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식(寒食)입니다. 어제의 청명과 같은 '절기'가 아닌 '명절'입니다.
한식은 절기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로, 청명과 같은 날이거나 하루 다음날 찾아옵니다. 양력으로는 4월 5~6일 무렵입니다.
한식을 풀어보면 찰 한(寒) 밥 식(食), 즉 '찬 음식을 먹는 날'입니다. 이유는 아래에서 알아봅니다.
예전엔 한식을 설날, 단오, 추석과 함께 4대 명절로 쳤습니다. 지금도 세시풍속으로 전해져 제를 올리고 시절 음식을 해먹지요.
고려 때부터 한식을 큰 명절로 여겨 국가에서는 종묘와 경령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관리에게는 3일의 휴가를 주었으며, 죄수의 사형을 금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조선 후기에 쓴 '동국세시기'의 삼월조에는 한식에 대해 "산소에 올라가 제사를 올리는 풍속은 설날, 한식, 단오, 추석 네 명절에 행한다. 술, 과일, 식혜, 떡, 국수, 탕, 적 등의 음식으로 제사를 드리는데 이것을 명절 하례 혹은 절사(節祀)라 한다. 선대부터 내려오는 풍속이 가풍에 따라서 다소간 다르지만 한식과 추석이 성행한다. 까닭에 사방 교외에는 사대부 여인들까지 줄을 지어 끊이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한식이 큰 명절이었음을 알 수 있지요.
한식은 우리의 풍습이 아니라 중국에서 들어온 절기였으나 토착화 됐습니다.
춘추시대 제나라 사람들은 한식을 금연일(禁烟日), 냉절(冷節) 또는 숙식(熟食)이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유래는 춘추시대의 인물 개자추(介子推)에 관련된 설화 설과 고대의 개화(改火) 의례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개자추 설화에서는 '이 날은 풍우(風雨)가 심해 불을 금하고 찬밥을 먹는 습관(習慣)에서 왔다'고 합니다.
진나라의 문공(文公)이 왕이 되어 이전에 뜻을 같이하던 충신들을 포상했습니다. 그런데 과거 문공이 굶주렸을 때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서 바쳤던 충신 개자추가 포상자에 들지 못하자 그는 부끄럽다며 면산으로 들어가 숨어버립니다.
문공이 한참 뒤에 잘못됨을 뉘우치고 그를 찾았으나 개자추는 산중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문공은 산에다 불을 놓으면 불을 피해 나올 것이라는 생각에 불을 질렀는데 그는 끝내 나오지 않고 홀어머니를 껴안고 버드나무 밑에서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이에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이 날은 불을 쓰지 않고 찬 음식을 먹는 풍속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날 비가 내리면 ‘물한식’이라고 하며 그 해에는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후일에 '탐천지공(貪天之功)', 즉 '하늘의 공을 탐 내 자신의 공인 체 한다'는 고사성어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개자추는 문공이 9명의 헌종 아들 중에 가장 뛰어난 능력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신하들이 자신들이 공을 세워 문공이 왕이 됐다고 하는 것을 한탄했다는 데서 유래됐습니다.
이날 나라에서는 종묘(宗廟)와 각 능원(陵園)에 제향을 지내고 관·공리들에게 공가(公暇)를 줘 성묘를 하도록 했고, 민간에서는 조상의 산소를 돌보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개화(改火) 유래설은 원시시대에 오래된 불은 생명력이 없어 인간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여겨 기존 불을 끄고 새불을 피우는 의식을 주기적으로 했다고 합니다. 이 시기가 구화(舊火)를 끄고 신화(新火)를 점화하는 과도기 구간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날은 이 때 풍우(바람과 비)가 심해 불을 금해 찬밥을 먹는 풍습이 생겼다고 합니다.
일각에서는 개자추 설화는 이야기가 그럴 듯하지만 이미 원시 때부터 있어 왔던 개화 의식 관습에서 파생됐다며 개화설에 더 무게를 둔다고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반도 북쪽이 남쪽에 비해 한식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한식 풍습들
청명과 한식은 흔히 같은 날로 여겨 풍습이 특별히 구분을 하지 않습니다.
한식일의 대표 풍습은 금화(禁火)와 성묘가 있습니다. 찬 음식을 먹는 날이라 여겨 한식이 가까워지면 일정 기간 동안 불을 멀리하고 찬 음식을 먹었습니다.
개자추를 애도하는 뜻에서 불을 쓰지 않았던 풍속은 물론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기다리는 사화(死火)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밥을 지을 수 없어 찬밥을 해먹었다는 것 모두 연관이 있습니다.
이날엔 쑥떡, 화전, 창면, 화면과 진달래로 빚은 두견주 등의 음식을 마련해 나눠먹었습니다.
왕실에서는 이날 종묘 제향을 지내고 찬 겨울에 허물어진 능묘를 보수했습니다. 민간에서도 성묘를 하고 간단하게 제사를 지냈는데 한양에서는 제사에 앞서 산신제를 지내기도 했다네요.
또 한식은 청명과 마찬가지로 악귀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일명 '손 없는 날'로 여겨 산소에 잔디를 새로 입히거나 비석과 상석을 세우고 이장을 하는 등 산소를 보수하곤 했습니다.
또 묘를 찾아 자란 쑥이나 가시덤풀을 뽑고 베거나 새 잔디를 심고 한겨울 얼었다가 녹으면서 흘러내린 흙을 보완하는 등 묘를 돌봤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지상에 있는 신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라 여겨 특별히 택일을 하지 않고도 무너져 내린 산소를 돌보거나 이장을 하기 좋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일부 지방에서는 청명에 '내 나무'라고 해 아이가 혼인할 때 농(장농)을 만들어 줄 재목감을 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다음 날이 중국 고사에서 유래된 불에 타 죽은 이를 기린다는 한식이니 찬 메일국수를 한식면(寒食麵)이라고 부르며 해 먹었습니다.
한식날 놀이로는 함남 지역의 ‘돈돌날이’이 알려져 있습니다. 한식 다음 날 함남 북청 지방의 부녀자들이 강가나 모래산 기슭에 모여 달래를 캐고, 오후가 되면 ‘돈돌날이’를 비롯해 20여 개의 민요를 번갈아 부르며 춤을 추는 놀이입니다. 함남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북청 사람들은 가난했지만 언젠가는 잘 살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이 민요를 불렀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땅이 다시 우리의 손에 되돌아온다는 뜻으로 해석해 항일 성격의 민요로 인식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