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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뉴스] ‘고려 현종 기리는 축제’···경남 사천와룡문화제 어가행렬, 연등회 모습들(동영상)

정창현 기자 승인 2023.04.30 21:44 | 최종 수정 2023.05.07 16:04 의견 0

25번째를 맞은 경남 사천와룡문화제’가 30일 3일간의 화려한 일정을 마쳤다. 사천으로 귀향 온 아버지를 따라 와서 사천에서 자란 고려 제8대 임금 현종을 기리는 축제다.

사천와룡문화제는 현종이 임금이 된 뒤 지금의 사천을 사수현(泗水縣)에서 사주(泗州)로 승격시킨 업적을 기리는 것은 물론 왕의 고향이라는 뜻의 '풍패지향(豊沛之鄕)' 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풍패(豊沛)는 중국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의 고향이다.

개막일 주요 축하행사는 팔관회와 연등회였다. 두 행사는 고려 시대를 정신적으로 지탱한 대표적인 불교의식이다.

■ 다음은 행사 모습들

팔관회는 사천시청 노을광장 일원에서 올해 처음 재현됐다. 현종의 어가행렬, 의식행사, 백희가무 등으로 꾸며졌다. 제사 의식인 팔관회는 고려 현종이 백성들의 대동단결, 민족의 자부심 고취를 위해 국가 행사로 부활시켰다.

또 시민과 관람객 1000여명이 참여한 연등회(燃燈會)는 천년을 잠자던 와룡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연등회는 석가의 탄생일에 불을 켜고 복을 비는 의식이며 신라 때 시작돼 고려 태조 때까지 정월 대보름날 행해졌다. 유교를 중시한 제6대 왕 성종(태조 손자) 때 중단 됐다가 현종이 즉위 후 2월 보름날로 바꿔 되살렸다.

연등회는 취타대를 선두로 호박등 모양의 행렬등과 대형용, 사천시 상징물, 각종 인기 캐릭터 모양의 등이 불을 밝혀 시청 앞 대로까지 행진하며 화려하게 수놓았다.

▶사천와룡문화제 연등행렬

어가 및 연등 행렬의 출발 전 모습

거대한 용 형상의 연등. 용의 입에서 화염이 뿜어져 나온다.,

각종 연등 행렬 모습

코끼리를 탄 아기 부처와 연꽃 연등 행렬

시민들도 청사초롱과 같은 호박등을 들고 행진 하며 축제를 함께 즐기고 있다.

사천시 기관과 단체의· 장들도 손 연등을 들고 대열을 따르고 있다. 이상 사천시 제공

■ 왜 사천과 현종인가?

사천와룡문화제는 사천시 정동면에 있는 '배방사'로 내려와 유년시절을 지내던 고려 제8대 임금 현종(顯宗)과 사남면 능화마을(추정)로 유배돼 살던 그의 아버지이자 태조 왕건의 8째 아들 왕욱(王郁·안종)과의 부자간 만남을 재조명 하는 행사다.

현종의 아버지 왕욱이 5대 임금 경종이 세상을 떠난 뒤 경종의 비 헌정왕후와 사통한 죄로 사천으로 유배를 왔다. 경종이 26세의 젊은 나이에 죽자 과부가 된 헌정왕후는 시숙부 욱의 집을 왕래하다가 정을 통했다. 헌정왕후가 현종을 임신을 했고 출산을 하자마자 사망했고, 6대 임금 성종은 욱의 아들 순(詢)을 아버지가 있는 사천으로 보낸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을 떨어져 있게 했다. 아버지는 귀룡동(사남면 능화마을 뒷산)에서 귀향살이를 하고, 아들 순은 배방사에 머무르게 했다. 왕욱은 아들을 만나기 위해 5년간 배방사를 오갔다. 귀룡동으로 돌아갈 땐 산마루에서 아들이 있는 배방사를 바라보며 눈물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후세 사람들은 이 고개에서 '아들을 되돌아본다'는 뜻에서 고자정(顧子亭)이란 정자를 세웠다.

욱은 죽기 직전인 아들 순이 다섯 살 되던 해(996년)에 금 한 주머니를 주면서 “내가 죽거든 이 금을 지관(地官·묏자리 좋고 나쁨을 가려내는 사람)에게 주고 나를 마을 성황당 남쪽 귀룡동에 매장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어라”고 했다고 한다. 시체를 엎어서 묻으면 임금이 난다고 믿었다. 욱은 이어 사망했고 배방사에서 15리 떨어진 안종능지(安宗陵址)에 묻혔다.

순은 다음해에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올라가 승려로 숭교사에 머물렀다. 이듬해 성종이 사망하고 경종의 맏이인 목종이 12년간을 제위 한 뒤 순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아버지 욱의 아들을 향한 극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그가 사망한 지 13년 만에 순은 고려 8대 현종으로 즉위한다.

현종은 즉위 후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땅 사수현(泗水縣)을 사주(泗州)로 승격시켰다. 고려사절요에는 현종 6년(101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전국에 12개주만 있었으니 파격적이다. 사주는 진주목에 속해 있었다.

이로 인해 사천은 ‘풍패지향(豊沛之鄕·왕조의 본향)’이란 이름을 얻었다. 우리의 역사에서 풍패지향으로 불린 곳은 고려시대의 사주와 조선시대의 전주 밖에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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