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경남뉴스의 창간 기획 '지수 승산을 가다' 취재반은 첫번째 '들어서는 글'에서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을 처음으로 접한 소회를 실었습니다.
이번 회에서는 승산마을을 소개하는 총론격으로 ▲'승산마을의 산세와 지세' ▲ '승산마을의 유래와 변천사'로 나눠 싣습니다.
취재에 동행한 이 마을의 이병욱(79) 전 이장, 지수초등학교 허성태(73) 총동창회장 등 지수초등학교 회장단, 마을 주민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 연재 순서
◆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
1. 들어가는 글
2. 승산마을의 산세와 지세
3. 승산마을의 유래와 변천사(예정 글)
■ 승산마을 산세와 지세
▶ 마을입구 공원 '효주원'
취재반은 첫 도착지인 지수초교에서 도로를 건너 승산마을로 가는 길목인 '효주원(曉洲苑)'에 들어섰다. 지수면사무소 바로 옆에 자리한 공원으로, 1만 6000㎡(4840평) 규모다.
효주는 GS그룹의 창업 효시인 허만정(許萬正·1897~1952) 선생의 호다. 공원 조성 당시, 면 단위에서는 전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공원으로 알려져 있다.
기존 언론 매체들은 그동안 '효주공원'만으로 소개해 '효주원'으로 쓴 것은 더경남뉴스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공원을 소개한 안내판에는 '효주원'으로 적혀 있다.
이 공원을 만든 일화가 있다.
LG그룹의 전신인 럭키화학공업에 창업 자금을 댄 허만정 선생의 6째 아들 알토전기 허승효 회장이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지수 면민을 위해 이 공원을 만들었다. 허씨 집안에서 빈 집들을 구입했고, 정식 개장은 지난 2006년 5월 26일 했다.
당시의 돈으로 60억원을 들였으니 꽤 많은 금액이다. 연간 공원 관리비(5000만원)도 허 회장이 전액 부담하고 있다고 한다.
우선 공원을 들어서면 담들이 낮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이 전 이장은 "가족들이 놀러와 편하게 쉬고 가도록 일부러 담을 낮춘 배려"라고 전했다.
효주원에 심어진 향나무와 은목서 등 고급 수종들은 전국에서 다양하게 가져왔다.
공원의 크기는 크지도 작지도 않고 적당했다. 공원을 도는 동안 산뜻하면서도 절제됨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공원을 거닐다 보면 눈여겨봐야 할 게 중앙에 있다. 공원 대나무숲 근처에 있다.
승산마을의 터줏대감인 김해 허 씨 집안에서 이 공원을 만들 때 널빤지 돌을 바닥에 깔았는데, 9개의 직사각형 돌에 기하학 암호문과 같은 문양들을 새겼다. 마을 사람들은 허 씨의 가문에서 내려오는 병풍에 그린 문양과 같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간단해 보이지만 허 씨 집안 사람이 아니면 문양의 뜻을 해석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 승산마을 이 전 이장은 "공원을 만들 때 문양의 의미를 알리자고 말했는데 문중 사람들이 못하게 했다"면서 "약간씩 다른 문양으로 증조, 고조 등 선대들을 대별한다고만 들었지만, 주민들의 말이 각기 달라서 알 수 없다"고 일러주었다.
효주원 안에는 기념 식수를 한 느티나무가 우람하게 있다. 지금부터 13년 정도 전인 2006년 9월에 심은 나무인데 나무 아래엔 식수기념 표지석이 있다.
효주 허만정의 손자들, 즉 셋째아들 허준구의 다섯 아들인 허창수 GS그룹 명예회장을 비롯해 정수·진수·명수·태수 등의 이름이 적혀 있다.
▶ 풍수로 본 승산마을···학이 알 품은 형국
취재반은 효주원을 지나 승산마을에 들어섰다. 코로나19 등으로 방문객이 붐비지 않을 뿐 민속촌과 같은 규모다.
지수면의 명칭은 승산마을 앞 쪽의 남해안고속도로와 접한 지수면 청원리에서 발원한 지수천(智水川)에서 유래한다. 지혜로울 지, 물 수다. 지혜로운 물이 흐르는 냇가란 뜻이다.
마을의 첫 인상은, 범상치 않게 와닿은 산세였다. 유명세를 타는 곳을 찾으면 의식주를 중심으로 한 주민들의 생활상도 보지만, 대체로 산세(山勢)와 지세(地勢)부터 보고서 이러쿵 저러쿵 한마디씩 하는 게 상례다. 반풍수 수준으로 지리를 살핀다는 말이다.
마을을 얼핏 바라보니 동고서저형 낮은 산능성이 아래로 집들이 다소곳이 들어앉았다. 취재반이 보기에는 마을 뒤로 용이 길게 드러누운 듯한, 모나지 않은 형상의 산자락이다. 야산이 자리한 모양이 이날 마을을 찾은 의미를 더했다.
승산마을의 전 이장 이 씨는 기자의 이 같은 말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맨날 보아서, 으레 방문객이 하는 말이라서 그런가 하는 생각에 나오는 말을 꿀꺽 삼켰다.
자료를 찾아 봤더니, 방어산(防禦山·532m)과 괘방산(卦榜山·457m)에서 뻗어 나온 심방산과 보양산이 나지막하게 용(龍)이 머리를 조아린듯 마을을 감싸고 있다고 적었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외향이 누구에게나 비슷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보다 더 크게 보면 지수면 일대가 멀리 지리산 영취봉에서 남강과 낙동강 남쪽으로 이어지는 '부자의 기(氣)'를 받는 곳이고, 이 기운을 가진 정맥이 산줄기를 타고 내려와 방어산과 심방산 사이로 흐르는 지수천과 이어져 마을을 감싸고 있다는 것이다.
승산마을 앞으로는 방어산 등 큰 산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뒤로는 심방산과 보양산 너머 남강이 들판을 휘감아 흐른다. 방어산의 맥을 이어받아 유(U)자형을 이루면서 동네 뒷산을 만들었고, 앞산은 밥상처럼 평평해 풍수지리적으로 회룡고조(回龍顧祖)형이라고 한다. 하늘에서 내려준 밥상이 차려진 곳이라는 뜻으로 예로부터 국부가 태어날 곳이라고 했다.
특별한 것은 이 일대의 남강 물줄기는 북쪽으로 흘러가 낙동강과 만난 뒤 남쪽으로 흐른다는 점이다. 마을 서쪽으로는 남강이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곡류하면서 물길을 형성하고, 한반도가 시계 방향으로 90도를 돌아간 듯한 지형을 보인다.
기자는 오래 전에 "강물이 임금이 있는 한양 땅 쪽으로 흐르면 그 지역엔 역적이 많이 난다"는 '개똥철학'과 같은 말을 들었던 터라 연관성을 따져봤다.
하지만 승산마을이 있는 지수엔 '기업을 일으켜 나라를 보한다'는 '사업보국(事業保國)'에다 배곯는 이웃들에게는 양식거리를 기꺼이 내주고, 일제강점기엔 독립 자금을 대 준 기업가들만이 있을지언정 나라를 망치려는 경우는 없어보인다. 평생 관직을 멀리하고 바른말을 상소하던 남명 조식 선생이 승산마을에서 저멀리 떨어진 합천과 산청에서 나고 지냈을 뿐이다. 남명은 한 시대의 올곧은 선비였다.
이 마을을 찾은 풍수가들은 승산마을이 숨은 형상이라서 그동안의 큰 환란들을 피하고, '부자 기운을 타고난 땅'이라고 입을 모은다고 한다.
산 골짜기의 물이 마을 뒷골목으로 흘러내려가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부자가 됐다는 말이다.
승산마을의 산세와 지세를 종합하면, 이곳은 풍수적으로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金鷄抱卵)'형에 속한다. 달리 학이 둥지를 틀어 알을 품은 형국이라고도 하고, 봉황이 둥지로 내려앉는 '비봉귀소(飛鳳歸巢)'의 땅이라고도 한다.
지수초교의 자리도 새의 둥지에서 새끼들이 어미가 주는 모이를 먹는 자리여서 아이들을 키우는데 좋은 더없이 좋은 명당이라고 전해진다. 이 학교에서 대기업 창업자들이 쏟아졌으니 이 해석은 맞아떨어진다.
아무튼 승산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입지가 더없이 좋은 곳으로 알려져 풍수가들이 빠지지 않고 둘러보는 성지순례지로 여기고 있다.
마을 뒤 보양산을 오르는 입구에는 허만정의 부친인 허준(許駿, 1844~1932)이 생전에 자신의 호인 '지신정'을 따서 지은 지신정(止愼亭)이란 정자가 있다. 허준이 여기에 자주 올라 학문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이곳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 학문을 하기 좋은 곳이었다고 한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풍경도 아름다워 구경자리로도 알맞다. 취재진이 등산로 근처에 있는 전망대를 올랐지만 나무가 울창해 마을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승산마을을 찾는 풍수가들이 방어산을 들렀다가 꼭 둘러보아야 하는 곳으로 친다.
▶만석꾼 키운 들판
그런데 마을 바로 앞 들판은 넓은 편이 아니다. 만석꾼, 천석꾼들이 농사를 짓었다는 들판치고는 상당히 작다.
궁금증은 승산마을 이 전 이장이 풀어줬다.
이 마을에서 남강 물이 흘러가는 곳으로 조금 나가면 사방에 큰 들판이 나온다고 했다. 승산마을의 만석·천석꾼들이 지수의 큰 들판은 물론, 인근 의령과 함안 등지에다 큰 농토를 갖고 있었다는 말이다.
알려진 바로는 구한말 남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강둑을 쌓았는데 여기서 엄청난 농토를 확보한 덕분에 부자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승산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지수면의 서쪽과 북쪽으로 남강과 접하는 금곡리(金谷里)와 압사리(鴨寺里) 일대에는 농경지가 발달해 있다. 지금도 비닐하우스 농가 등 대농가가 많다.
다음 연재 글에서 다루겠지만, 승산리의 지수초교가 압사리에 있는 송정초교에 통폐합 된 이유도 비닐하우스 농가들이 많아서였다고 한다.
승산마을이 큰 들판에서는 조금 떨어졌지만, 허 씨 가문 등이 주변 산세 때문에 이곳에 정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승산에 큰 영향 준 '큰 산' 방어산
앞에서 언급했지만 방어산(마을에선 밥산이라 함)은 이처럼 승산마을 사람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산이다. 지수면이 속했던 옛 진양군에서 지난 1993년 12월 6일 군립공원으로 지정했고, 도농통합으로 진주시에 흡수돼 지금은 시립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방어산의 본래 이름은 승어산이었다고 한다. 승산마을 이름도 여기서 따왔다.
옛 승산마을 사람들은 '큰 산' 방어산 자락에 걸린 새벽 별인 샛별(금성)을 보며 하루 일을 시작했다고 마을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진다. 승산 사람들이 그만큼 부지런했다는 말이다.
이런 뜻을 있을까? LG와 GS의 전신인 금성사(金星社·Goldstar), 삼성(三星), 효성(曉星) 등이 모두 별과 연관돼 있다. 별 성자를 땄다. 효성은 금성의 또다른 별칭이다.
지금은 주민자치위원회에서 만든 방어산 등산로와 지수중학교 뒤에서부터 용봉리까지 산책로가 이어져 있어 주민들의 건강을 지키고 있다.
방어산이 왜적을 막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해 막는다는 뜻의 방어란 단어를 차용해 방어산이라 이름을 붙였다.
승산마을은 이처럼 남강은 물론 방어산이 둘러서 감싸고 품고 있다. 기자처럼 풍수에 문외한인 사람도 한눈에 더없이 좋은 터란 것이 직감적으로 금방 와닿는다.
▶길과 물 이야기
승산마을을 잇는 '소리길'(지금의 지수로)은 방어산과 괘방산 쪽의 청원리에서 내려오는 길이다. 지금은 넓은 2차선으로 확장돼 승산마을과 방어산 사이를 지나는 남해안고속도로와 연결된다. 지수천도 마찬가지로 방어산과 괘방산 자락의 청원리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흘러간다.
승산마을은 예부터 물이 풍부했다. 마을 지형이 겹겹이 싼 산으로 인해 물이 항시 흘러내렸고, 평상시에도 물이 바로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풍수가들은 마을의 풍부한 물을 승산이 부자마을이 된 이유로 빼내기도 한다. 지수천 등 마을로 물길이 들어오는 곳이 많고,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물구멍)는 좁다.
동네 안산이 밥상머리 형태이면서 방어산에서 내려온 뒷산이 동네를 휘감아 맥이 끊어지지 않는다.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은 두겹(지수천과 승산천)으로 흐르고 구슬언덕(玉峰)과 떡(德)바위로 불리는 네모진 바위가 동네 어귀에 있어 마을로 감아든 물의 직류를 막고 잡아둔다. 한번 들어온 재물은 나갈 수 없는 천혜의 지형을 갖추었다는 의미다.
고전 풍수책인 '인자수지'에서도 '물은 재물을 관장한다. 물이 깊고 많은 곳에서는 부자가 많이 나고 얕고 적은 곳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많다'고 적고 있다. 풍수에서 물은 재물을 의미하고 승산마을은 재물이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들어오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승산마을을 중심으로 한 지수면에는 저수지와 소류지가 꽤 많다.
물이 풍족하다 보니 큰 한옥집에서는 개인 우물을 모두 갖추고 있어 가물 때는 이웃과 서로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마을안의 숲안이란 곳에 공동우물은 딱 하나만 있는데, 이는 집집마다 개인 우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지수천은 승산리를 가로지른다.
마을 뒷길 쪽에는 작은 하천(실개천)이 있고, 이 물줄기가 승산교 부근에서 지수천과 합류한다. 지수천과 숲안에는 빨래터가 있어 아낙들은 이곳에서 빨래하는 모습이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물이 부족하지 않으니 농사에 불편함이 없었고 이로 인한 토질도 좋아 아무리 가물어도 좀처럼 흉년이 들지 않았다. 거꾸로 큰 비가 올 때는 물 빠짐도 좋아 큰 물난리를 겪은 적이 없다고 한다. 물과 관련해서도 명지임이 맞아 보인다.
※ 다음은 승산마을 소개 총론 글의 두번째인 '승산마을의 유래와 변천사'(2-2)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