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메뉴

[sns의 눈] '술꾼도 급수가 있다'

정기홍 기자 승인 2022.06.05 18:29 | 최종 수정 2022.06.06 23:30 의견 0

더경남뉴스는 SNS에서 오가는 글을 선별해 독자 여러분들께 소개합니다. SNS를 한글 자판에서 치면 '눈'이 됩니다. '매의 눈'으로 보는 글이 아니라, 일상에서 소일거리로 읽을 수 있는 글을 많이 싣겠습니다.

<주도에도 단수가 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시 '승무'로 유명한 조지훈 시인이 술꾼의 등급을 매긴 내용입니다. 그가 매긴 급수는 바둑의 급수 체계를 따른 것이라고 하네요. 술을 마시는 정도를 9급에서 9단까지 18등급으로 구분했습니다.

다음은 조지훈 시인이 집필한 수필집 '지조론(사랑과 지조)'에 실린 수필 '주도유단(酒道有段)'에 있는 내용입니다.

조지훈 시인

▶주도에도 단수가 있다(酒道有段)

술을 마시면 누구나 다 기고만장 해 영웅호걸이 되고 위인현사(偉人賢士·위대한 인물과 현명한 선비)도 안중에 없는 법이다. 그래서 주정(酒酊)만 하면 다 주정이 되는 줄 안다.

* 주정은 술에 취해 정신없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고, 보통 술주정이라고 말합니다(기자의 설명임)

그러나 그 사람의 주정을 보고 그 사람의 인품과 직업은 물론 그 사람의 주력(酒曆·술을 먹어온 이력)과 주력(酒力·술을 이기는 강도)을 당장 알아낼 수 있다.

주정도 교양이다. 많이 안다고 해서 다 교양이 높은 것이 아니듯이 많이 마셔도 많이 떠드는 것으로도 주격은 높아지지 않는다.

주도에도 엄연히 단(段)이 있다는 말이다.

첫째로 술을 마신 연륜이 문제요, 둘째로 같이 술을 마신 친구가 문제요, 셋째는 마신 기회가 문제요, 넷째는 술을 마신 동기가 문제요, 다섯째는 술 버릇의 문제다. 이런 것을 종합해 보면 그 단의 높이가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

▶ 다음은 단계별 술꾼의 급수다.

부주(不酒)=술을 아주 못 먹진 않으나 안 먹는 사람
외주(畏酒)=술을 마시긴 마시나 술을 겁내는 사람
민주(憫酒)=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
은주(隱酒)=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고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쉬워서 혼자 숨어 마시는 사람 혼술


상주(商酒)=마실 줄 알고 좋아도 하면서 무슨 이익이 있을때만 술을 내는 사람
색주(色酒)=성생활을 위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
수주(睡酒)=잠이 안 와서 술을 마시는 사람
반주(飯酒)=밥맛을 돋우기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
학주(學酒)=술의 진경(眞境·본래 경지)을 배우는 사람. 주졸(酒卒·장기판 졸과 같음)

부주·외주·민주·은주는 술의 진경와 진미를 모르는 사람들이요, 상주·색주·수주·반주는 목적을 위해 마시는 술이니 술의 진체(眞諦·참뜻)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학주의 자리에 이르러 비로소 주도 초급을 주고, 주졸(酒卒)이란 칭호를 줄 수 있다.

반주는 2급이요, 차례로 내려가 부주가 9급이다. 그 이하는 척주(斥酒·술 배척) 반(反)주당들이다.

여기까지가 바둑으로 치면 아마에 해당한다.

다음의 단수는 프로에 해당한다.

애주(愛酒) - 술을 취미로 맛보는 사람. 주종(酒從) 1단
기주(嗜酒) - 술의 진미에 반한 사람. 주객(酒客) 2단
탐주(耽酒) - 술의 진경을 체득한 사람. 주호(酒豪) 3단
폭주(暴酒) - 주도를 수련하는 사람. 주광(酒狂) 4단


장주(長酒)=주도 삼매에 든 사람. 주선(酒仙) 5단
석주(惜酒)=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 주현(酒賢) 6단
낙주(樂酒)=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 하는 사람. 주성(酒聖) 7단
관주(觀酒)=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 없는 사람. 주종(酒宗) 8단. 술병에 걸린 사람

폐주(廢酒·열반주·涅槃酒)=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9단. 술병으로 사망

애주·기주·탐주·폭주는 술의 진미, 진경을 오달(悟達·완전히 깨달음)한 사람이요, 장주·석주·낙주·관주는 술의 진미를 체득하고 다시 한번 (이를) 넘어 임운자적(任運自適·운에 맡기고 마음껏 즐김) 하는 사람들이다.

애주의 자리에 이르러 비로소 주도의 초단이니 주도(酒道)란 칭호를 줄 수 있다.

기주가 2단이요, 차례로 올라가서 열반주가 9단으로 명인급이다. 그 이상은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니 단을 매길 수 없다.

그러나 주도의 단은 때와 곳에 따라, 그 질량의 조건에 따라 비약이 심하고 갈등이 심하다.

다만 이 대강령만은 확고한 것이니 유단의 살력을 얻자면 수업료가 기백만 금이 들것이요, 수행년한(수행연한)이 또한 기십 년이 필요한 것이다(단 천재는 차한(此限·이 한계)에 부재이다)

이를 요약하면 9급에서 2급까지를 술의 진미를 모르거나 목적을 위해 마시는 경지다. 또 초급에서 4단까지를 술의 진미를 오달한 경지이고, 5단부터 8단까지를 술의 진제를 체득하고 임운자적하는 경지라 했다. 특히 9단을 열반주라 하여 ‘명인급’이라 명명했다.

다만 자고로 술은 반취반성(半醉半醒)이라 하여 만취보다도 반취가 본정신을 가질 수 있어 좋다고 했다.

※ 아래 참고로로 시작한 글은 전문 취소합니다. '임운목적(任運目適)'이 아니라 '임운자적(任運自適)'입니다. 누군가 맨 처음에 베끼면서 자(自)자를 잘못 보고 목(目)자로 써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을 하면 모두 '임운목적(任運目適)으로 나옵니다.

이러니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았네요. 기자는 '적(適)'자의 의미를 이틀 간 끈질기게 찾았습니다. 이 와중에 깨치게 됐고, 임운자적을 검색하니 단 한개 사례가 나왔습니다.

혼란을 드려서 죄송하게 됐고, 이미 읽은 분들이 이해를 해야 하기에 밑은 내용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둡니다.

※ 참고로 기자가 한문에서 보고 들은 것이 적어 과문(寡聞)한 탓에, '임운목적(任運目適)'을 풀이하기 어렵네요. 윗글의 흐름상 '임운'은 '운에 맡긴다'로 보면 될 듯한데 '목적'의 풀이는 아직도 난감합니다. 정확한 뜻을 몰라 엇비슷하게 풀어서 적시했습니다.

저 글을 쓴 시기가 1960년대 초반이니, 아마 일본투 단어가 아닐까 합니다.

- '적(適)'의 뜻과 소리는 '맞을 적'입니다. '찾아가다' '알맞다' '마땅하다' 등으로 풀이하네요.

- 힌트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강의 "목적(目適)이란, 과녁을 눈으로 바라보는 행위이지 과녁이 아니다”란 문구에서 찾았습니다. 진정한 목적(目的)이란 높은 직책, 지위 등 그 어떤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과녁을 바라보면서 실천하는 행위라고 풀이했네요.

따라서 목적(目適)은 결과를 뜻하는 '명사'가 아니라, 그 결과를 이루기 위한 '동사'입니다.

이런 이유로 임운목적(任運目適)을 '운에 맡기고 눈으로 과녁을 바라보듯 하다'로 일단 해석했습니다. 맨날 술을 벗삼고 '될 대로 돼라', '캐세라세라'(queserasera' 상태로 지낸다는 뜻입니다.

저작권자 ⓒ 더경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