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재야'로 불리며 마지막까지 국회의원 특권폐지에 앞장 섰던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이 22일 78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유족 등에 따르면 장 원장은 담낭암 투병 끝에 이날 새벽 1시 35분쯤 입원 중이던 경기 고양시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숨을 거뒀다.
고인은 두 달 전인 지난 7월 16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며칠 전 건강 상태가 매우 안 좋아 병원에서 진찰받은 결과 담낭암 말기에 암이 다른 장기에까지 전이돼 치료가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다"고 알렸다.
이어 "당혹스럽긴 했지만 살 만큼 살았고, 할 만큼 했으며, 또 이룰 만큼 이루었으니 아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장 원장은 1945년 경남 밀양군(밀양시) 상남면 남산리에서 태어나 김해군(김해시) 이북면(한림면) 장방리에서 자랐다.
마산공고를 졸업하고 1966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법대 학생회장을 할 때인 1970년 11월 서울 청계천 동대문 상가에서 봉제일을 하던 노동자 전태일 씨의 분신자살을 접하면서 학생운동과 노동 운동에 투신했다. 전 씨의 가족에게 서울대 학생장으로 치르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이후 노동운동을 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체제와 군부독재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을 했다.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을 시작으로 민청학련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민중당 사건 등으로 1970~1990년대에 5차례, 9년간 복역했다.
무려 12년간을 수배 생활을 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관련자로 수배됐으나 도망다니면서 체포되지 않았다.
고인은 숱한 수감·도주 생활에도 민주화 운동 보상금을 일절 수령하지 않았다. 그는 "받으면 안 되는 돈이라 안 받은 것"이라고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농사짓는 사람,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 그런데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특별히 보상금을 따로 받는 건 파렴치한 짓"이라고 비판했다. 여유가 없는 노동자·농부들과 달리 대학생들이 데모를 할 수 있는 것도 '특권'이라고 했다.
장 원장과 그의 부인이 민주화 보상금을 신청했으면 10억 원 넘게 받았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국민연금과 베트남전 참전 수당을 합쳐 월 220만 원만을 받았다.
전태일 씨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와 한동안 서울 도봉구 쌍문동 같은 동네에 살며 노동운동을 도왔다.
장 원장은 재야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제도권 집입을 목표로 1989년 이재오, 김문수 등과 함께 진보정당인 민중당을 창당해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서울 동작갑)해 낙선했다. 이후 개혁신당, 한국사회민주당, 녹색사민당, 새정치연대 등을 창당했다.
하지만 14대 총선에 이어 15·16대 총선, 2002년 재보궐 선거, 17·19·21대 총선까지 모두 7차례 선거에서 떨어졌다.
21대 총선에서는 보수 정당인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후보로 옮겨 김해갑 지역 단수공천을 받았으나 더불어민주당 김정호 의원에 밀려 낙선했다. 3차례의 대통령 선거 출마도 선언했다. 이때 '영원한 재야'란 별명이 붙여졌다. 노동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가 그의 천직이었던 것이다.
최근에는 합리적 진보를 표방하며 '신문명정책연구원'을 만들어 저술과 국회의원 특권 폐지 운동 등에 집중했고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로도 활동했다.
장 원장의 부고 소식이 전해지자 SNS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게시물이 이어지고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무하 씨와 딸 2명이 있다. 빈소는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26일 장지는 경기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