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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현장] "수정이 안 돼요, 수정이"··· 계속되는 늦겨울 비에 속 타는 농심

기후 변화로 인한 수정 감소 피해 현실화
장마철 같은 잦은 비, 일조량 감소 등으로 수정 크게 줄어

정기홍 기자 승인 2024.02.24 16:41 | 최종 수정 2024.02.27 00:51 의견 0

"비가 그칠 모양이네. 어서 가봐야겠어"

24일 경남 진주시 진성면 면사무소가 있는 진성삼거리 커피숍. 인근 사봉면에서 비닐하우스를 하는 한 농업인이 급히 일어났다. 이 농업인은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던 차였다.

이곳 카페들은 인근에서 농축산업을 하는 농업인들이 거의 매일 만나 농축산업 노하우는 물론 마을 일 등을 두고 담소를 나누는 등 '민심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이다. 요즘은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 이야기가 주된 논제로 오른다.

이날 낮엔 그제와 어제 이틀 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고 잠시 햇살이 비쳤다. 정월대보름인 이날은 오후 늦게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가 돼 있었다.

이처럼 최근 보름 정도 진주 지역엔 봄비가 잦았다. 진주 지역의 올해 비온 날은 20일 간으로 지난해보다 1.5배 많다. 최소 2~3일에 한번은 눈비가 내렸고, 가장 최근인 지난 19~20일에도 비가 내렸다.

진주시 진성면 구천마을 고추 시설하우스. 늦은 겨울비로 일조량이 적고 습도가 높아지면서 수정이 제대로 안 되고 노랗게 마른 고추잎이 많아졌다.

이날 커피를 마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난 농업인은 호박 시설하우스를 한다. 그는 급히 하우스로 가서 동해를 막기 위해 덮어놓았던 보온막을 거두고 햇빛을 쐬었다. 그는 햇빛을 쬐면 난방비도 훨씬 절약된다고 했다.

시설하우스 농업인들에 따르면, 최근 잦은 비로 일조량이 크게 줄어 하우스 안에 습도가 높아지고 시설채소에 수정(착과)이 제대로 안 되고 곰팡이병까지 생겼다고 했다. 생육도 당연히 부진하다. 호박, 고추(땡초) 시설농가의 상황은 비슷했다. 이들은 이러다가 시설 농사를 접어야 할 판이라는 다소 과한 말도 했다.

근자에 농작물의 생태계에 기후 변화로 인한 피해 사례가 잦아졌다.

지난 수년간 지구촌에 닥쳐진 폭우와 폭염 등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거대담론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보다 더 무서운 것은 비닐하우스 채소재배 피해처럼 작지만 소리소문 없이 다가서는 기후적 피해다. 실제 지근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고 고충이다.

햇빛이 부족해 시설하우스 안의 온도가 낮아지고 습도까지 높아져 역병 피해까지 번지고 있다. 가동하는 보일러와 조명 시스템은 단기 임시처방용이다. 예컨대 하우스 조명은 햇빛의 10분의 1 정도에 그친다. 이어 전기세도 평소의 두 배 가량 늘어난다.

진성면 구천리에서 고추(땡초)를 재배하는 한 시설하우스 농업인도 24일 기자에게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 긴급히 방제약을 뿌려 겨우 잡아가고 있다"고 상황을 전했다. 고추잎이 짓물러지고 오그라들고, 심하면 말라비틀어진다. 그는 병이 확산되기 전에 큰 고추는 따내고 약을 쳤다고 했다. 이에 따라 약을 친 곳은 수확이 미뤄지곤 해 제때 출하를 못하고 있다.

진성삼거리 카페 자리에 있던 한 농업인은 "미세한 날씨 변화가 생물엔 큰 영향을 줘 피해를 키우는 일들이 잦아졌다"며 "재배 과정에서 신경 쓸 일이 자꾸 들어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올해는 지난 1월 말부터 늦겨울 비가 잦으면서 이런 일조량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예전에는 없던 일이다"고 전했다. 장마철처럼 일조량 부족하다는 말이다.

다만 피해는 상추 등 꽃을 피우지 않은 시설채소가 아닌, 수정을 해야 열리는 호박, 고추, 피망 등 열매 채소에서만 발생하고 있다.

실제 진주 지역엔 2월 들어 비가 자주 왔다. 비가 내리는 행태도 여름철 장맛비와 비슷하다. 햇빛을 듬뿍 받아 수정을 잘하고 실하게 커야 하는 시기에 비가 오니 시설채소에 많은 악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날씨 피해는 지난해 봄에도 있었다.

지난해 3~4월 꽃가루 수정 시기에 갑작스런 봄 한파가 두어 번 닥쳐 수정을 해야 하는 배꽃과 사과꽃 등이 동해를 입고 말라비틀어졌다. 이는 과실 착과율 저하로 이어졌고 적게 열렸던 사과는 중부 지역의 수확철 우박으로 상처를 내 상품으로 출하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비슷한 피해는 전국에 걸쳐 적지 않았다.

이 결과로 지금까지도 '금사과', '금배'가 돼 있다. 감도 마찬가지다. 또한 사과를 못 먹다 보니 대체재로 감귤을 찾으면서 감귤 값도 폭등했다. 겨울철에 많이 찾는 대표 과일들이다. 가격 인상은 도미노 현상으로 다른 과일로 이어지고 있다.

이날 자리를 함께한 지수면 시설하우스 농업인은 "불과 몇 년전만 해도 농업재해보험이 남의 일로 치부했는데 이젠 가입을 꼭 고려해야 할만큼 절실해졌다"며 "지자체 등에서 최고 90%까지 지원한다는데 가입 조건과 지급 조항을 신경써 알아봐야겠다"고 했다.

진주시 진성면 구천마을 고추재배 시설하우스 모습

진주시 진성면 구천마을 고추 시설하우스. 이상 정창현 기자

경남 지역의 화훼 재배 농가에서는 시설채소 농가와 비슷하게 잦은 비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결혼 부케 봄 수요철을 맞아 꽃을 재배 중인 한 시설하우스 농가는 요즘 비가 오거나 구름 낀 날이 많아져 2주 전부터 드넓은 시설하우스 안에 조명등을 켜놓고 있다. 마치 장마 같은 날씨가 이어지면서 일조량이 예년보다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예년 이맘때는 꽃송이가 활짝 피었지만 올해는 꽃이 피는 경우가 줄었다. 햇빛을 받지 못한 꽃잎이 생기를 잃고 색깔은 누렇게 변했다. 해가 나지 않아 대신 조명을 사용하고 있지만 날이 개는 날이 많지 않아 역부족이다.

지난 1월 말부터 지금까지 전국에 비와 눈이 연일 내리고 있다. 특히 1주일 전엔 제주와 남부 지역엔 겨울비 치곤 100mm안팎의 많은 비가 내리면서 일조량이 급감했다.

진주시농업기술센터 관계자는 "비가 지속되면서 시설채소나 과수 쪽에 일조량 부족으로 기형 채소나 병해 발생이 많아지고 있다"며 "예찰 활동을 강화하고 예방 농약을 쳐 줄것을 당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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