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경남뉴스는 부·울·경 곳곳에서 역사의 켜를 지니고 있는 문화재를 찾아 그 흔적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소개합니다. 많은 애독을 바랍니다. 편집자 주
첫걸음으로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의 흔적이 배어 있는 진주성 내 창렬사를 찾았습니다.
창렬사(彰烈祠)는 1593년 7만 민관군(民官軍)이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선인들의 신위(神位)를 모신 사당입니다.
조선 중기 경상도관찰사였던 정사호가 진주에 부임한 뒤 건립해 1607년(선조 40년) 사액(賜額·임금이 사당·서원·누문 등에 이름을 지어 새긴 액자를 내림)한 곳이지요.
지난 1983년 7월 경남도의 문화재자료로 '창열사'로 지정됐다가 2018년 12월 '창렬사'로 바뀌었다고 하네요.
이곳에는 맨 위에 모신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비롯 진주목사 서예원, 창의사 김천일, 충청도 병마사 황진, 경상우도 병마사 최경회 등 임진왜란 때 순절한 39인의 신위를 모시고 있습니다.
매년 음력 3월 초정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
건물로는 충렬사를 들어서면 외삼문인 유중문, 내삼문인 전파문이 있고 내부에는 위패가 모셔진 정사인 창렬사가 있습니다. 창렬사 좌우에는 한 채의 건물이 자리합니다.
또 근자에 순국 선인들을 기리는 기념석도 세워졌습니다.
순국 선인들을 기리는 기념 비석과 함께 창렬사 건물을 바라보고 서면 오른쪽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통령 권한대행 때 세운 '제장군졸지위(諸將軍卒之位)'라는 비석이 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이 "장군의 신위 뿐 아니라 이름없이 숨져간 장졸들의 혼도 위로해야 한다"며 순국한 여러 장군과 병사를 함께 모신 비석입니다.
창렬사는 지금껏 관리를 하는 문중이 없어 진주시에서 한해 한번씩 지내는 제향 외에는 제사도 잘 지내지 않아 쇠락 우려가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쇠락해 안타깝기 그지 없다'는 내용이 있다고 하네요.
항일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던 진주 대아고 박종한 전 교장의 뜻에 따라 대아고 학생들이 청소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위패 옆에 대아고 학교 깃발이 있어 왜 그런가 했더니 속깊은 뜻이 있군요.
흥미롭지만 비감한 내용도 전합니다. 다음은 내용입니다.
1747년 영조 23년 1월 26일 진주 경상우병영에서 조정에 '진주 사람이 남강 가에서 주웠다'라며 도장 한 개를 올렸다. 이 도장은 당시부터 154년 전인 1593년 최경회 장군이 소지하고 있다가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조는 이 도장을 창열사에 두고 제를 올리라고 명하고, 도장갑을 만들어 그 위에 글을 지어 새기도록 했다.
追憶往事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百有餘年 1년여 년이 지났네.
幸得南江 다행히 남강에서 주웠던 도장에
印篆宛然 새겨진 전자가 완연하니,
矗石閫義烈 촉석루에서의 뛰어난 의열
想像愴先 상상하니 먼저 서글퍼지네.
命留嶺閫 영남의 병영에 보관토록 하여
以竪忠焉 충절을 기리게 하노라
최경회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남 금산과 전북 무주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자 진주성에 와 임진왜란 3대 대첩인 진주대첩(진주성 1차 전투)을 도왔습니다. 조정은 이 공적을 높이 사 최경회 장군을 경상우병사에 임명합니다.
최경회 장군은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가 발발하자 3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진주성 에서 항쟁했으나 성은 함락됐고, 남강에 투신해 자결하게 됩니다.
여기서 조금 더 알아야 할 이야기가 있네요.
의암으로 상징되는 논개가 최경회 장군의 기생첩이었다는 주장에 논란이 있습니다.
일설에서 최경회 장군과 논개를 엮는 것은 1987년 최경회 장군의 집안인 해주 최 씨의 가문에서 발간한 '의일휴당실기(日休堂實記)'에서 최경회 장군의 부인이 왜장을 유인해서 자살했다고 묘사한 것이 시발이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또 드라마 등에선 논개가 최경회 장군의 첩이었는데 전사한 최경회 장군의 복수를 위해 기생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들 주장은 논개의 실존설 논란이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한편 최근 들어 창렬사를 다시 조명하자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진주문화원은 지난 5일 진주에서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경남·전남 20여 지자체 문화원과 함께 1차 진주성 전투인 진주대첩(1592년)과 2차 진주성 전투인 계사년 전투(1593년)로 순절한 김시민 장군을 비롯한 당시 7만 민관군의 충절을 선양하고 계승하기 위한 행사를 가졌습니다. 각 지역에서 사는 후손들도 참석했습니다.
많이 늦었지요.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창렬사 제향을 국가 주관 제향으로 승격하기 위한 토론이 심도있게 진행됐습니다.
국가가 사적(史蹟)으로 지정해 국가급 제향을 올리는 충남 금산 칠백의총 종용사와 전남 남원 만인의총 충렬사와 비교해 전혀 손색이 없다는데 인식을 같이했습니다. 현재 창렬사 신위 제향은 진주시 주관으로 하고 있습니다.
김길수 진주문화원장은 이 자리에서 "창렬사는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사당으로 대원군이 전국의 사원을 헐어치울 때도 보존된 역사적 가치가 충분한 사당이다. 조정에서도 배향 인물들의 충정을 인정한 기록도 있다"며 "국가에서 사적으로 지정해 제향을 하는게 맞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이 서원의 심각한 폐해를 없애기 위해 서원 철폐령을 내리면서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가 철폐되자 화를 면한 이곳에 모시게 됐다고 하네요.
경상국립대 강신웅 명예교수도 "국가제향 승격의 핵심 요소는 의총 건립이다. 무덤이나 의총이 건립돼야만 제향의 효과가 나타난다. 영호남의 흙과 당시 전투에 사용했던 무기 등을 한데 모아 7만의총을 건립해야 한다. 우선 가묘라도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향후 국가 제향으로 승격될 지 진주시를 포함한 기관, 단체들의 행보가 주목됩니다. 실제 기자가 지난 10월 말 진주유등축제 때 창렬사를 찾았을 때도 방문객이 많지 않아 썰렁해보였습니다.
1차 진주성 전투는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경남 통영 한산도)의 과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경기 고양시 한강변)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입니다. 진주대첩은 부산항에 상륙해 서진 하던 왜군이 마지막 점령지로 생각했던 곡창 호남을 막아낸 길목 전투여서 순국 선열의 전사는 큰 의미를 갖습니다.
이러한 역사 현장에서 나라를 지키다가 순절한 신위를 모신 곳을 국가제향으로 승격시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 창렬사에 배향된 신위
▶정사(正祠·창렬사) 배향/ 7위
- 충무공 김시민/ 증(贈) 영의정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수경상우도병마절도사
- 문열공 김천일/ 증영의정 행창의사
- 무민공 황진/ 증좌찬성 행충청병마절도사
- 충의공 최경회/ 증좌찬성 행경상우도충병마절도사
- 충의공 장윤/ 증좌찬성 행진주목사
- 효열공 고종후/ 증이조판서 행임피현감 복수의병장
- 진주목사 서예원/ 선무 원종 1등 공신(宣武原從功臣) 병조 참의(贈兵曹參議) 추증, 고종 때 진주의 창렬사에 제향
- 유복립/ 증이조참판 종부시주부
▶동사(東祠)/ 15위
- 양산숙/ 증승지 창의사 종사관
- 김상건/ 증참의(김천일의 아들)
- 김준민/ 증병조참판 행거제부사
- 강희열/ 증병조참의 분의의병장
- 조경형/ 증병조참의 행진해현감
- 최기필/ 증병조참의 행판관
- 유함/ 증주부 의병장
- 이욱/ 증호조좌랑 성균생원
- 강희복/ 증호조좌랑 의병장
- 장윤현/ 증호조좌랑 행수문장
- 박승남/ 증병조참의 행판관
- 하계선/ 증호조좌랑
- 최언량/ 증호조좌랑
- 주몽룡/ 증형조판서 금산군수 증시 무열
- 주대청/ 증도총관 가배량권관(加背梁權管)
▶서사(西祠)/ 17위
- 이잠/ 증병조참의 적개의병장
- 성영달/ 증병조참의 행우병마우후
- 이종인/ 증병조참판 행김해부사
- 윤사복/ 증병조참의 행첨정
- 이인민/ 증호조좌랑 증시무용
- 손승선/ 증호조좌랑 의병장
- 정유경/ 증군자감정 행주부
- 김태백/ 증좌승지행 수문장
- 양제/ 증호조좌랑 행선무랑
- 박안도/ 증호조좌랑
- 이의정/ 증병조참의 행보령현감
- 김개/ 증도총관 행부장
- 송건도/ 증사복
- 정재보/ 증예조정랑
- 박세항/ 선무원종공신 수문장
- 송제/ 증호조참의 군수
- 김덕련/ 김개의 손자
- 칠만민관군/ 신위(神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