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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신간] '400년의 긴 길···임진왜란 흔적을 찾아서'

정기홍 기자 승인 2022.05.20 11:48 | 최종 수정 2022.06.16 17:19 의견 0

임진왜란 때 강제로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의 애닯은 삶의 흔적들을 조사해 묶은 책 한권이 출간됐다.

재일조선인이 살아온 현장을 찾아 깨알같이 묘사해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아 보인다. 쉽게 구하기 힘든 귀한 책이다.

'400년의 긴 길···임진왜란 흔적을 찾아서'(도서출판 행복에너지 간)는 일본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재일교포2세가 일본어로 책을 내고, 한국에서 사는 일본인이 번역을 했다. 주체가 바뀐 것 같은 이색적인 책이다. 332쪽 2만2천원(온라인은 10% 할인).

저자 윤달세 씨는 400년 전 임진왜란(1592년) 당시 일본으로 잡혀 간 ‘피로인(被慮人)’으로 불리는 조선 사람의 흔적을 찾아 1980년대부터 현지조사를 했다.

책은 일본의 신문에 연재했던 내용을 갈무리해 지난 2003년 일본에서 출판됐다.

한글 번역을 한 나까무라 에미꼬(中村恵実子) 씨는 "책을 읽고 한국의 역사교과서에 실릴만한 내용인데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은 것이 이상해 번역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나까무라 에미꼬 씨는 현재 전북 고창에서 살고 있다.

▶ 출판사 서평

<일본 열도에 남겨진 우리 조상들의 자취>

가깝고도 먼 이웃나라 일본은 오랜 옛날부터 우리나라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져왔다.

어떤 때는 호의적이었으나 어떤 때는 전쟁으로 인한 상흔을 남겼고, 그 와중에 많은 문화적 유산이 넘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흔적은 긴 시간을 넘어 보존되어 있다.

역자는 처음 본서를 읽고 ‘이것은 한국 사람의 역사이다.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교과서에 실릴 만한 가치 있고 재미있는 내용인데 모르면 손해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본서는 400년 전 임진왜란(1592년) 당시, 조선 각 지역에서 일본으로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강제로 잡혀 간 역사에서부터 출발한다. ‘피로인(被慮人)’이라 불리는 그 조선 사람들에 관한 얼마 없는 흔적을 1980년대부터 현지조사한 사람이 윤달세 선생님이고, 그 조사된 자료를 기록한 책이 2003년 일본에서 출판된 '400년의 긴 길'이다.

이 책은 일본 각지에서 힘들게 살아가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일본 사회에 한 줄기 빛이 된 조선 사람들의 놀라운 삶의 흔적을 상세하게 다룬다.

임진왜란 때문에 잡혀간 죄 없는 수많은 조선인들. 그들 피로인들이 이국인 일본 땅에서 단지 향수만을 품고 멍하니 세월만 보낸 것은 아니었다. 예기치 않은 어려움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면서도 한 자리에 정착하여 일본의 경제·문화·사회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 존재한다.

일본 내 많은 분야에 공헌한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일본이라는 나라를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

일본이 그냥 원주민만으로 구성되는 나라가 아니라, 한반도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시기별로 수많은 이주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진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답다고 느끼는 일본 성곽의 기와도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 기와공의 기술이었다는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당시에 끌려간 조선 사람들의 후손은 지금도 일본에서 시루떡을 만들어 제사를 올리고 나눠 먹거나 도토리 열매를 모아 묵을 쑤어 먹는다고 한다. 아직도 한국식 짚신, 짐을 옮길 쓰는 지게, 옛날식 김치 등이 일본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그들은 조선의 생활 일부를 일본에 가져갔고, 이 책은 조선 사람의 생활사를 잘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400년이나 지났음에도 그 흔적이 일본에 남아 있다니, 우리 조선 사람들의 강인한 생활력과 고단했을 일본 생활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억지로 끌려가 꼬여버린 인생을 살아야 했음은 우리의 아픈 역사다. 가장 가까운 나라 일본,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정답은 없지만, 일본에서 살아남은 조선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일본 구석구석에 남겨진 이들의 흔적을 찾아보자.

▶저자/윤달세(尹達世)

1945년 일본 에히메현(愛媛県) 출생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学) 졸업

통일일보 고베(神戸) 지국장

민단 효고(兵庫) 본부 사무국장

히메지돗쿄대학(姫路獨協大学) 강사

오사카경제법과대학(大阪経済法科大学) 객원연구원

‘효고츠·조선통신사 연구회’ 대표간사

<저작>

2010년 '400년의 긴 길 속편' 리틀걸리버사

2001년 '효고 속의 조선'(공저) 아카시서점

▶ 역자 나까무라 에미꼬(中村恵実子)

1970년 일본 도쿠시마현(徳島県) 출생

도쿠시마대학교 졸업

공주대학교 대학원 석사

2013년 '가격에서 세계가 보인다'(공저) (일본 아사히신문출판)

2011년~2014년 주간 고창해피데이신문에서 격주칼럼 연재

‘나카무라상의 고창살이’

▶ 목차

저자 서문

추천사

저자 서문-3

추천사-6

1.조선여인의 묘-도쿠시마현 가와시마초 (徳島県川島町)-10

2.고려 갸한의 성주-도쿠시마현 도쿠시마시(徳島県徳島市)-18

3.두 개의 도진총(唐人塚)-가가와현 다카마쓰시(香川県高松市)-26

4.도진마치(唐人町)의 유래-고치현 고치시(高知県高知市)-33

5.도진두부(唐人豆腐)와 도토리 두부

-고치현 오토요초·아키시(高知県大豊町·安芸市)-41

6.히데요시와 죠텐(譲天)-에히메현 우와지마시(愛媛県宇和島市) -48

7.한밤중의 호랑이춤-에히메현 마쓰야마시(愛媛県松山市)-56

8.종군한 스님의 일기-오이타현 우스키시(大分県臼杵市)63

9.뛰어난 심미안의 조선인 쇼안(庄庵)-오이타현 사에키시(大分県佐伯市)71

10.가로직으로 출세한 피로인-오이타현 구스마치(大分県玖珠町)79

11.도진부부의 전설-미야자키현 다카치호초(宮崎県高千穂町)87

12.파리파리 절임-미야지키현 휴가시(宮崎県日向市)93

13.조선매듭 -미야자키현 사도와라초(宮崎県佐土原町)100

14.아득하게 먼, 400년 -가고시마현 미야마초(鹿児島県美山町)107

15.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석교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鹿児島県鹿児島市)115

16.남원성에서 잡혀온 아이-가고시마현 다네가시마시(鹿児島県種子島市)123

17.류큐(琉球)의 후예들 -오키나와현 나하시(沖縄県那覇市)131

18.민요의 주인공-오키나와현 나카도마리(沖縄県仲泊)138

19.정한비(征韓碑)가 있는 항구도시-가고시마현 센다이시(鹿児島県川内市)145

20.구마모토성의 조선기와-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熊本県熊本市)152

21.피로인 형제가 전한 한지-구마노토현 가호쿠마치(鹿児島県鹿北町)159

22.노예상인의 암약-나가사키현 나가시키시(長崎県長崎市)166

23.조선인 천주교 신자들-나가사키현 나가시키시(長崎県長崎市)173

24.영주부인이 된 조선여인-나가사키현 히라도시(長崎県平戸市)180

25.웅천을 옮긴 동네-나가사키현 사세보시(長崎県佐世保市)187

26.가규 가마(臥牛窯)-나가사키현 기하라(長崎県木原)194

27.출병의 전전기지-사가현 가라쓰시(佐賀県唐津市)200

28.시이노미네의 고려제(高麗祭)-사가현 이마리시(佐賀県伊万里市)208

29.나베시마 사라사(鍋島更紗)-사가현 사가시(佐賀県佐賀市)216

30.미이케 탄광의 시작-후쿠오카현 야나가와시(福岡県柳川市)224

31.황상의 인삼산 -후쿠오카현 다카타마치(福岡県高田町)232

32.망향의 도진마치-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福岡県福岡市)238

33.황무지를 개척한 조선인-야마구치현 이와쿠니시(山口県岩国市)247

34.일본어를 강제한 승려-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広島県広島市)255

35.아코(赤穂) 의사의 딸-시미네현 쓰와노시(島根県津和野市)263

36.도키안(道喜庵)-시마네현 마쓰에시(島根県松江市)270

37.조선 망루가 있던 성-돗토리현 시카노초(鳥取県鹿野町)277

38.부자가 된 피로인 -돗토리현 돗토리시(鳥取県鳥取市)284

39.오카야마의 코무덤과 고약((膏藥)-오카야마현 비젠시(岡山県備前市)291

40.피로인이 개척한 도진논(唐人田)-오카야마현 쓰야마시(岡山県津山市)299

41.바다를 표류했던 조선여성-오카야마현 우시마도초(岡山県牛窓町)306

42.노기 대장의 숨겨진 족보 -효고현 기노사키초(兵庫県城崎町)313

43.새로운 불화(佛畫)의 발견 -효고현 미키시(兵庫県三木市)321

역자 후기328

▶ 본문 미리보기

도검(刀剣) 감상의 세계에서 일본도(日本刀)는 게이초년간(慶 長年間:1596~1615년)을 경계로 그 이전의 것을 고도(古刀)라 하고, 그 이후에 나온 것을 신도(新刀)라 부른다. 역사소설가인 가이온지 조고로(海音寺潮五郎)는 그것이 임진왜란과 관련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조사했더니, 역시 일본의 도공(刀鍛冶)들이 조선에 건너가 그들의 경험을 살렸다는 것을 '일본의 명장(日本 の名匠)'에서 언급했다.

이것은 일본이 중세에서 근세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일본의 외국침략 경험이 그 이후 일본의 사회·경제·문화 혁신의 계기가 되었음을 증명하는 아주 작은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죄 없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임진왜란 때문에 일본으로 잡혀왔다.

이것은 바로 ‘중세의 강제연행’이지만 그들 피로인(被慮人)들이 이국인 일본 땅에서 단지 향수만을 품고 멍하니 세월만 보낸 것은 아니었다. 예기치 않은 어려움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면서도 한자리에 정착하여 일본의 경제·문화·사회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들이 일본의 많은 분야에 공헌한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이러한 일을 충분히 제시할 수 없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부족함 때문이다.

이 기행문을 최초로 쓴 것은 1983년의 일이니까, 근 20년이나 되는 세월 동안 일본 각 지역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당시 나는 재일한국인 사회를 대상으로 한 '통일일보(統一日報)'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관계로, 이 신문에 졸고의 기행문을 게재한 것이 시작이었다.

신문사를 퇴직한 후 '앞으로21'이나 '불고기문화' 등의 잡지에서 적극적으로 지면을 제공해 주었다. 그 후에도 '민단신문'에 연재되어 중단하는 일이 없이 즐거운 여행과 취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원래 이 기행문을 쓰게 된 계시를 주신 분은 당시 '고베신문 (神戸新聞)'의 편집위원을 하셨던 미야자키 슈지로(宮崎修二朗) 선생(현재 고베사학회 회장)이다. 어느 정도 원고량이 나왔을 때 출판을 권유 받았다. 많은 세월 피로인의 발자국을 찾는 여행을 즐겼는데, 출판해 버리면 그 장난감을 빼앗긴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아 좀처럼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러면 그 즐거움을 모두 빼앗기지 않도록 동쪽 일본에 관한 내용을 남겨서 출판합시다.”라고, 나의 응석을 받아 주신 분이 리불출판(リーブル出版)의 아라모토 가쓰노부(新本勝庸) 사장과 다케무라 히사오(竹村寿夫) 편집장이었다. 그 덕분에 처음으로 한 권으로 정리된 책이 출판의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감사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이 기회에 지금까지 알게 된 많은 분들, 그리고 신문사 근무 시절 선배, 동료와 친구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다.

특히 당시 '통일일보' 문화부장이었던 이은택 씨(현재 부산 경성대 교수), 월간 '앞으로21'의 박득진(朴得鎮) 편집장님, 월간 '불고기문화'의 박건시(朴健市) 편집장 님, '민단신문' 이청건 (李清鍵) 편집위원님 등은 원고 게재의 자리를 마련해 주어 미력한 나를 도와주셨다.

그리고 마야자키 선생님을 비롯해서 고인이 되신 나이토 슌포(内藤雋輔) 교수님(당시 오카야마대학 명예교수), 황영만(黄迎満) 선배님(당시 통일일보 상무, 현재 한국 민단 중앙 부단장), 도쿄대학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 명예 교수님께서 항상 격려를 해주셔서 많은 용기를 얻었다. 그 고마움을 가슴에 새겨 깊이 감사드린다.

2003년 늦은 여름(晩夏) 윤달세

▶ 추천사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늦은 가을, 전라도 고창에서 이 책을 출판하고 싶다고 나를 찾아온 한 부부가 있었다. 남편은 한국 사람이고, 부인이 일본 사람이었다. 이 여성이 '400년의 긴 길' 번역자다. 이 부부는 결혼한 지 20년이 넘어 아이들 셋이 거의 다 자랐다고 한다. 지금은 고창에서 재미있게 열심히 사는 것같이 보였다.

1994년 일본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수상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우리 삼성출판박물관도 방문했다. 그때 무라야마 수상을 안내해 드린 코스로 이 부부도 안내했다. 안내 코스 마지막은 우리 박물관 옥상이었다. 날이 참 좋았던 그날 박물관 앞의 백악산이 잘 보였다.

번역자인 일본 여성은 거짓 없는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로, 소위 우리가 머리로 상상하는 일본 여성과는 좀 거리가 먼 스타일이었다.

그녀가 말했던 “이 책의 내용은 조선인의 역사다.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라는 말에 나도 동의하는 것이 있었다. 겨울이 되기 전 그렇게 만났고, 봄이 다 가기 전 이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니 참으로 기쁘다.

이 책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한 번쯤 읽어 보길 권한다.

이렇게 많은 조선 사람이 임진왜란에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 생활하였다는 것을 안다면, 일본이라는 나라를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 일본이 그냥 원주민만으로 구성되는 나라가 아니라, 한반도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시기별로 수많은 이주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진 나라라는 것을 안다면 말이다.

가야와 백제가 멸망했을 때도 수십만 명의 한반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조선의 문화가 일본에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일본답다고 느끼는 일본 성곽의 기와도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 기와공의 기술이었다는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당시에 끌려간 조선 사람들의 후손은 지금도 일본에서 시루떡을 만들어 제사를 올리고 나눠 먹거나 도토리 열매를 모아 묵을 쑤어 먹는다고 한다. 아직도 한국식 짚신, 짐을 옮길 쓰는 지게, 옛날식 김치 등이 일본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그들은 조선의 생활 일부를 일본에 가져갔고, 이 책은 조선 사람의 생활사를 잘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400년이나 지났음에도 그 흔적이 일본에 남아 있다니, 우리 조선 사람들의 강인한 생활력과 고단했을 일본 생활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억지로 끌려가 꼬여버린 인생을 살아야 했음은 우리의 아픈 역사다.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명복을 빈다.

이 책의 6장에 히데요시의 초상화를 복원한 죠텐 스님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일본에 연행된 피로인 2세로 부친을 따라 불문으로 들어갔다. 그는 주지로 부임한 절에서 우연히 낡고 오래된 히데요시의 초상화를 발견했다. 당시 히데요시의 정권은 끝난 시대였다. 훼손된 히데요시의 초상화를 죠텐 스님이 교토로 가져가 복원했다. 그 초상화가 후에 일본 역사교과서에 실린 히데요시의 대표적인 초상화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죠텐 스님의 말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히데요시의 조선출병이 없었다면 아버지가 일본에 연행될 비운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것이 없었으면 이렇게도 고마운 불문에 들어올 일도 없었다. 그 뜻으로 슬픔과 기쁨이 반반이다.”

하긴 행복과 불행은 순간순간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새옹지마(塞翁之馬).

'400년의 긴 길'의 저자인 재일동포 2세인 윤달세 씨가 이 기행문을 쓰기 시작한 것이 1980년대 전반이었다고 한다.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을 엄청난 강대국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400년은커녕 40년이 지난 지금 일본을 봤을 때 삼라만상(森羅萬象)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느낄 수밖에 없다. 지난 역사를 잊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후손들에게 보다 좋은 한일관계의 미래를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가까운 나라 일본,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정답은 없지만, 일본에서 살아남은 조선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들의 건강한 삶을 봐야 한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을 존경할 수밖에 없다.수많은 생각들이 스치지만 이 책을 읽으면 그냥 일본 구석구석에 남겨진 이들의 흔적을 찾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문뜩문뜩 일어난다고나 할까?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한번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2022년 5월 삼성출판박물관에서

김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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