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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흔적] '진주재판소'로 출발한 '창원지방법원'의 어제와 오늘

정기홍 기자 승인 2023.09.03 22:01 | 최종 수정 2023.09.04 12:59 의견 0

더경남뉴스가 '창간 기획 2탄'으로 경남을 비롯한 부·울·경의 기록물을 찾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분야별 흔적을 소개합니다. 평소 지나쳤던 작은 역사도 끄집어내 탄성을 자아내도록 하겠습니다. 학생들에겐 흥미로운 학습거리도 될 듯합니다.

경남 창원시 성산구 창이대로(사파동)에 있는 창원지방법원 건물 전경. 창원지법 제공

창원지법은 경남 창원시 성산구 창이대로 681(사파동)에 있는 지방법원입니다. 창원지법에는 부산고등법원의 원외재판부도 들어와 있습니다. 경남에는 고등법원이 없어 늘어나는 소송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원지법은 지금으로부터 128년 전인 1895년 5월 15일 진주에서 개소한 진주재판소가 뿌리입니다.

진주는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경남의 행정 중심지로 관찰사(도청) 등 경남의 행정 기관이 모여 있었습니다. 관찰사는 고종이 1896년 전국 행정구역을 13개 도로 바꾸면서 경상도가 경남과 경북으로 분할됐지요. 그해부터 경술국치인 1910년까지 15년간 13명의 관찰사가 거쳤습니다.

경남도기록원 제공

진주재판소는 당시 '법률 제1호'(1895년 3월 25일), '칙령 제114호'(1895년 5월 10일)에 따라 문을 열었습니다. 칙령(勅令)은 '임금의 명령'입니다.

진주재판소는 이듬해인 1896년 8월 15일 칠령(제55호)로 경남도재판소로 이름을 바꿔달았습니다.

이어 진주에서의 재판소 역사는 ▲1908년 8월 1일 진주지방재판소(법률 제10호, 법부령 제11호) ▲1909년 3월 1일 진주지방재판소 진남구(통영)재판소 설치(법부고시 제13호) ▲1909년 3월 8일 진주지방재판소 마산구재판소 설치(법부고시 제16호) ▲1909년 3월 26일 진주지방재판소 거창구재판소 설치(법부고시 제19호) ▲1909년 10월 20일 진주지방재판소 밀양구재판소 설치(법부고시 제26호) 등을 담고 있습니다.

진주, 즉 경남에서의 도 단위의 재판소 역할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진주지방재판소(전신은 진주재판소)는 1909년 11월 1일 폐지되고, 부산지방재판소 진주구 재판소로 지위가 낮아집니다. '통감부령 제28호'에 따른 조치였지요. 일제(일본제국)는 이때부터 대부분의 도 행정기관을 약탈한 물자를 일본으로 가져가는데 지리적으로 도움이 되는 부산으로 옮깁니다. '진주를 버리고 부산을 선택'한 것이지요. 지금까지 진주의 쇠퇴는 일제 때문이지요.

여기서 알고 가야 이 기사 내용을 더 일목요연하게 이해합니다.

위에서 나오는 '통감부령'은 통감부() 1906년 2월 설치되어 1910년 8월 주권의 상실과 더불어 조선총독부가 설치될 때까지 4년 6개월 동안 한국의 국정 전반을 사실상 장악했던 식민 통치 준비기구이다.

'통감부(統監府·Resident-General)'는 '한국통감부'를 줄인 것입니다. 일제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뒤 대한제국 한성부(서울)에 설치했던 행정·정치·군사 업무를 장악하던 관청입니다. 형태는 대한제국에 자문 또는 섭정을 하는 형식이었지요. 통감부는 한국 정부 조직에 속한 행정기구는 아니고 외부 조직으로서 한국 정치에 간섭하고 감독하는 우월적 기구였습니다.

이 말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란 게 있는데 일제가 경술국치일(한일합방·1910년 8월 29일)~해방 직후(1945년 9월 2일)까지 한반도 통치를 위해 운영하던 직속기관입니다. 당시 경기도경성부(서울시)의 경복궁에 설치했습니다.

다시 재판소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경남도를 관장하던 재판소가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겨간 이후 흔적 이야기입니다.

부산으로 옮겨간 도급 재판소는 1912년 4월 1일 부산지방재판소를 부산지방법원으로, 각 구의 재판소를 지청으로 바꿉니다. '총독부령 제26호'에 따른 조치입니다.

이어 해방(1945년 8월 15일) 이후 1947년 1월 1일 부산지방심리원으로 개칭합니다. 여기서 무슨 뜬금없이 심리란 단어로 바꿨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마음상태를 뜻하는 '심리(心理)'가 아닌 법원이 증거, 방법을 심사하는 '심리(審理)'란 재판 용어입니다.

그해에 각 지청을 지원으로, 출장소를 등기소로 명칭을 바꿉니다. '사법부장통첩 제258호'에 따른 것입니다.

해방 다음 해인 1948년 6월 1일엔 '과도정부령 제192호'를 발령해 명칭을 바꾸는데 이게 지금 사용하는 '부산지방법원'이 됩니다. 눈에 귀에 익은 명칭입니다.

마산, 즉 지금의 창원으로 옮긴 것은 40년 전인 1983년 9월 1일입니다.

'법률 제3655호'(1983년 5월 21일)에 따라 마산지방법원으로 개칭됩니다. 그해 9월 1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을 마산지방법원으로 승격한 것이비니다.

이어 마산과 창원, 진해가 통합되면서 1992년 5월 1일 창원지방법원(법률 제4409호)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 부지로 옮깁니다.

창원지법의 재판이 많아지면서 2011년 3월 1일 창원지법 아래 마산지원(법률 제8318호)을 개원합니다.

창원지법원장은 지금까지 32대째입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사항은 진주지원 등 각 지원의 등기 부서(등기과, 등기계)가 아닌 김해 등 개별 등기소의 소속은 창원지방법원 본원입니다.

또 진해등기소와 마산지원 등기계는 상업등기, 선박등기, 동산·채권담보등기를 담당하지 않으며 창원지법 본원의 등기과에서 담당합니다.

양산시는 부산지법 울산지원 소속이었으나 울산지원 울산지법으로 승격되면서 울산지법에 속합니다. 같은 경남 지방인 창원지법 소속이 아니란 말입니다.

창원지법과 관련한 판결 여담도 있네요.

지금은 대구지법 부장판사인 천종호 당시 부산가정법원 부장판사의 발언인데, 학교폭력 가해자 측이 "한 번만 용서해 달라. 다시는 안 하겠다"고 선처를 호소하자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안 돼, 안 바꿔 줘. 바꿀 생각 없어. 빨리 돌아가!"라고 했던 말입니다.

이는 지난 2013년 1월 13일 SBS 스페셜 '학교의 눈물' 편에서 방영돼 많이 알려졌습니다. 같은 해 3월에는 KBS 2TV '이야기 쇼 두드림'에서도 천 판사의 이 이야기가 소개됐습니다. '학교의 눈물'은 창원지법에서 만들었다고 하네요.

천 판사는 2010년 2월 창원지방법원 소년부에 부임해 3년간 근무하다가 2013년 2월 부산가정법원으로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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