, 싱가포르항, 미국 캘리포니아의 롱비치항, 두바이항, 로테르담항, 말레이시아 클랑항도 포함돼 있다.

싱가포르(동남아시아), 롱비치(북아메리카), 두바이(서아시아), 로테르담(유럽)는 세계 권역별 거점항이어서 물량 확보 어드벤티지를 갖고 있다.

하지만 부산항은 지리적으로 동아시아의 거점도 아니어서 또다른 경쟁력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의 덕을 많이 보는 편이다. 부산항은 비중국계 무역항에서는 물동량 1위다.

다만 UAE의 두바이와 네덜란드 로테르담항은 지난 2010년부터 공식 통계를 발표하지 않는다.

일본의 경우 2019년 기준으로 도쿄권(케이힌: 도쿄·요코하마·가와사키) 816만 TEU, 한신(오사카·고베) 532만 TEU, 나고야 284.4만 TEU로 셋을 더해도 1632만 TEU로 부산항(2199만 TEU)보다 적다. 인천항은 300만 TEU, 광양항은 223만 TEU다.

부산항 시설은 2015년 기준으로 동시에 201척을 접안시킬 수 있다. 창고는 13만t을 보관할 수 있고, 야적장은 129만t을 쌓을 수 있으며, 컨테이너는 52만 TEU를 보관할 수 있다. 그리고 정박지에서 123척이 동시에 정박할 수 있다. 진해신항을 중심으로 규모를 더 넓히고 있다.

□ 부산의 항구들

가장 먼저 건설된 북항 1부두는 1912년 6월에 완공돼 올해로 딱 110년 역사를 가졌다. 먼저 개통됐던 경부선 철도를 항만과 연결해 대륙 침략 거점과 식민지 수탈품 수송로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부산항 앞바다에서 보면 1부두를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제2, 제3, 제4부두 순으로 이어진다. 북항 재개발사업 전엔 2~3부두가 모두 컨테이너 부두였다.

현재 제1부두만 사용 중이며 국내여객터미널이 운영 중이고, 제2부두는 북항 재개발로 인해 사라졌으며 제3부두 및 제4부두는 현재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의 부두로 사용 중이다.

북항으로 인해 발전한 곳은 1~3부두 인근인 광복동과 중앙동이다.

옛날에는 각 선사나 해운사에서 직접 인편으로 항구에 나가서 업무를 처리했기 때문에 부두와 가까운 곳에 업무지구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다만 국제시장과 자갈치시장이 구덕로를 사이에 두고 형성돼 있는 특성 덕분에 남포동이 번화가로 발전했다.

국제시장은 일제강점기부터 있던 시장이 북항으로 밀려들어온 미군 물품을 팔면서 엄청나게 커졌고 자갈치시장은 본래 (구)부산항 국제터미널 자리에 있던 부산공동어시장의 수산물을 거래하면서 자연스레 커진 것이다.

따라서 남항 덕분이라는 말도 일리가 있고 북항 덕분이라는 말도 일리는 있다.

북항에는 부산항대교가 신감만부두 인근과 영도 간을 가로질러 놓여있다.

▷ 북항

부산항 하면 떠올리는 곳이다. 영도구(서쪽부터)~중구~동구~남구에 걸쳐 있다. 근처에 경부선과 경부고속철도 종착역인 부산역이 있다.

부산항의 역사는 이곳에서 시작됐다. 부산 구도심인 남포동 일대가 발전한 건 북항 덕분이다.

카트라이더 코리아 부산의 밤 트랙에서 달맞이고개 구간을 지나면 컨테이너가 쌓여있는 항구가 나오는데 이 항구가 북항이다. 북항 남단에 컨테이너들이 쌓여 있는 곳에는 북항 재개발이 진행 중이다.

자성대·신선대·감만·신감만·우암부두 등 5개 컨테이너 부두와 6개의 일반 부두가 있다. 일본 규슈와 오사카로 가는 여객선도 이곳에서 정박한다.

중앙동에 위치한 관공선부두와 1부두에서 시계 방향으로 내항쪽에 2~5, 7~8부두, 허치슨 포트가 있다. 외항쪽으로 신감만·감만·신선대·동명·신선대·해작사부두가 있다.

영도 쪽 내항에 있는 시설물들은 대부분 물양장(선박 계류시설)이거나 조선소, 수리시설 등이다. 외항에서 영도 쪽으로 한국해양대가 있는 아치섬(조도) 북측에는 부산해경 전용부두와 국제크루즈여객선 터미널이 있는데 정작 초대형 크루즈선은 3부두에 입항한다. 또 남쪽으로는 어항인 하리항이 있다.

1920년대 부산항 연안여객부두. 부산시 제공

1부두의 서쪽에는 관공선부두가 있다. 세관이 위치해 있어 세관부두라고도 불린다. 예전엔 국제 및 국제여객 터미널이 있었지만 국제여객터미널은 4부두로 신축 이전했고 지금은 연안여객터미널(국내여객터미널)만 이곳에 있다.

또 세관부두라고 불리는 것처럼 항만 안쪽을 돌아다니다 보면 사이렌을 울리면서 나다니는 CUSTOM이라는 명칭을 단 조그만 배들이 이곳에 옹기종기 정박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외에 해양과학원이나 항만청 등의 배들도 이곳에 잔뜩 정박해 있다.

1~3부두는 컨테이너 부두다. 1부두는 지금도 운영 중이지만 남항의 어선들이 태풍이 불 때 많이 피항하는 곳으로 활용된다. 2부두는 부두 기능이 정지돼 컨테이너 하역 기능도 사라졌다. 3부두는 북항 재개발사업으로 매립돼 없어졌다.

3~4부두(북항 중앙부두)는 본래 컨테이너 부두였으나 북항 재개발 사업으로 국제여객터미널 부두로 바뀌었다. 4부두 일부도 컨테이너 부두 기능을 하다가 기능을 정지했다. 3부두에는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와 같은 대형 크루즈선이 정박하곤 한다.

대형 크루즈선이 밤에 부산항대교 교각 밑을 지날 때는 배 객실에 밝혀진 불빛은 높은 빌딩의 불빛 같아 장관이다.

5부두는 안쪽에 움푹 들어간 물량장이 있어 태풍이 불 때 피항지로 많이 사용된다. 곡물이 수입되는 부두여서 양곡부두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미군 55보급창이 있다.

다음으로 6부두가 있어야 하는데 없다. 대신 자성대부두라고 말한다. 홍콩의 다국적 물류사인 허치슨 포트 사가 이곳에 전용부두를 갖고 있어 허치슨 포트가 있다.

7부두는 TOC부두라고 한다. 컨테이너 부두이며 특이하게도 평소 바지선이 가득 정박해 있다.

8부두에는 한때 부산해양경찰서 전용부두와 미군 수송사령부 837대대, 국군 수송단이 있었으나 부산해양경찰서는 영도 쪽 외항으로, 미군 수송사령부는 캠프 하야리아 철거와 함께 대구로 이전했다. 지금은 국군 수송단 8부두 운영단만 있다. 군 시설이고, 미군 물자 수송의 요충지이기에 위성사진에서는 자세히 볼 수 없다.

8부두 옆에는 동국제강 부산공장이 있어 주로 철광석과 코일과 같은 것들을 싣는 연합부두(철강부두)가 있다. 이름에 '연합'을 넣은 것은 예전에 연합철강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합철강은 국제그룹에 매각된 뒤 국제그룹이 5공에 의해 강제해체 되자 유니온스틸로 바꾸었다가 동국제강에 흡수됐다.

연합부두의 옆에는 감만시민부두가 있다. 빨간 등대가 예쁘고 밑에서 북항대교를 올려다보는 운치가 놀러나온 시민들이 많다. 이곳엔 주로 해양수산부의 어업지도선이 잔뜩 정박해 있다.

그 동쪽 옆으로는 감만·감만·신선대부두가 있는데 물동량이 아직 진해신항으로 완전히 넘어가지 않고 성업 중이다. 감만부두와 신감만부두는 운영사가 달라 붙인 이름이다.

감만부두와 신선대부두 사이에 동명부두라고 조그만 부두가 하나 있는데 기름 정유를 한다.

재미있는 것은 3, 4부두는 정식 명칭이 아니다. 양곡부두나 연합부두 같은 게 진짜 공식 명칭이다.

북항 여객터미널은 크게 셋으로 구성돼 있다.

부산국제여객터미널은 동구 초량동 북항 재개발사업으로 새롭게 완공됐으며, 부산과 일본 각 도시를 연결하는 페리가 발착한다.

100여 년 전 부관연락선부터 운항하는 부산∼일본 시모노세키(下関) 간에 1만 2000t급 카페리가 매일 운항한다. 오사카, 후쿠오카(하카타), 대마도의 이즈하라, 히타카츠 노선도 있다.

전에는 기타큐슈의 모지항 노선도 있었으나 2010년 폐지되었다.

부산연안여객터미널은 제주행 여객선 터미털이다. 수년 전만 해도 거제도와 한려수도 등을 연결하는 쾌속선 등 13개 항로(19척)가 있었으나 거가대교 개통으로 모두 폐지되고 부산~제주 간 대형 카페리 1척만 운항 중이다.

국제크루즈터미널은 영도에 있다. 크루즈는 가오슝, 홍콩, 하롱베이 등으로 간다. 10만t급 이하 크루즈는 신설된 부산국제여객터미널로, 10만t급 이상 크루즈는 영도크루즈터미널을 이용한다.

▷ 남항

중구와 서구, 영도구 서측에 걸쳐 있는 연안항이다. 주로 어선들이 쓰는 항구다. 전국 수산물 위판량의 30%를 차지하며 전국 최대 어시장인 부산공동어시장과 수산물도매시장으로 부산 명물인 자갈치시장이 있다.

부산해양경찰서 소속 7개 파출소 중 이곳 남항파출소는 전체의 50% 이상의 사건사고가 발생한다. 변사체, 익수자, 영도·남항 대교 자살자 등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항만소방서도 자살 시도나 어선 사고 등으로 119 신고가 항시 많다.

남항 바깥쪽, 즉 남항방파제와 남항대교 서쪽에 있는 송도해수욕장에서 영도를 마주보는 바다가 남외항이다. 이곳에는 남외항 묘박지라고 해 선박들이 부산항에 입항하기 전에 대기하거나 연료공급선을 기다리는 수역이다. 한때 이곳을 매립해 신도시를 만들 계획이 세워졌던 적이 있다. 1980년대에 수립된 이 페이퍼 플랜은 수십년 가까이를 끌다가 결국 무산되었다.

이 계획이 현실화 됐다면 부산 원도심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남항은 사라지고 공동어시장 등의 기능이 신도시로 옮겨갔을 것으로 보인다.

▷ 감천항

감천항은 부산의 서쪽인 사하구 감천만에 있다. 북항의 보조항으로 정부 예산과 민자 유치로 개발했다. 컨테이너 부두도 있지만 주로 다목적 화물을 취급한다. 양곡·고철 등을 취급하는 전용부두와 어선·조선 기지가 있다.

인근 남항에 있던 어업 기능의 일부가 감천항으로 넘어왔다. 부산국제수산물도매시장이 건립돼 원양 어업과 수입 수산물 도매기능이 남항에서 감천항으로 많이 넘어왔다. 옆에는 수산물가공단지가 있다.

또 다른 주 목적은 배 수리다. 배 수리하는 곳이 많아 물동량이 많은 부산항 특성상 이곳에서 수리를 하는 배도 많아 전국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평소 러시아 선원들이 굉장히 많다. 러시아발 연안 어선 대부분이 이곳으로 들어온다. 러시아에서는 배 수리비가 비싸고 까다로워 한국에서 수리를 많이 한다.

따라서 저녁에는 편의점 테이블에 맥주와 보드카를 마시는 러시아인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러시아 펍과 레스토랑이 몇 군데 있으나 한국인 출입은 허용하지 않는다.

▷ 다대포항

서부산 사하구 다대동에 있는 컨테이너 부두가 없는 다목적 항구다. 원래는 공업지원용이지만 결국엔 어항이 되었다.

북항에 산재한 합판공장과 저목장을 통합 수용할 수 있는 합판공업지원항으로 만들었다. 원래 지금의 다대포해수욕장 근처가 아닌 낙동강 하구에 만들 계획이었다. 그러나 철새 서식지가 있음을 감안해 이곳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세계은행 차관을 이용해 추진 중이던 다대포 공단의 목재 등의 공급을 위한 원목전용부두로 건설될 계획이었다. 당시 원목부두는 북항에 있었는데 교통난을 일으킨다며 감천항으로 이전하기로 했으나 다대포항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개발을 원하는 어민들과 오염을 걱정하는 주민들 간의 충돌로 결국 나중에 다대포공단은 추진이 철회된다. 다대포공단 취소 대신 원목부두는 북항으로 옮겨간다.

다대포공단 철회로 인해 다대포항 개발까지 취소되었다. 때문에 방파제 축조 공사가 무산되고 배후도로도 개설되지 못한다.

대신 당시 목재공장과 함께 추진되었으나 목재공장은 무산되고 원양수산물가공공장만이 추진돼 태평양, 대서양 등에서 잡아온 원양 수산물을 처리하는 항으로 쓰인다. 이 근처에는 수산물 가공 공장이 많아 조금만 차를 타고 가다보면 큰 건물 외벽에 참치가 그려져 있는 냉동창고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부산 아시안게임 당시 북한 선수단이 타고온 만경봉호의 정박지이기도 하다.

▷ 용호부두

용호부두는 북항 동쪽에 위치한 남구 용호동에 있다. LG메트로시티와 GS하이츠자이, 용호동 W과 부산환경공단 남부사업소 근처에 위치해 있다. 용호만여객터미널 앞에도 부두가 있어 혼돈하기 쉬우나 그곳이 아니고 이기대 남쪽 끝 지점에 있다.

이 자리는 원래 동국제강의 공장터여서 동국부두라고도 불렸고, 원래 목적은 고철전용부두였으나 완공 3년이 되도록 방치되면서 골재전용부두로 전환하려다가 반발에 막혔다. 이후 일반 부두로 바뀌고 나중에는 냉동어획물부두로 전환되었다.

2010년부터 폐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지지부진 하다가 2017년 다시 폐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2019년 씨그랜드호 광안대교 추돌 사고로 인해 조기 폐쇄된 이후, 2021년 7월 개항 30년만에 친수공간으로 개방됐다.

용호부두 근처에는 해군작전사령부 부산기지전대가 있으며 오륙도 쪽에서는 가끔 독도함 등이 입항 시 보인다. 그리고 국제 관함식이 부산에서 개최될 경우 용호동과 해작사가 있는 광안리 일대는 터져 나간다.

2003년에 강타한 태풍 매미 때문에 크레인들이 줄줄이 쓰러져서 부산항이 마비된 적이 있다. 나중에 쓰러진 크레인들을 조사해보니 부실 시공이었다는 것이 밝혀져 2016년 9월에 배상이 확정됐다

※ '부산의 심장 '북항'의 변천사'에 이어 다음은 '창원기계공단의 변천사'를 짚어봅니다. 한때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의 중추 역할을 했지만 기계공업은 이제 첨단 4차산업 시대를 맞아 변곡점을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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