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장 등 지방선거 당선자들이 지난 7월 1일 취임 이후 각 지역에 있는 향교에서 향후 4년간 소임을 다할 것을 다짐하는 고유제(告由祭) 행사를 갖고 있다. 기관장들이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다. 예로부터 취임한 고을 수령은 향교에서 공자 등 성현들께 제를 올리며 선정을 다짐했다.
향교에서는 고유제 말고도 성년식도 하고, 시제(時祭·시절 제례)도 지낸다. 교육기관이기도 하다. 경남 진주나 인근 산청, 사천에만 가도 향교와 서원이 더러 있다. 향교는 무엇을 하는 곳이고, 서원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은 크게 ▲유교의 총본산인 성균관(成均館) ▲지방 유교의 본산인 향교(鄕校) ▲사설 유교기관인 서원(書院) 등 3개가 있다.
성균관과 향교에는 공자 등 성현(聖賢)을 모신 유교 사당 '문묘(文廟·공자 모시는 사당)'와 유학을 가르치는 '명륜당(明倫堂)'이 있다. 또한 서원에는 선현의 위패(位牌·돌아가신 조상 이름)를 모신 '사우(祠宇)'와 청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가 있다. 3곳 모두 제례와 교육을 함께했다.
이 말고도 지금의 사립 초등학교 역할을 한 서당(書堂)이 있다. 유학에 바탕을 둔 한문을 가르쳤다.
교육의 단계는 대체로 서당을 거쳐 서원, 향교, 사부학당, 성균관에 진학했다.
▶성균관
성균관은 명실공히 조선의 고등 교육기관이자 최고학부다. 지금으로 보면 국내 최고의 국립대인 서울대다.
성균관은 일제강점기에 잠시 문을 닫았다가 광복 해인 1945년 근대 교육기관인 명륜전문학교로 부활했다. 이어 구한말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김창숙 선생이 전국유림대회를 열어 김구를 위원장으로 '성균관대학 기성회'를 조직했고, 명륜전문학교를 재단법인 성균관대로 이름을 바꿔 설립했다.
이듬해인 1946년 성균관대로 인가를 받았고, 김창숙 선생이 초대 총장 및 성균관장에 취임했다. 1953년에는 종합대인 성균관대로 승격됐다.
성균관대가 최근 들어 학교 홍보로 건학 600년을 내세우는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서울대는 1924년 일제가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을 이어 1946년에 개교했다. 이렇게 보면 서울대와 성균관대가 같은 해에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인가를 받은 셈이다.
참고로 국내 주요 대학의 연역을 보면 근대의 '3대 명문 사학'은 보성전문(고려대·1905년 개교), 혜화전문(동국대·1906년), 연희전문(연세대·1915년)이다. 명륜전문은 이들 3대 사학에 조금 밀렸다.
▶향교
향교는 고려시대 인조 때 처음 세워져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진 지방 관립(官立) 교육기관이다. 한양(서울)의 성균관보다는 작지만 이곳에도 성균관처럼 대성전과 명륜당 등 두 개의 재(齋)를 갖추고 있다.
향교는 부·목·군·현에 하나씩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요즘으로 보면 창원대과 같은 지방의 국공립대학이나 경상국립대와 같은 지방 거점국립대학이 이에 해당된다.
한양에도 향교와 등급이 비슷한 사부학당(四部學堂)이 있었다. 한양 땅에 동부학당, 서부학당, 남부학당, 중부학당이 있었고, 중등 정도의 교육을 했다. 향교보다 더 선호했다.
향교의 유생 수는 각 지방의 자금력에 따라 정했다. 즉 가장 등급이 높은 지방 조직인 유도부(留都府)에는 50명, 목(牧)·도호부(都護府)는 40명, 군(郡)은 30명, 현(縣)에는 15명 등이다.
향교는 지금의 광역시장·도지사 격인 관찰사의 감독을 받았다.
관찰사에게 학전(學田·학교 논밭), 노비를 지급했다. 도진(渡津·나루), 어장, 산림의 권리도 주었다. 관찰사, 수령, 유림(儒林) 등이 향교 설립과 유지, 선비 양성 자금(토지·돈·곡식)을 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 향교의 폐해가 극심해지면서 재산 관리도 극도로 문란해져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어 임진왜란과 병잘호란, 병란(兵亂·나라 안에서 싸움질 하는 난리)을 겪었으면서 향교는 극도로 황폐화 됐다.
경북 안동에 기반을 둔 퇴계 이황이 임금에게 “대저((大抵·대체로 보아) 군·현의 향교는 곧 헛되이 문구(文具)를 설립하고, 교육은 바야흐로 크게 파괴되었다. 선비들은 향교에서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 하고 있다”고 했다.
율곡 이이는 선조에게 글을 올려 향교의 폐해와 진흥책을 논했다. 유생들은 개인의 재산을 출원해 경영하는 사람도 있어 조정에서 상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폐해는 고쳐지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서원이 발흥하면서 향교는 조선 중기에는 유생들의 모임 장소로 전락하고 교육기관 역할은 명맥만 유지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문묘의 제사인 석전(釋奠·공자를 모시는 제례)을 활발히 했고, 향음주례(鄕飮酒禮), 향사례(鄕射禮)를 담당 하면서 유교 기풍을 이었다.
융희(隆熙) 4년(1910년)에는 향교 재산관리 규정을 설치, 관찰사의 감독 아래에 부윤, 군수가 관리했다.
▶서원
조선 중기 이후 향교가 쇠퇴하면서 지역에 기반을 둔 서원이 발달했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유교의 성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설립한 사설교육기관이다. 오늘의 지방 사립대학이다. 서원의 등장은 중종 때 지방에서 은거하던 '사림파'가 주도권을 잡으면서다. 이른바 지방세력이다.
서원이 처음 설립된 것은 1542년, 경북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고려의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추모하기 위해 그가 학문을 하던 이곳에 서원을 설립했다. 안향은 중국의 주자학을 처음 도입해 한국 '성리학의 시조'라고 불린다.
처음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칭했지만 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이 서원에 국가의 지원을 건의했고, 이에 명종이 서적 등과 함께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사액(賜額)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사액이란 임금이 사당, 서원, 누문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이다.
이황을 등 성리학자들에 의해 서원 설립운동이 일면서 전국에 서원이 건립됐다. 명종 때에 17개에 불과했던 서원이 선조 때는 100개가 넘었고, 18세기 중반에는 전국에 700여개에 이르렀다.
앞에서 언급 했지만 서원의 건물은 크게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로 나뉜다.
서원에서 가르치는 장을 훈장(訓長)이라 하고, 학생회장을 장의(掌議)라 했다. 장의는 제자 중 최선임인 대제자이면서 문도의 상벌을 담당하는 상벌위원장 역할을 했다.
서원이 설립되던 초기에는 당시의 향교와 달리 순기능이 컸다. 국가 교육기관인 향교가 있었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17세기 이후 서원이 난립하면서 세가 약해져 관리가 제대로 안 돼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원에는 긍정적인 면과 달리 다른 큰 맹점이 있었다.
서원에 딸린 토지에는 세금이 부과 되지 않았고, 서원의 노비는 국역(國役)을 지지 않았다. 서원이 증가하면서 국가 재정에 문제가 생겼다.
심지어 산 사람을 모시거나 성현도 아닌 자신의 조상을 모시기 위한 집안 서원을 만들었다. 조상 한 사람을 모시는 서원이 5~6곳에 이르는 등 매우 문란해졌다.
19세기에 들어서는 세도가문들이 권력을 좌지우지하면서 서원의 정치적 영향력은 사실상 사라졌지만 각 지방에선 터줏대감으로 떵떵거리며 지냈다.
이들은 선현의 제사를 지낸다는 명목으로 농민들을 사사로이 수탈했으며, 반발하면 향약(조선시대 마을 자치규약)이나 반상(班常·양반과 상놈)의 도리를 어겼다며 처벌하거나 지역 사회에서 매장시키는 전횡을 저질렀다. 나라에서 막대한 식량과 노비를 받으면서 세금을 내지 않는 특권이 있어 국가 재정을 악화시켰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을 보낸 만력제(萬曆帝·중국 명나라의 제13대 황제)를 제사 지내기 위한 충북 제천의 만동묘(萬東廟)와 같은 곳에 송시열을 모신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은 워낙 힘이 세 백성들에게 서원의 제례비를 부담시켰으며 할당된 비용을 내지 못한 백성들을 고문하는 등 그 폐해가 막심했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상(삼정승), 삼상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퍼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서원의 폐단은 지방의 사림 토호였던 안동 김씨들도 동의할 정도로 심각했다.
이러한 서원의 폐단을 처음 손을 댄 것은 숙종이었다.
다만 숙종은 한 사람을 중복으로 모시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고, 그의 아들 영조 대에서야 서원 정리가 본격화 됐다.
1727년(영조 3년) 12월 한 사람 당 하나의 서원만 허가 하면서 정리를 했으며 1747년 4월(영조 23년)에도 사적으로 세운 서원들도 없앴다.
고종 때는 그의 부친 흥선대원군의 섭정(1864~1873년)으로 서원 정리는 급속도로 빨라졌다.
서원의 원장을 고을 수령이 맡고 허용 정원 외의 군역 기피자는 전부 군역에 넣는가 하면 면세 혜택을 모두 없앴다. 사액서원이라도 문제가 있다면 철폐하라는 명이 내려졌고 사액서원도 47개만 남기고 전국의 모든 서원을 철폐했다. 이 당시 서원은 1000여 곳이 넘었으며 안동에만 40여 개의 서원이 있었다.
야사에는 유생들의 반대가 극렬했다고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매우 조용했다고 적고 있다.
이와 관련해 흥선대원군은 "오늘날 성현의 이름을 팔아 사람들을 못살게 하는 도적들의 소굴이 된지 오래 됐으니 어찌 놔둘 수 있겠는가?"라면서 서원 철폐를 단행했고, 고종은 당시의 영의정인 김병학에게 ▲ 서원이 온통 백성을 괴롭히니 이것이 무슨 행각인가 ▲집집마다 서원을 만들고 한 사람을 대여섯 곳에서 모시는 이유는 무엇이냐 ▲제현을 존중한다면서 자기 가문 조상을 모시는 게 서원이더냐? 산 사람을 모시는 사당은 또 무엇이냐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 유생들은 반박할 수 없었다. 서원을 모두 없애는 것도 아니어서 성현을 모욕한다는 주장도 궁색했다.
다만 대원군이 쫓겨난 후 상소가 쏟아졌고 화양동서원 등 상징적인 서원들의 복구 요구에 고종은 만동묘 복구만 받아들이고 이도 관아의 통제 하에 두었다.
고종은 "정녕 책을 읽고 싶다면 향교 가서 읽어라. 향교는 왜 있느냐"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고종은 서원을 철폐하면서 "붕당(朋黨·노론·소론 등 이념과 이해에 따라 이루어진 사림의 집단)의 온상"이라고 말했다.
이후 서원은 일제강점기 때 지역의 유림들이 복원하기도 했으나 일제가 강제로 철폐한 것도 있었고, 한국전쟁 때는 상당수가 파괴됐다.
현재 남은 서원은 남한에 36곳, 북한에 11곳이다. 진주성 안의 청계서원 등 한국전쟁 이후 지역 유림들이 일부 복원한 서원들이 있긴 하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서원과 관련해 논해 보면 조선 중후의 붕당(朋黨)정치 한 축인 '사림파(士林派)'와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지방중심 세력'에 접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림은 선비 사(士), 수풀 림(林)자를 쓰며, 속세(권력욕, 출세욕 등)에서 벗어난 이미지를 상징한다.
벼슬을 버리고 지방(특히 안동 등 경상도)에서 기거하던 토호인 사림과 지방시대를 내세우며 세종시에 정부 부처를 옮기고 각 지역에 혁신 및 기업도시를 만든 노무현 정권 간의 연결고리를 말함이다.
결국 이들도 관료 조직으로 권력화 되면서 권력과 돈을 한꺼번에 탐하며 몰락하고 만다.
어찌보면 사림파가 청렴한 듯 하지만 조건의 건국을 반대했던 고려 후기의 길재·정몽주 등의 지조를 중히 여기고, 향촌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그 지위를 유지해온 세력화 된 관료조직이다. 사림은 성리학을 중히 여겨 기본적으로 '왕이 도덕으로 다스린다'는 왕도 정치를 기본적으로 삼았다. 이 왕도정치 실현을 두고 붕당이 형성됐다. 좌파 정권이 중국을 사대하는 것이 중국 중심의 성리학과 연관돼 있다면 과한 분석일까?
또다른 흥미로움은 서당의 철폐가 조선 초기 시작된 '숭유억불 정책'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는 점이다. 조선 말기 서원의 폐단은 고려 말기 불교의 폐단을 그대로 답습했고, 이를 척결하고자 하는 의지 또한 반복됐다.
너무나 상식적인, '역사는 돌고서 돌아 다시 지금에 발현한다는 것'. 좌파 정권은 이를 깊히 학습을 했다면 우연일까 싶다.
한편 '한국의 서원'은 2019년 7월 6일 대한민국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한국의 서원이 지역 문화의 거점이자 지역 성현을 배향 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과거시험 준비 기관에 그친 중국 서원과 다르고, 이 점이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주요 등재 서원은 돈암서원(충남 논산시), 무성서원(전북 정읍시), 필암서원(전남 장성군), 남계서원(경남 함양군), 도동서원(대구시 달성군), 옥산서원(경북 경주시), 병산서원(경북 안동시), 도산서원(경북 안동시), 소수서원(경북 영주시) 등이다.
▶서당
조선시대의 사립 초등 교육기관이다. 주로 유학에 바탕을 둔 한문 교육이 이루어졌다.
비슷한 교육기관으로는 고구려 때 ‘경당’이란 교육기관이 있었고, 고려 때도 마을마다 서당과 비슷한 학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학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전국 곳곳에 서당이 생겨났다.
서당은 나라에서 세운 지방의 공립 학교인 향교나 사림파들이 세운 서원처럼 일정한 조건이나 규정이 없어 자유롭게 세워지고 또 없어졌다. 마을에서 훈장을 모셔와 서당을 차리는 경우도 있었고, 양반 유학자가 자기 집에 서당을 차려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상민들도 자식들을 공부시키려 해 수요가 늘었고, 몰락한 양반도 많아져 이들이 생계를 위해 서당을 차리면서 서당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학부모들은 봄과 가을에 곡식을 거둬 서당의 선생님인 훈장에게 수업료로 냈다.
대체로 7~16세가 가장 많았다. 주로 '천자문'을 통해 한자의 음과 뜻을 익힌 후에 '명심보감', '격몽요결' 등을 통해 짧은 문장을 외우고 교훈적인 내용을 익혔다.
한 권을 다 외우고 이해하면 훈장에게 떡과 음식을 준비해 ‘책거리(책씻이)’를 하고 다음 책으로 넘어갔다.
이후 '십팔사략'이나 '자치통감'과 같은 역사책을 읽고 '소학'을 통해 유학의 기본을 공부한 뒤 본격적으로 유교 경전인 '사서삼경'으로 넘어갔다. 이 때쯤이면 서당을 벗어나 향교나 서원, 혹은 과거를 거쳐 성균관으로 옮긴다.
서당은 서양식 근대 학교가 세워진 후에도 유지됐으나 그 명맥이 거의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