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경남뉴스는 운동길과 산책길에서 자주 보는 입간판 시를 소개합니다. 대체로 쉬운 시구여서 누구에게나 와닿습니다. 걷다가 잠시 멈추고서 시 한수에 담긴 여유와 그리움, 아쉬움들을 느껴보십시오.
오늘은 청록파 시인으로 알려진 조지훈(趙芝薰·1920~1968년) 시인의 '낙화(落花)'를 소개합니다.
'낙화'는 전체적으로 '소멸되는 아름다움에 대한 슬픔'을 표현한 시입니다.
먼저 시구들의 뜻을 간단히 살펴봅니다. 기자의 개인 의견이 반영됐습니다.
중간 중간에 글자 색이 헐어서 잘 보이지 않네요. 세상에 의미 없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또한 '산책길 시'의 운치입니다.
'꽃이 지기로소(서)니 바람을 탓하랴'란 시구가 많이 와닿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다"고 합니다. 기자는 공휴일에 경남 진주에서 서울로 올라 와 이 산책길을 지날 때면 한번씩 읊조립니다. 이 시가 이곳을 지나는 뭇사람의 '옛 친구'가 되는 셈이겠지요.
'주렴 밖에 성긴 별이'에서의 주렴(珠簾)은 방을 들고날 때 걸리는 거 있죠? '구슬 등을 주렁주렁 꿰매 만든 발'입니다. 성기다는 '사이가 듬성듬성하다'는 뜻이고요.
'귀촉도' 낱말이 생소할 겁니다.
두견새과인 귀촉도(歸蜀道)의 울음은 외롭고 쓸쓸한 모양입니다. 검색 사이트에 가서 울음소리를 들어보면 금방 와닿을 겁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촛불을 꺼야 하리/꽃은 지는데'와 감정의 이입이 잘 이어지네요.
참고로 국민 시인 '국화 옆에서'를 쓴 서정주 시인의 '귀촉도' 시가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시이지요. 두 시인은 동국대 선후배 사이네요. 불교 대학이라서 그런지 시상(詩想)의 대상이 비슷한 모양입니다.
'하이얀 미닫이가/우련 붉어라'에선 '우련' 단어가 걸려 독자의 갈길을 잡습니다.
우련은 '특별히 가엽게 여긴다'이네요. 그냥 붉은 것이 아니고, 꽃이 지면서 붉게 물들인 것을 보니 가엽게 느껴진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감정이 지는 꽃에 이입된 것입니다. 사족을 붙인다면 '붉어 우련하다'란 식으로 앞뒤 자리를 바꾸어야 어법에 맞지만 크고 작은 파격을 주는 것이 시의 묘미이지요.
마지막으로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라'는 종종 접하는 낱말인데 잘 보이지 않아 언급합니다. '염려하다'입니다
'낙화'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즉 스무 여섯 살 젊은 나이에 쓴 작품입니다. 시인이 산 시대와 시가 탄생한 시기는 당시의 분위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어차피 시도 당시를 경험한 사람이 쓰는 거니까···.
독자 여러분들의 시상을 깨지 않기 위해 구체적인 시대상은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기자 개인적으론 이 시를 읽고 시구마다 풍성한 서정적 상상력을 가졌는데, 알고 보니 시상의 영역을 좁혀 혹여 독자분들도 비슷한 경우가 될까봐 삼갑니다.
시나 그림, 사진 등 예술작품이란 게 누가 뭐래도 각 개인에게 와닿는 것이 가장 가치가 있겠지요. 평론가들의 평가는 그 다음 것이고요. 언론이 여론을 만들어 가지만 그 여론에 상치되는 생각과 판단이 있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이참에 이형기(李炯基·1933~2005년) 시인의 '낙화(落花)'도 음미해 봅니다. 조지훈 시인의 '낙화'와 제목도 같지만 정서도 비슷합니다
스무 네 살 때인 1957년에 쓴 작품인데, 1963년 그의 첫 시집 '적막강산'에 실려 많이 알려졌습니다.
이형기 시인은 진주 출신입니다. 살아생전 최연소(16세)로 등단해 '천재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능력과 비교해 일반인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이지요.
낙화는 이별을 아름답게 노래한 시로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문구가 유명세를 탑니다. 요새 말로 하자면 '1절만 하고 끝내라', '박수 칠 때 떠나라' 정도가 되겠네요.
이 시는 천재(노)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배우고 있고, 이전 7차 교육과정에서는 3학년 1학기 국어교과서 첫 단원에 수록됐다고 하네요. 시의 내용이 서정적이어서 학생등에게도 잘 맞을 듯합니다.
이형기 시인은 진주농림학교(진주농전→경남과학기술대→경상국립대)를 졸업, 동국대에 입학해 시인의 길을 걸었습니다. 진주농림학교는 농고가 최고의 명문일 때 전국 제일의 농고였습니다.
언론에도 오래 몸담아 동양통신, 서울신문, 대한일보 등을 거쳤고 부산에 있는 국제신문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역임했네요.
이어 부산산업대 교수를 거쳐 모교인 동국대 국문학교 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이형기 시인의 시풍은 '인생과 존재의 본질'에 관심을 많이 드러냅니다. 6·25 이후 황폐한 시대적 상황에서 정한(情恨·정과 한)이란 우리의 전통적 정서를 잘 표현하고 격조를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 참고 사항(길지만 재미 있습니다)
▶작가 조지훈의 작품
본명은 조동탁(趙東卓)입니다. 지훈(芝薰)은 아호인데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독자분들은 조지훈 시인을 청록파 시인으로 달달 외우던 기억이 새록새록할겁니다.
청록파란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시인을 일컫는데, 1946년 시집 '청록집(靑鹿集)'을 내면서 붙여졌고요. 청록이란 푸를 청(靑)에 사슴 녹(鹿)자를 써 '푸른 사슴'입니다.
조지훈 시인은 고교 국어책에 실렸던 '승무(僧舞)'란 시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명한 시이지요.
'얇은 사 하이얀 꼬깔은/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로 시작된 승무는 가히 명작입니다.
작품으로는 '청록집' 말고도 시집 '풀잎단장'(1952년), 시론집 '시의 원리'(1953년), 수상집 '창에 기대어'(1958년), 시집 '역사 앞에서'(1959년) '지조론'(1962년), 에세이집 '돌의 미학'(1964) 등이 있습니다.
▶ 조지훈 시인의 주변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는데 부친 조헌영은 한의사로 재선 국회의원을 지냈네요. 부친은 한의학 백과사전인 '동의보감' 국역을 주도했다고 합니다. 조지훈 시인의 아들 조태열 씨는 외교부 차관을 역임하고 주UN 대한민국 대표부 대사로 재임했습니다.
조지훈 시인은 동국대 전신인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혜화전문은 보성전문(고려대), 연희전문(연세대)과 함께 국내 3대 사학이었지요.
그의 동국대와 고려대와 관련한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가 있습니다.
조지훈 시인은 당시 명문사학인 혜화전문을 졸업했지만 모교에서 교단에 서지 않고 평생을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동국대 출신이 아닌 고려대 출신으로 아는 사람이 많지요.
고려대 교내엔 조지훈 시인의 시비가 있고, 고려대 응원가인 '민족의 아리아'도 그의 비 글에서 따왔을 정도로 고려대의 그에 대한 애정은 그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1960년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 고려대생들의 4·18시위를 지켜본 이틀 뒤인 20일 지은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란 헌시(獻詩)를 고대신문에 투고해 큰 파장을 일으켰지요.
"오늘의 대학생은 무엇을 자임하는가? 학문에의 침잠을 방패 삼아 이 참혹한 민족적 현실에 눈감으려는 경향은 없는가? (중략) 오늘의 대학생은 무엇을 자임하여야 할 것인가? 다시 한 번 우리는 민족의 지사, 구국의 투사로서 자임해야 할 시기가 왔다”(조지훈이 고대신문에 기고한 '오늘의 대학생은 무엇을 자임하는가' 중에서)
또 '지조론'이란 수필을 통해 이승만 정권 및 정치인들의 지조 없음을 날카롭게 꾸짖었습니다.
고려대 교정에 있는 4·18기념비문을 쓰는 등 교정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동국대로선 입이 쭈뼛하게 나올만 하겠습니다. 실제 동국대 동문들 사이에선 조지훈 시인의 '고대 사랑'에 서운함을 드러내곤 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동국대 동문들은 모교에서 강의했던 서정주 시인보다 존경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동국대 후배인 신경림 시인은 "생전의 지론이 '부도덕하고 경박한 진보주의자보다 도덕적이고 성실한 보수주의자가 역사에 더 많이 기여한다'는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동국대 후배들의 그에 대한 애정이 깃들어 있는 말입니다.
조지훈 시인의 진보(좌파)주의자 질타는 해방 전후 나라가 온통 좌파가 득세할 때 그 뒷모습을 보고 가진 신념 같습니다.
그의 이런 이미지와 달리 야사를 전하는 '도시전설'에선 '시험지를 날려 멀리 날아가는 순서에 맞춰 채점하는 방식'을 쓴 교수 중에 조지훈도 있다는 말이 돕니다.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이 해괴한 장난은 '대한민국 국보'인 양주동 박사가 동국대 교수 시절 가장 먼저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했다는 것인지, 실행을 한 것인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 뒤에 누가 따라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고요.
일본 와세다대를 나온 양주동 박사는 동국대에서 오랜 교직 생활을 했고, 동국대 교명도 그가 만들었다고 하네요. 조지훈 교수의 '고대 사랑'과 양주동 교수의 '동대 사랑'이 비슷해 보입니다.
그의 기행은 가히 한 권의 책으로 내도 될 정도로 많다고 합니다. 이 중에 '양주동=국보'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십년 전 동국대 국문학과 학생들과 경기도 쪽에 MT(모꼬지·동아리 여행)를 다녀오다 차에서 내리면서 넘어졌다고 합니다. 머쓱해진 그가 대뜸 "대한민국 국보가 쓰러졌다"고 했다지요. 워낙 유명해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될 때였으니···. 그때부터 그의 별칭은 국보가 됐습니다.
얼마나 말빨이 좋았던지 그의 동국대 강의시간표는 다른 학교 학생들이 먼저 알고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강의가 시작되면 수백명씩 모여들어 듣곤 했다지요. 강의실 밖에서도 들었다고 전합니다. 기자가 고교 때, 고려대 출신 국어선생님이 "양주동 박사의 강의를 들으려고 맨날 안암동에서 남산 동국대로 갔다. 고대 강의는 그 다음이었다"고 하던 말이 기억납니다.
조지훈 시인은 또한 '술글'로도 유명합니다. 술꾼 등급을 바둑 급수에 빗대 매긴 '주도 18단'(아마 9급~프로 9단)이란 글인데, 그의 수필집 '사랑과 지조'의 '주도유단(酒道有段)'에서 썼습니다.
긴 글을 잘 참고 읽어주셔서 'ㅋㅅ'합니다. 간단히 끝내려고 했는데 위에 언급한 '이빨꾼' 문인들 때문에 엄청 길어졌습니다. 저분들의 야사는 이 말고도 무지 많습니다. 기사를 쓰다가 기회가 되면 또 '썰'을 풀어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