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경남뉴스가 '창간 기획 2탄'으로 경남을 비롯한 부·울·경의 기록물을 찾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분야별 흔적을 소개합니다. 평소 지나쳤던 작은 역사도 끄집어내 탄성을 자아내도록 하겠습니다. 학생들에겐 흥미로운 학습거리도 될 듯합니다.
선화당(宣化堂)은 진주성 안(경남 진주시 남성동)에 있었던 조선시대 관찰사의 집무실 건물입니다.
옛 이름들은 요즘 세대가 접하면 한번 더 곰곰히 생각해야 할 정도로 생소합니다. 선화당은 조선시대 후기인 1896년 이래 경남(낙동강 서부·경상우도) 관찰사 집무실로 사용됐고, 지금의 경남도청사로 생각하면 됩니다.
이 시점에서 선화당을 '경남의 흔적' 시리즈로 다루는 이유는, 옛 흔적을 복원하려는 진주시와 진양하씨 대종중 간에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원하려는 선화당 자리에 진양하씨 선열을 모신 '경절사(擎節祠)'가 있기 때문이지요.
■선화당이 어느 정도 중요한 건물인가?
먼저 선화당이 어떤 건물이고, 어떤 역할을 했었는지 알아봅니다.
관찰사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조선시대 '전국 8도'에 1명씩 임명했던 지방 장관(종 2품·지금 도지사)을 말하는데 달리 ‘감사’라고 하지요. 따라서 관찰사가 있는 관청을 ‘감영’이라고 합니다.
관찰사(감사)는 요즘보다 권한이 훨씬 셌네요. 기본인 행정권에 경찰권, 사법권, 징세권 등을 가져 절대적인 권한을 주었습니다. 예들 들자면 중앙에 사헌부(요즘 검찰)가 있다면 지방에는 관찰사가 있다고 할 정도로 권한이 많아 사헌부의 ‘외헌(外軒)’으로 불렸습니다.
경상도의 관찰사는 처음엔 대구(달성) 등 경북 지방에만 주재했고 경남 지방엔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말기에 경상도의 행정 구역이 남북으로 나눠진 뒤 이전부터 진주목이던 진주에도 관찰사가 주재하게 됐습니다. 이때부터 경남도의 도정 역사가 시작됩니다.
즉, 1896년 4월 13일 경남 관찰도(지금의 경남도)로 나뉘어져 각자 독립 지방행정구역이 된 것이지요.
이에 따라 진주성에는 요즘의 경남도청격인 '관찰부청(관찰사청)'이 들어섭니다.
선화당이란 관찰사(지금의 도지사) 집무실로 도정 업무를 보는 곳입니다.
선화당의 명칭 유래도 있네요.
선화당은 원래 이름은 관덕당((觀德堂, 이후 운주헌(運籌軒))이었다고 전합니다. 운주헌은 경남북의 낙동강 서부 지역을 총괄하던 육상방어 관청인 경상우병영이 폐지되고 관찰부청이 되면서 선화당으로 명칭이 바뀝니다.
선화당이 있던 자리는 경남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 북장대 남쪽 자리입니다.
선화당은 1896년 경남도청사로 사용된 이후 일제강점기(1910~1945년)에도 경남도의 행정을 광장했습니다.
하지만 일제가 한반도에서 수탈한 물자를 보다 싶게 일본으로 실어나르기 위해 도청을 부산으로 옮기면서 선화당도 없어집니다.
일제는 진주의 거센 반대에 불구하고 1925년 4월 17일 당시 부산부 중도정 2정목에 있던 2층 연와조(煉瓦造·불에 구운 벽돌을 쌓은 구조) 건물에 경남도청을 전격 개청합니다.
선화당의 실체는 진주성에 있는 국립진주박물관이 1997년 9~10월 선화당 복원부지 발굴조사에 착수, 다음 해에 선화당의 기초석 등을 확인하면서 드러납니다. 그동안 선화당 위치는 진주성 안에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위치는 몰랐습니다.
그동안 진주 사람들이 이토록 무심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지금 선화당 터로 확인되는 곳에는 수십 개의 비석들이 서 있습니다.
이들 비석은 1970년대 시작된 진주성지 정화작업 때 성 안팎에 흩어져 있던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때의 각종 공덕비를 모아놓은 것입니다.
비석군 옆에는 1990년대 초 이전해 놓은 진양하씨의 재실(齋室)이 있습니다.
선화당은 진주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유적이며, 심도 있는 고증을 거쳐 복원이 이뤄지면 진주는 물론 경상도의 역사 현장이 되겠지요. 하지만 면밀하고 충분한 고증을 거쳐야 하는 난제는 남아있습니다.
■진주시-진양하씨 문중, 선화당 복원 놓고 이견
진주시는 진주성 내 조선시대 관찰사 집무실인 선화당(운주헌) 복원을 추진하기로 하고 이미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큰 복병이 생겼습니다. 진양하씨 대종회가 지난 2020년 10월 28일 기자회견을 갖고 선화당 복원 예정부지를 다른 곳으로 이전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진양하씨 대종회는 “진주시가 아무런 문헌 근거도 없는 곳에 선화당 복원을 추진하면서 천년공적 유산인 경절사가 해체 될 위기에 있다”고 밝혔습니다.
경절사는 진양하씨의 선조인 고려시대 충신 하공진공(河拱辰公)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진양하씨 대종회는 “경절사는 역사적 격동기와 일제의 건물 훼손으로 한 때 존폐의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국가의 문화보호정책으로 잘 보존돼 왔다”며 “1992년에는 정부로부터 확장 이전 승인을 받고 국비 보조와 문중의 성금을 합쳐 준공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하씨 문중은 경절사가 1000년 역사의 공적유산이라 인식하고 진주시에 기부채납까지 했다”고 덧붙였네요.
진양하씨 대종회는 진주시의 조사 자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진주시가 1997년 남성동 167-11을 선화당 예정지로 보고 발굴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167-3 경절사 부근을 발굴하는 등 엉뚱한 곳을 조사한 것으로 보인다”며 “또 강원감영을 제외한 모든 감영은 최초 건립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이·개축 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대안으로 ▲경절사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선화당 재배치 ▲중영 터 발굴지에 중영을 복원하고, 영남포정사와 비석군 사이에 선화당 건립 ▲옛 진주역 부지로 옮기는 진주박물관 철거 터에 선화당 등 관아 복원 등 위치 변경을 제안했습니다.
진주시도 물러서지 않고 있습니다.
시는 “진양하씨 대종회가 선화당 발굴시 엉뚱한 곳을 발굴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남성동 167-3번지는 단 한번도 발굴을 한 적이 없고 1998년 발굴한 곳은 남성동 167-11, 12, 22번지”라고 바로잡았다.
또 “대종회는 또 강원감영을 제외한 모든 감영이 다른 지역에 건립됐다고 했지만 충청(공주)을 제외한 강원(원주), 전라(전주), 경상(대구)은 모두 그 자리에 원형 복원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문화재를 복원할 때 원형 복원을 하지 않을 경우 문화재청의 허가와 지원을 받을 수 없기에 다른 위치에 복원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진주시와 진양하씨 대종회의 타협점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