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감사원의 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직무 감찰을 못 한다"고 결정한 가운데 현 헌법재판관 8명 중 6명이 판사 시절에 지역 선거관리위원장을 겸직했던 것으로 확인돼 논란이 되고 있다.
헌재는 지난 27일 감사원의 중앙선관위 감사에 대한 '권한쟁의' 심판에서 "감사원은 선관위를 감사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이에 대해 법조계에선 "선관위는 선거관리 업무도 하지만 채용·인사 등 행정사무도 있어 헌재가 감사원의 선관위 직무감찰을 못하게 막으려면 대안을 제시했어야 했다”고 비판했다. 앞으로 무소불위 막강 조직을 누가 견제하냐는 것이다.
기자는 이 사안을 접하면서 "참 세상 불공평하다"는 말이 먼저 떠올랐다. 기자가 어릴 때 학교 교육을 덜 접했던 시골동네 어른들에게서 자주 들었던 말이다. 세상천지에 다 통하는 이 말에 '불공정-불평등 거리'가 다 들어있다. 살인 등 중범죄인이 언급해 화제가 된 말이라서 연결 짓기 거북하지만 '유전무죄-무전유죄'란 말도 떠오른다.
물론 헌재는 현행 헌법과 법률 조문 등에 따라 제대로 결정한 것이라고 강편할 것이다. 틀리지 않다. 하지만 부실했다. 적용한 법이 잘못됐고, 힘 있는 자들이 득세할 때 만들었다면, 지금에 와 불실해졌다면 고쳐져야 한다. 헌재를 비난하는 건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 내규 등으로 잘 하라는 언급뿐이었다. 국민들은 여기에서 '초록은 동색'이란 생각을 갖는다. 헌재 재판관 대다수가 선관위원장 출신이다.
1일 선관위 등에 따르면 선거 때 선거를 관리하는 선거관리위는 ▲중앙선관위원장에 대법관 ▲시도 선관위원장 지방법원장 ▲시군구 선관위원장에 지원장이나 지방법원 부장판사가 겸직한다.
이에 대한 명확한 법과 규정도 없고 관행으로 해오고 있다.
상당수 법조계 인사들은 감사원에 대한 헌재의 판결을 두고 "각종 선관위원장 출신 헌재 재판관들이 선관위 견제 장치를 없애는 판결을 했다. 향후 공정성 시비가 지속될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문형배 헌재 소장 권한대행 등 재판관 8명 중 6명이 시군 선관위원장을 역임했다.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문재인 정권 때 임명된 문 대행은 대부분 부울경에서 판사를 역임해 이른바 '향판(鄕判·지방 판사)'으로 불린다. 창원지법 진주지원장을 거쳤다. 헌재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진주 대아고를 나온 문 대행은 지난 2011~2012년 진주지원장 시절 진주시선관위원장을 했다.
김형두 재판관은 강원 강릉지원장, 정정미 재판관 충남 공주지원장, 정형식 재판관은 경기 평택지원장 때 이들 지역의 선관위원장을 맡았다.
또 조한창 재판관은 제주지법 부장판사와 평택지원장을 하면서 제주시선관위원장과 평택시선관위원장을 했다.
정계선 재판관은 충북 충주지원 판사 시절 음성군선관위원장을 지냈다.
법조계에서는 헌재 재판관의 대부분이 고위 법관 출신이고, 상당수가 지역 선관위원장을 지낸 경험이 있어 헌재가 선관위 관련 사건을 공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한다. 선관위와 헌재가 한 몸이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문제는 관련 법과 규정이 없다는 점이다.
현재 각급 선관위원장은 법률이나 규정이 아닌 '관례'에 따라 판사들이 맡고 있다.
예컨대 헌법에는 중앙선관위는 대통령 임명 3명, 국회 선출 3명, 대법원장 지명 3명 등 총 9명을 위원으로 하고, 이 중 호선(互選)으로 위원장을 뽑도록 정해 놓았다.
하지만 그동안 중앙선관위원장은 대법관이 했다.
지난 2022년 대선과 보궐선거 때 사전 투표용지를 소쿠리에 모아 옮긴, 이른바 ‘소쿠리 투표’로 선거 관리부실 논란 때의 중앙선관위원장은 노정희 대법관이었다. 당시 그는 논란이 커졌는데도 당일 출근도 하지 않았다.
이어 노태악 대법관이 대선이 끝난 2022년 5월부터 중앙선관위 위원장 맡고 있다.
지역 선관위원장도 위원 중 호선해야 하지만 대부분 지방법원장(지원장)이나 부장판사가 한다.
비상임 근무이지만 수당도 있다. 월 40만 원의 직책수당과 회의 참석이나 선거 사무를 본 날에 10만 원씩의 추가 수당이 나온다.
따라서 판사가 선관위원장을 하는 관행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도 강하게 일고 있다. 현장에선 법원과 판사들이 정치이념적 성향에 따라 판결이 왔다갔다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말이 터져나온다. 재판 불신이다.
이러다 보니 '눈'이 제대로 보일 리 없다.
감사원은 지난달 27일 '선관위 채용 등 인력관리 실태' 감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선관위는 신입·경력 등 전체 채용 분야에서 총 878건(시·도 선관위 662건, 중앙선관위 216건)의 규정 위반을 했다. 감사원은 선관위 전 사무총장과 차장 등 32명을 중징계할 것을 요구했다.
선관위 직원은 감사원 감사에서 "선관위는 친·인척 채용이 전통"이라는 아연실색을 할 수 있는 말까지 했다.
중앙선관위 박찬진 사무총장(왼쪽), 송봉섭 사무차장. 이들은 자녀들의 특혜 채용 의혹을 받다가 지난 2023년 5월 25일 동반 사퇴했다. YTN 뉴스 캡처
중앙선관위는 지난 2023년 친·인척 특혜 채용 논란이 불거지자 지난해 7월 김용빈 전 사법연수원장을 신임 사무총장에 임명했다.
35년 만의 외부 출신 인사라고 홍보했지만 김 사무총장도 "그 밥에 그 나물"이란 지적이다.
또 선거사범 사건 수사 과정에서 검찰이 청구한 선관위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법원이 기각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으로 알려졌다.
'셀프 재판' 비판이다.
헌재의 이번 결정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대안이 부실한 평결은 잘못된 것이다. 비리 소굴인 선관위를 저대로 두란 말인가?
8명의 헌재 재판관들은 이날 내린 판단늘 평생을 두고 곱씹어야 할 것이다. 헌재의 존재 가치는 선관위가 아니라 국민들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