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산림녹화 역사를 담은 '산림녹화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됐다.

'산림녹화 기록물'은 6·25전쟁 후 황폐화된 국토에 민·관이 똘똘 뭉쳐 나무를 심고 가꾼 성공적인 산림녹화 경험을 담은 자료다. 공문서, 사진, 홍보물, 우표 등 9600건이 실려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는 11일(한국 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회의에서 산림녹화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기로 결정했다. 추진 9년 만이다.

지난 1973~1977년 경북 포항 영일만 일대 산림 복구 과정을 기록한 모습. 국가유산청

강원 춘천시(당시 춘성군) 동면 감정리 산림녹화 전과 후 모습. 시기는 1975년쯤으로 추정된다. 나무 하나 없던 민둥산이 푸르름을 되찾고 있다. 박규원 한국 산림녹화 유네스코(UNESCO) 등재추진위원 제공

IAC는 개발도상국이 참고할만한 모범 사례이자 기후변화, 사막화 방지 등 국제적 이슈에 본보기가 될 기록물로 평가했다. 특히 전 국민이 나서 황폐화된 국토를 다시 우거진 산림으로 만들었다는 점을 주목했다.

6·25 전쟁 직후인 1953년 3600만㎥에 불과했던 임목 축적 총량은 2020년 10억 3800만㎥로 무려 29배나 증가했다.

우리나라 산림 녹화 역사를 보면 지난 1967년 농림부 산림국이 산림청으로 격상됐고, 1973년엔 산림청이 내무부로 이관됐다. 당시 시도의 산림과나 녹지과는 국으로 승격되었고 영림과와 식수과가 신설되기도 했다. 이때부터 내무부가 추진하는 새마을운동과 연계해 저극적이고 지속적인 조림에 나섰다.

정부는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1972~1981년)과 연계해 1973년에 1982년 전국토 녹화를 목표로 제1차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이 녹화 계획은 목표 기간을 4년이나 단축했고, 정부는 1978년 2차 계획을 세워 시행했다.

1970년대 나무심기를 독려하는 포스터. 국가유산청

정부는 산림 녹화에 앞서 산을 황폐화시키는 화전을 먼저 정리했다. 이주 지원금을 주고 강제적으로 이전시켰지만 교육에 소외됐던 자식들을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도 보내주었다.

화전민이 많은 강원도가 1964년 정부에 요청해 화전 정리에 관한 법률안이 1966년 4월 8일 제56회 국회 본회의에 통과, 법률 1778호로 공포돼 시행됐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강원도에서 시행된 1, 2차 대단위 화전정리 사업과 강원도청에서만 보유한 복지조림에 관한 기록물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희소가치가 있는 기록물로 평가받았다.

IAC에서 세계기록유산 등재 여부를 결정할 때 중요하게 보는 기준은 '사회적 가치', '희소성', '역사성' 등이다.

특히 1970년대 말엔 해풍(海風)과 돌산으로 나무가 자랄 수 없는 곳이던 경북 포항 영일 지구의 녹화 작업은 지금도 산림 녹화 이야기를 할 때 자주 거론된다.

영일 지구는 가파른 암반층이 많아 나무다운 나무가 없었다. 사방 사업에 투입된 주민들은 가파른 언덕에 올라 나무를 심을 수 있게 수평으로 고른 나무를 심은뒤 매년 비료를 주고 가물 때엔 물을 길어다 주었다고 한다. 언덕에 고랑을 파고 물을 부어 퇴적암반이 풍화되게 한 뒤 풀 거름을 섞어 나무를 심었다는 믿기 어려운 기록도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다고 한다.

정부는 산림 녹화 정책에 그린벨트 제도를 만들어 도시화로 인한 산림 훼손을 막았다. 그린벨트 제도는 지금까지 공고히 지켜지고 있다.

주민들이 1970년대 경북 포항 영일만 일대에서 나무를 심기 전, 지게로 흙과 비료를 나르고 나무를 심을 곳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있다. 국가유산청

한편 우리나라는 1997년 처음 등재된 훈민정음·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모두 20건의 세계기록 유산을 보유하게 돼 기록문화 강국의 위상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