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년 전 구한말 창원 지역에서 외국인에게 발급된, 오늘날의 비자인 ‘호조(護照)’가 발견됐다.
호조는 달리 '행장(行狀)'이라고 하며 외국인의 신청을 받아 현재의 외교부에 해당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서 발급됐다. 근대화 개혁인 갑오경장이 진행 중이던 1895년부터는 외부(外部)에서 업무를 이었다. 이번에 발견된 호조는 지역 감리서인 창원감리서에서 발급됐다는 점이 특이하다.
박영주 경남대박물관 비상임연구위원은 지난 12일 "창원감리서가 러시아인 2명에게 1901년 7월 22일 발급한 호조를 발견했다"며 자신의 페이스북에 게시물을 올렸다.
박 연구위원이 공개한 호조에는 이들이 지역 곳곳을 통행할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목적지나 방문 이유 등의 내용은 적시돼 있지 않다.
이번에 발견된 호조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발급한 것이 아닌 창원 감리서에서 발급됐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당시 창원은 1899년 마산항 개항으로 외국인 방문이 잦아 중앙 기관에서 발급해야 하는 호조 업무를 위임한 것으로 보인다.
박 연구위원은 “마산은 개항장이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며 “그래도 정해진 구역 외로 가려면 통행증인 호조가 필요했는데 그 서류를 창원 감리서가 발급해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감리서는 대한제국 때 개항장 등에서 행정과 대외통상 업무를 맡아보던 관아다. 창원감리서는 1899년 마산항 개항에 맞춰 현 마산합포구 남성동 제일은행 자리에 설립됐다. 창원 감리는 창원 부윤(현 시장)이 겸직했다.
박 연구위원은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창원시장이 외국인 통행허가증을 직접 내어주는 셈”이라며 “지금과 달리 지방단체장의 권한과 힘이 막강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창원 감리서의 문서 양식과 관인이 또렷하게 확인된다”며 “러시아인들은 한문 표기가 어려우니 한글로 표기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고 덧붙였다.
박 연구위원은 1900년 6월부터 창원 감리를 지낸 한창수(韓昌洙)라는 인물을 추적하던 중 이번 자료를 발견했다고 전했다.
그는 “평소에도 지역사 연구를 위해 창원 지역의 장을 지냈던 인물 자료를 틈틈이 찾아봤는데, 한창수와 관련된 서류를 살펴보던 중 우연히 발견했다”며 “한창수는 추후 적극적으로 친일을 했던 인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한창수는 1900년 5월부터 창원 감리 겸 부윤으로 부임한 이후 1903년 5월까지 감리를 지냈다. 이후 한일합병에 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10년 10월 7일 발표된 남작 작위 수여 대상자에 포함된 바 있다. 권세를 이용한 치부에 능숙해 일제강점기 귀족 중에서도 가장 부유하게 살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추가 참고 자료
‘호조(護照)’는 개항기 이후 통리기무아문(지금의 외교부)에서 우리나라를 여행하고자 하는 외국인들에게 발급한 문서, 즉 여행증명서다.
‘행장(行狀)’이라고 하는데 외국인들의 신청을 받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과 외부(外部·1895년 이후)에서 발급했다.
사용 기간은 보통 6개월로 여행자의 성명·신분·여행지 등이 명시돼 있고, 한 사람에게 한 장이 발행됐으나 2인 이상이 같은 지역을 여행할 때에는 한 장으로 처리됐다.
호조의 발급료는 1인당 동전 15냥이었다.
이를 지닌 자는 개항지가 아닌 곳에도 여행할 수가 있어 당시 조선에 와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이를 이용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했다. 프랑스인이 지닌 호조에는 1886년에 맺은 조불수호조약의 내용 일부가 수록돼 있다.
한편 구한 말 서양 여러 나라와 수호조약을 맺고 청나라와도 무역통상장정(貿易通商章程)을 맺은 뒤로는 외국상인들이 내륙지방에 상품을 운반해 판매하는 상행위를 했는데 이를 자주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