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첫 이야기] 주식으로 자리한 '라면'의 출시 비화
정창현 기자
승인
2022.05.27 13:06 | 최종 수정 2022.06.12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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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경남뉴스는 '첫'-'최초'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지난 일들을 까마득히 잊습니다. 옛 시절을 되새김 하며 '그때!'를 생각하는 연재물입니다.
요즘은 라면의 전성시대입니다.
한동안 국민의 대표 간식으로 자리를 하다가, 지금은 맛은 물론 종류도 다양해져 한끼의 식사 메뉴로 자리잡았지요. 특히 코로나19 2년 간은 집콕의 영향으로 더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세계 최초의 라면은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중국의 국수인 ‘납면(拉麵)’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납면이 187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식 발음인 ‘라멘(ラーメン)으로 불렸고, 이것이 다시 한국으로 넘어와 ‘라면’이란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은 1963년 9월 16일 출시된 삼양라면입니다.
이 제품은 삼양공업(지금의 삼양식품) 설립자인 전중윤 회장이 일본의 명성식품에서 라면 기계 2대를 인수해 생산했다고 합니다. 당시 전 회장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식량난으로 배곯던 국민들이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식품을 만든다며 개발했습니다.
이로써 라면은 주식인 쌀이 귀했던 때에 싸고 간단하게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식품으로 자리를 잡았지요. 요즘에도 많은 사람이 시장 점유율 1위인 농심이 첫 국산 라면을 만들었다고 인식하는데 잘못 알고 있는 거지요.
처음 시판한 삼양라면은 100g으로 닭고기 스프를 썼고, 가격은 10원이었습니다. 봉지 표지는 황색이었고요. 그때 자장면이 25원, 일반미가 40kg에 1505원 있었는데 꽤 싼 가격이었습니다. 이 가격은 한동안 유지되다가 1970년 소맥분과 우지 가격 상승, 증량 등으로 20원으로 인상됐고 이어 1978년 50원, 1981년엔 100원으로 올라갔습니다.
초창기에는 오래도록 쌀을 주식으로 해온 밀가루 거부감과 느끼한 라면 냄새 때문에 한동안 판매량이 적었으나 정부의 혼·분식장려 정책(1969~1976년)과 홍보로 급신장을 했습니다. 1966년 11월 240만 봉지이던 판매량이 분식을 장려한 1969년 1500만 봉지로 급성장을 보이며 초창기 매출의 300배나 성장했지요.
라면의 첫 수출지는 베트남이었습니다. 1969년 삼양라면 26만 상자가 배에 실려 베트남으로 나갔지요. 이후 일본과 동남아 지역에 이어 1970년에는 미국에 수출되면서 전 세계로 전파됐습니다. 지금은 남미를 비롯한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우리의 라면 인기가 좋다고 합니다.
물론 1987년 11월 '공업용 우지(牛脂) 파동 사건'과 같은 곡절을 겪었습니다. 당시 검찰은 이 우지를 수입한 삼양식품, 오뚜기식품, 서울하인즈, 삼립유지, 부산유지 등 5개 업체를 적발하고 대표 등 10명을 식품위생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지요.
이들 업체가 라면을 튀기는데 쓰려고 정제 쇠기름의 원료로 미국에서 수입한 2등급(Top White Tallow), 3등급(Extra Fancy Tallow) 등 '비식용 유지'를 썼다는 게 혐의였습니다.
문제는 '우지가 식용유로 사용한 것이 안전한가'였습니다. 나중에 무혐의로 결론났지만 '공업용기름=윤활유'란 인식을 벗는데는 오래 걸렸지요.
라면은 지금 완벽하게 주식의 자리를 차지해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365일 하루에 하나씩 골라먹어도 될 정도로 종류도 많아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