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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논란'으로 폐지했던 남인수가요제, 경남 진주시 문산읍에서 부활된다

사유지에 특설무대 만들어 공연

정창현 기자 승인 2023.06.16 02:55 | 최종 수정 2023.06.21 10:04 의견 0

진주가 낳은 불세출의 가수이면서 '친일 가수'로 지적되는 남인수 선생의 이름을 딴 '남인수가요제'가 경남 진주시 문산읍에서 열린다.

(사)남인수기념사업회는 오는 18일 진주시 문산읍의 한 개인 부지에 특설 무대를 만들어 '남인수 61년 추모제'를 연다고 밝혔다. 이어 '진주의 아들, 제1회 남인수가요제'를 개최하기로 하고 7월 22일 같은 장소에서 예심을 치르고 11월 본선 행사를 개최한다.

남인수가요제는 친일 논란으로 지난 2008년 폐지된 이후 15년 동안 열리지 않았다. 이에 남인수기념사업회는 더 이상 가요제 부활을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남인수기념사업회는 당초 진주 시내에 있는 경남문화예술회관 앞 남강야외무대에서 행사를 열기로 하고 진주시로부터 대여 허가를 받고, 진주 시내 곳곳에 공연이 열린다는 펼침막을 내걸고 홍보에 나섰다.

남인수기념사업회가 기념사업회 사무실이 있는 문산읍 인근 사유지에 마련한 특별무대


그런데 민족문제연구소 경남진주지회가 성명을 내고 진주시에 장소 대여 취소를 요구했고, 부담을 느낀 진주시가 장소 대여 허가를 취소했다.

시 관계자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성명을 내는 등 일부에서 반대를 하고 있어 갈등 해소 차원에서 대여를 취소했다"고 밝혔다.

이에 남인수기념사업회는 장소를 변경해 기념사업회 사무실이 있는 문산읍의 한 사유지에 특설무대를 만들어 행사를 하기로 했다.

18일 오후 열리는 '남인수 61년 추모제'는 초청 가수 공연에 이어 김진수 전 진주문화원 원장 초청 강연, 추모 공연 순서로 진행된다.

김영삼 남인수기념사업회 총괄본부장은 “남인수 선생 타계 61주년을 맞아 추모제 행사를 하자는 의견이 많아 행사를 되살리기로 했다"면서 "18일 추모제를 한 이후 기자회견 등을 통해 시에 대관을 다시 요청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한 시민 서명도 받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노래와 친일 논란은 분리해 접근해야 한다. 공연에서는 해방 이후의 노래들로만 꾸며진다"고 말했다.

남인수가요제 현수막

남인수가요제 현수막 모습. 남인수기념사업회 제공

남인수가요제는 1996년부터 10여 년간 진주에서 열리다가 그의 친일 행적이 논란이 되면서 2008년 폐지됐다. 지난해 8월에는 진주연예협회가 '대한민국 가요 100년사 황제의 귀환'이라는 제목으로 '제1회 남인수 가요제(예선)'을 열려고 했지만 진주 지역의 정당, 시민사회단체의 반대로 취소했다.

해방 이전 남인수 선생의 주요 히트곡은 ▲인생극장, 물방아 사랑(1937년) ▲애수의 소야곡, 꼬집힌 풋사랑, 항구마다 괄세더라(1938년) ▲감격시대, 항구의 청춘시, 안개 낀 상해(1939년) ▲울며 헤진 부산항, 눈 오는 네온가(1940년) ▲청춘항구, 인생, 포구의 인사(1941년) ▲낙화유수, 남매, 청년고향(1942년) ▲어머님 안심 하소서, 남아일생, 서귀포 칠십리(1943년) 등이다.

남인수 선생(1918~1962년)은 진주 출신으로 진주 진주제2공립심상소학교(현 봉래초교·1932년)를 졸업했다.

친일 군국가요를 불렀다고 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42년 '강남의 나팔수'(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편곡), 조선군보도부에서 지원병 제도를 선전하기 위해 제작한 영화 '그대와 나(軍と僕)'(감독 허영)의 주제가인 '그대와 나'(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편곡), '남쪽의 달밤'(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편곡), '낭자일기'(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편곡), '병원선'(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편곡), 1943년 '이천오백만 감격'(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편곡), 일제징병 독려 '혈서지원'(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를 불렀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할 무렵 남인수 선생도 어쩔 수 없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이들 군국가요를 불렀다는 주장도 한다.

해방 전 가요로는 '애수의 소야곡', 해방 이후에는 3·8선이 갈라지자 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가거라 삼팔선'(1947년),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많은 불후의 명곡을 불렀다.

정부와는 다른 입장의 ‘여순(麗順)사건’을 다룬 '여수야화'(1949년)는 발매가 금지됐었다.

1958년 대한가수협회의 초대회장, 1960년 전국공연단체연합회 회장을 거쳐 1961년 12월에는 한국연예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했다.

남인수 선생의 목소리는 백년이 지나도 나올 수 없는 하늘이 내린 목소리로 평가받고 있다.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 주옥같은 1000여 곡들은 나라 잃은 서러운 마음을, 때로는 분단의 아픔 속에 신음하는 서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준 한국의 대표적인 대중가수라고도 할 수 있다.

김영삼 남인수기념사업회 총괄본부장은 이와 관련해 "친일 논란은 역사가 판단할 문제이고, 해방 이후 남인수 선생의 노래는 많은 실향민에게 희망을 줬기에 이 부분을 기념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남인수 선생 동상과 '애수의 소야곡' 악보 비석(오른쪽)

'애수의 소야곡' 악보 비석. 이상 정창현 기자

진주 진양호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동상 옆에는 그가 부른 불멸의 히트곡 '애수의 소야곡' 악보 비석이 있다. 묘소는 진주시 장재동 강 씨 문중 묘소에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펴내면서 그를 친일가수로 등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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