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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기획] '3대 재벌 탄생지, 지수 승산을 가다'-승산마을의 유래와 변천사(2-2)

정창현 기자 승인 2022.03.11 05:37 | 최종 수정 2022.06.26 12:32 의견 0

더경남뉴스의 창간기획 연재물인 '지수 승산을 가다'는 '마을 산세와 지세'를 소개한 데 이어 이번에는 '승산마을의 유래와 변천사'를 알아봅니다. 승산마을의 이병욱 전 이장(79)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 연재 순서

※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

1. 들어가는 글

2. 승산마을의 산세와 지세

3. 승산마을의 유래와 변천사

4. 승산의 '터줏대감' 허 씨 가문-'허 씨 사돈' 구 씨 가문(예정 글)

■ 승산마을의 유래와 변천사

▶ 아랫마을 윗마을, 허 씨-구 씨는 사돈지간

앞에서 잠깐 언급을 했지만 승산마을 탐방에 앞서 지수면의 명칭을 알아보자. 지수(知水)는 물을 안다는 뜻이고, 물을 아는 것은 치수(治水)를 한다는 말이다. 또한 승산(勝山)은 산을 이긴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수가 품고 있는 승산마을은 물을 다스리고 산의 센 기를 다루는 지형이란 뜻이 아닌가?

승산마을은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실개천(승산천)을 경계로 마을 뒷산 쪽이 상동(윗마을), 지수천 쪽이 하동(아랫마을)로 나뉜다. 법정마을은 아니고 오래 전부터 마을 사람들이 써왔던 자연마을 이름이다. 예전에는 상리, 하리로 불렀다고 한다. 상동은 자연부락인 숲안과 허실마을로 이뤄져 있다.

드론으로 찍은 승산마을 전경. 왼쪽이 남해안고속도로이고, 오른쪽 위 넓은 들이 압사리이다. 승산리보다 훨씬 넓다. 진주시 제공

상동에는 구씨 가문이 중심이 돼 살았고, 하동에는 허 씨의 가문이 자리를 잡아 문중의 번성을 이뤘다. 지금은 두 가문의 재실 등 몇몇 한옥집이 섞여 있어 정확히 구분하려고 하면 머리가 묵직해진다.

구 씨 가문이 모여 산 상동에는 학문(學問)이 강해 벼슬하는 사람이 많았고, 허 씨 가문이 사는 하동에는 재물(財物)이 성해 부자가 많이 나왔다. 학문을 중시하던 당시에는 “허가네 열 사람이 구가네 한 사람을 못 당한다”는 얘기도 있었다고 한다.

상동의 구 씨 문중은 이런 연유로 청렴결백했고 주로 벼슬을 많이 했던 반면, 하동의 하 씨 문중에서는 재산을 크게 일군 사람이 많았다는 말이다. 구 씨 집안이 락희화학공업과 금성사(지금의 LG)를 창업할 때 허 씨 집안에서 사업 자금을 댄 것과 일맥상통한다. 아무튼 이런 말을 접하면서, 청렴한 구 씨 집안에서 기업을 일구려고 했던 것도 특별해 보인다.

승산마을 안내도. 승산마을 근처 3곳에 세워져 있다. 정창현 기자

옛날 승산마을 주민들의 생활권은 의령군 쪽에 위치한 인근 덕암까지였다. 덕암에는 승산장이 섰는데 이 장터가 지금의 위치로는 청담리다. 옛날 승산장에서는 소와 돼지, 닭 등 축산물과 땔감인 장작 등이 주로 거래됐다고 한다.

지도에서 왼쪽이 압사리, 윗쪽이 청담리이다. 네이버 위성지도 캡처

마을 사람들은 호롱불을 쓰던 시절인 1929년에 승산마을에 전기를 끌어오고, 1930년대 초에 금융조합을 설립할 정도로 현대 문물을 앞장서서 끌어와 이용했다.

전기는 인근의 중심도시인 진주에 전기가 처음 공급될 때 같이 들어왔다. 지금은 없어진 마산시(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운동에 있던 마산화력발전소에서 진주로 전기를 공급할 때 지수에 변전소가 세워져 어렵지 않게 전기를 끌어들일 수 있었다.

문명의 이기인 전기가 들어오자 마을에 점빵(가게) 등이 생기면서 지역의 상업 중심지 역할을 했다. 지금의 진주농협 지수지소 건물 앞에는 제법 근사한 경일여관도 있어 여관업과 식당을 함께 했다고 전해진다.

되돌아보면 아쉬운 것이 더 많다.

일제강점기에 철도를 놓을 때 승산마을 근처를 지나게 하려고 했으나 마을 주민들이 못 들어오게 막아 아쉽게 느껴졌다. 당시 마을에 철도가 들어온다고 하자 마을 주민들이 조선총독부의 책임자를 불러 막아 인근 반성면 쪽으로 방향을 틀게 했다고 한다.

당시 권문세가가 있는 전국의 대부분 고을은 철도가 마을로 들어오거나 지나는 것을 결사 반대했다. 상투를 자르는 것을 목숨과 바꾸었던 시절과 비슷한 경우이다.

이어 1970년대 들어서 승산마을 앞에는 근·현대식 상가들이 더 많이 생겼고, 지금도 번잡하지는 않지만 작으나마 면소재지로서의 옛 명성을 잇고 있다.

남해고속도로와 전남~부산 간 고속국도가 지수면 중앙(승산마을 앞)을 관통하고 있어 지수 나들목(IC)을 이용해 마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승산마을에서 승용차로 함안은 10분, 진주 20분, 창원은 30분 걸린다. 작은 지방도(1037번)는 진주시 사봉면과 의령군 화정면을 이어준다.

▶ 현대화 속의 주요 건물들

앞에서 언급한 고택이 많은 상동, 하동 말고 도로 쪽에 행정기관 등 공공 건물들이 있다.

도로를 기준으로 승산마을 쪽에 지수면사무소가 있고, 고속도로 쪽 길 건너편에는 지수파출소, 지수보건지소, 지수우체국, 진주농협 지수지소 등이 한곳에 모여 있다. 이들 건물 옆에 유명한 지수초등학교(인근 송정초교와 통합돼 학교명은 지수초교로 사용)가 자리한다.

폐교된 지수초교 전경. 정창현 기자

지수중학교는 면사무소에서 지수 나들목(IC) 쪽으로 가다가 용봉로로 꺾으면 도로 바로 왼쪽에 있다. 지수중학교는 지수초교의 명성에 가려서인지 관심이 덜한 편이다.

지수면사무소 건물. 정창현 기자
지수파출소 건물. 정창현 기자
승산리에 있는 지수우체국 건물. 정창현 기자

주민들의 쉼터도 마련해 놓고 있다.

효주원 옆에 있는 주황색 벽돌로 잘 지어진 마을회관이 있어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한다. 허씨 가문에서 지어준 것이다.

마을회관은 본래 상동과 하동에 하나씩 있었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마을회관 건물을 크게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유는 마을에 큰 일이 있을 땐 대궐 같은 허 씨와 구 씨 집안에서 모여 의논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허 씨 집안의 고택 대청마루는 연극 공연을 했을 정도로 넓다.

지수카페

공공 건물들이 있는 '번화가'의 골목길로 들어서면 이용원과 정미소가 있어 추억거리를 선물한다. 물론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다.

이날 찾은 신신이용원은 다행히 여러 사진거리를 제공했다. 동행한 승산마을 이 전 이장은 "40~50년에 이발하던 내부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전했다. 마을 주민들이 틈틈이 청소 등 관리를 하는지 정돈이 돼 있었다.

이들 추억물은 마을 사람들이 그대로 두고 마을 자산으로 삼자고 결정했다고 한다. 현명하고 고마운 결정을 해주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 공간에서 싣지 못한 관련 사진들은 본지 사진·영상 카테로리에 있는 '읍내 사진관'에서 듬뿍 올릴 예정이다.

승산리에 있는 신신이용원. 영업은 하지 않는다. 정창현 기자
깔끔하게 정돈된 신신이용원 내부. 흰 가운이 눈에 들어온다. 정창현 기자
신신이용원 내부. 옛날식 세면대, 바리깡 넣는 통 등이 지난 세월을 머금고 있다. 시계추는 언제 멈춰섰을까? 정창현 기자

지수초교 길 건너편에는 옛날 운영했던 정미소 건물도 보였다. 하지만 샌드위치패널로 입구를 막아놓아 큰 창고처럼 방치돼 있었다. 지나던 한 주민은 "옛날에 쓰던 기계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며 귀띔을 해주었다.

옛날 정미소의 정취를 조금은 알고 있는 기자로서는 방문객들에게 눈요깃감이 단절돼 있다는 것에 아쉬움을 많이 가졌다. 정미소는 신식 말이고, 기자가 어릴 때는 방앗간이란 단어를 많이 썼다. 방앗간은 주로 큰 마을에 있어 인근 작은 마을에서는 나락을 찧으려면 시간을 역부로(일부러의 사투리) 내서 와야 한다.

'세월의 기름떼'를 온몸에 잔뜩 묻힌 방앗간의 기계와 어른 키만한 바퀴, 둔탁한 기계 소리, '뫼피우스의 띠'같은 '태', 그리고 옆 구멍으로 날려서 나오는 나락 쭉정이인 왕겨들···.

어느 것 하나 지우고 싶지 않은 추억거리다. '기억거리'는 금세 잊지만 '추억거리'는 평생을 잊지 못하고 달고다닌다는 말도 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랴'는 말처럼 승산마을 방문객들이 이 방앗간을 자주 기웃하게끔, 어서 개방됐으면 한다.

도로가에 '만물마트'란 간판이 눈에 띈다.

몇년 전까지 지수면 일대에 온갖 물건을 도매로 팔던 가게라고 한다. 옛 건물 자리에 현대식으로 다시 지었다.

지금은 물건을 팔지 않고 70대(여) 어르신이 마을을 찾은 길손들에게 옛날 도매로 인근 함안, 의령 소매가게에 물건을 넘기던 추억담을 건네고, 서예 등 소일을 하며 지키고 있다. 상품 전시대에는 팔던 색바랜 물건들을 전시해 놓았다. 대부분 학생들의 물품인 걸로 봐선 인근 지수초교가 폐교되기 전에 팔던 학용품으로 보였다.

어르신은 60대 초중반에 장사가 꽤 잘 돼 진주 시내에 건물 몇 채를 마련했고, 자식도 공직에 있다는 등 가게 덕에 집안을 건사해온 지난 일들을 자랑스레 말했다. 승산마을이 그만큼 번성해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이 어르신은 서예와 그림에 취미가 있어 가게 옆 공간(2~3평)에다 자신이 쓴 서예를 전시하다가 지금은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남에게 보일 정도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 접었다고 했다. 말을 건네는 기자가 살가웠던지 가게를 나오는데 1회용 장갑과 우의를 쥐어주신다.

인근에 지수하나로마트, 지수마트, 그래도마트 등 작은 슈퍼가 있다. 만물마트의 빈자리를 이들이 메우면서 생필품을 공급하고 있다.

오랜 세월 마을을 지키고 있는 만물마트 건물. 상호만 걸어 놓고 옛날 물품들을 진열해놓지 팔지는 않는다. 정창현 기자
만물마트에 진열돼 있는 옛날 상품들. 판매는 하지 않는다. 정창현 기자

작은 마을에는 무려 100년이 된 교회가 있다. 지수교회다. 어쩌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마을을 지켜온 '승산 건물 중의 백미'가 아닐까 싶다. 지금도 가깝지 않은 지역에서 일요일이면 예배를 드리려는 주민들이 많이 찾는다.

취재반과 동행한 승산마을 이 전 이장은 이 교회를 오래 동안 다닌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집사 직함을 갖고 있다. 다들 종교를 갖지 않은 취재반에 "꼭 이 교회에 다니게 만들겠다"며 너스레를 떠신다.

작은 마을에서 100년 된 교회의 십자가를 보면 경건해진다. 정창현 기자

마을을 돌아보는 와중에 이 전 이장으로부터 여러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조금 더 일찍, 조금만 더 보존거리들을 챙겼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번창했던 옛 부자마을을 상징하던 3곳의 방앗간과 술도가, 푸줏간(대장간)이 없어졌다고 한다. 마을의 권세가 옛날과 같지 않은 탓이겠지만, 이용원과 정미소를 지켜냈던 정도의 결정을 했더라면 하는 아까움과 아쉬움이 진해진다.

이런 저런 감정을 뒤로 하고 도로변에서 조금 들어간 돼지국밥집에서 점심 허기를 채웠다. 30명 정도 자리에 15명 정도가 차 마을의 벅적거림이 반가웠다. 인근 가게나 하우스 재배농가 주민으로 보였는데 평소에도 이 정도의 분위기는 되는 모양이다. 여사장이 취재진에 음식 PR을 하는 걸 보니 외지인의 방문이 적지는 않다는 직감도 왔다.

다행히 요즘 도회지로 나갔던 젊은이들이 마을에 하나둘 정착하고 있다. 한 젊은 부부는 없어진 술도가의 정취를 되살려 '지수도가'란 상호를 걸고 생막걸리를 빚고 있다. 시간이 없어 다음에 만나서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마을의 옛 것을 되찾고 지키려는 이 같은 분위기는 취재반이 만났던 지수초교 졸업생들에세서 흠씬 느껴졌다. 더 찾고 더 되살리려는 각별한 노력들이다. 크기는 작지만 의미는 커 보이고, 인근 남강변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윤설과 같은 마을 보물들을 되찾기를 기대해 보았다. 늦었을 때가 빠른 때이다.

▶ 승산리 변천 내막

승산마을은 진주시의 동북부에 위치한다. 법정 지역명은 진주시 지수면(智水面) 승산리(勝山里)다. 지난 1995년 11월 진주시의 조례로 승내리에서 승산리로 바뀌었다.

지수면은 승산리(勝山里)·청원리(淸源里) 등 6개 법정 리를 관할하고 있다. 15개 행정 리와 27개 반이 있다.

자연마을은 상동과 하동, 상촌과 하촌, 신당, 필동, 송정, 세곡(누루실), 압현(앞재), 동지(동모리), 안계, 용봉, 무등, 고랑, 덕암 등이 있다. 방어산성, 독메산, 관원벌, 숲땀 등의 근처 지명도 유래하고 있다.

승산리의 면적은 2014년 12월 31일 기준으로 30.97㎢이다. 2016년 6월 30일 기준으로 총 866세대에 1682명(남 827명, 여 85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지수는 쌀과 시설채소를 재배하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마와 우엉이 특산품으로 집산지다.

이어 승산의 지난 발자취를 알아본다.

승산리는 오랫동안 승산동으로 불렸다. 아직도 승산교, 승산도랑, 승산연정 등으로 승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승산리는 조선의 전기에는 진주목의 용봉리(龍鳳里)·청원리(淸源里)·승어산리(勝禦山里)로 불렸다. 이어 청원리·승어산리는 임진왜란(1592~1598) 후에 용봉리에 합해졌다가 면 단위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에는 지수와 관련된 지명이 보이지 않는다.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 성여신이 편찬한 경상도 진주목(진주시) 읍지인 진양지(晉陽誌)에서도 '지수면의 중심인 승어산리는 진주의 동쪽 55리에 있으며, 임진왜란 후에 청원리와 승어산리를 통합한 용봉리는 진주의 동쪽 55리에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어 구한말인 1906년 함안군 상봉면·하봉면으로 편입됐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진주군 지수면으로 통폐합돼 승내리로 불렸다. 이후 지수면에 속한지 80여년만인 1995년 우리 고유 지명 찾기 운동으로 승내리는 승산리로 개칭됐다.

다음은 당시 승산리 지명환원추진위원회가 진주시장에게 보낸 서한 내용이다.

'우리 승산은 예부터 산세와 자연 환경이 수려해서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당터로 알려져 왔습니다. 승산은 많은 부자와 인물이 배출되었으며 왜정 때엔 우리 독립군에 은밀히 많은 군자금을 부담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다반사인 부자들의 기세가 부담이 된 왜놈들이 방어산 옛 승어산 지기가 승산에 다 모여 있다는 것을 알고 돈에 지기를 가두어 버리기 위해 교묘히 승산을 승내로 바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50대 이상 세대들은 승산으로 사용하고 있고 타 지방에서도 승산이라면 알아도 승내라고 하면 모르기 때문에 많은 혼돈과 불편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은 동쪽은 청원리와 함안군 군북면(郡北面), 남쪽은 진주시 사봉면(寺奉面)과 접한다. 서쪽과 북쪽은 남강을 사이에 두고 진주시 대곡면(大谷面)과 의령군 화정면(華井面)과 경계를 이룬다. 지수천이 남강과 만나는 곳을 따라가면 의령으로 가던 나룻배가 뜨던 염창나루터도 있다.

취재반은 이날 마을 탐방이 끝나갈 무렵, 이 전 이장에게 "한국에 잘 보존된 고택이 많은 곳은 경북 안동 하회마을이나 경북 경주 강동면 양동마을 정도다. 승산도 이에 못지 않은데 왜 일찍부터 외부에 더 알리지 않았나"라고 물었다.

예컨대 경기 남양주시 남한강 옆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의 유적지는 승산마을의 고택과 비교할 정도가 아니다. 다산의 묘가 있고 고택이라 해봐야 생가인 여유당 등 몇개 정도이고, 여유당도 지난 1925년 홍수로 소실돼 복원했다. 문화관, 기념관 등은 요즘 지은 현대식 관광 시설일뿐이다. 그래도 많은 사람이 찾는 곳으로 자리잡고 있다.

승산마을을 둘러보면서 관광화란 면에선 오래 방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외부에 내세우지 않는 허 씨와 구 씨 가문의 전통의 성품도 있었겠지만 그동안 마을 주민만으론 역부족이었다는 생각도 거둘 수 없었다. 다만 최근 수년간 '관광지화'에 눈을 뜨고 여러 곳에서 발벗고 나서고 있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란 생각이다.

□ 참고 사항

→ 승산리의 변천사

- 조선시대 전기/ 진주목(晋州牧) 동면(東面) 용봉리(龍奉里)·청원리(淸源里)·승어산리(勝禦山里)로 불림.

- 임진왜란 이후/ 청원·승어산리는 용봉리로 합쳐짐

- 1864년(조선 고종 1년)/ 용봉면(龍奉面)으로 불림

- 1894년(조선 고종 31년)/ 갑오경장 이후 하봉면(下奉面), 상봉면(上奉面·일부)으로 불림

- 1906년(광무 10년) 9월 24일/ 칙령 제49호에 의해 함안군으로 이속

- 1914년 3월 1일/ 부·군·면의 통합으로 함안군(咸安郡) 하봉면, 상봉면 일부 등을 통폐합해 지수면(智水面)으로 바꾸고 청담리(淸潭里), 용봉리(龍奉里), 압사리(鴨寺里), 승내리(勝內里), 청원리(淸源里), 금곡리(金谷里)의 6개 법정 리로 개편해 소관함.

- 1995년 11월 1일/ 진주시 조례 제149호로 승산리(勝山里)로 개칭

※ 다음은 승산의 '터줏대감' 허 씨 가문-'허 씨 사돈' 구 씨 가문의 글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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