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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기획] '3대 재벌 탄생지' 지수 승산을 가다-구 씨 가문 생가와 본가(3-2)

정창현 기자 승인 2022.04.01 23:51 | 최종 수정 2022.06.26 13:01 의견 0

※ 더경남뉴스의 창간 기획 '지수 승산마을을 가다'는 지난 4번째 글에서 '터줏대감 허 씨 가문의 생가과 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허 씨 사돈인 구 씨 가문의 생가와 본가'를 둘러보겠습니다.

두 가문의 이야기는 5개로 나눠 ▲허 씨의 생가와 본가(3-1) ▲구 씨의 생가와 본가(3-2) ▲허 씨의 가문(3-3) ▲ 허만정과 그 후손(3-4) ▲구 씨의 가문(3-5) ▲구인회와 그 후손(3-6)▲ 두 가문의 공동창업(3-7) 순서로 싣습니다.

이번 글도 취재진과 동행한 승산마을의 이병욱 전 이장(79)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 연재 순서

1. 들어가는 글

2. 승산마을의 산세와 지세

3. 승산마을의 유래와 변천사

4. '승산 터줏대감' GS의 허 씨-'허 씨의 사돈' LG의 구 씨 가문

- '마을 터줏대감' 허 씨 가문의 생가와 본가

- '허 씨의 사돈' 구 씨 가문의 생가와 본가

- 허 씨 가문 이야기(예정 글)

마을 안내판을 먼저 숙지하면 고택들의 탐방이 쉬워진다. 정창현 기자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은 600년 전 김해(金海) 허(許) 씨의 가문이 먼저 자리를 잡았고, 그로부터 300년 뒤에 능성(綾城) 구(具) 씨의 가문이 이 마을에 들어왔다. 이후 두 집안은 여러 차례 겹사돈을 맺어오다가 마침내 동업까지 하게 되면서 굴지의 대기업들을 일구게 된다.

두 가문은 지난 1947년 LG그룹(옛 락희화학공업사)을 공동 창업한 이후 2005년 GS그룹, LS그룹으로 나눠질 때까지 58년 간 '아름다운 동행'을 했다.

취재반은 마을 개천인 승산천을 따라 난 마을길을 걸었다. 한옥 고채들이 어깨동무를 하듯 길 옆에 나란히 자리한다.

앞에서 소개한 허 씨 가문은 물론, 구 씨 가문의 한옥들도 보존이 잘 돼 있었다. 취재반을 동행한 이 전 이장은 "일제강점기나 6·25 등 역사와 이념의 큰 소용돌이 속에서도 큰 탈 없이 넘겨온 덕분"이라고 했다.

마을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두 가문이 오래 전부터 춘궁기 고릿고개 때나 가뭄과 장마가 들어 힘들 때마다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 적이 두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두 가문은 입에 풀 칠하기도 힘든 이웃에게는 세금도 대신 내줬다고 한다.

▶ 구연호에서 구본무까지···한 집에서 5대 탄생

승산마을 구 씨 가문(LG그룹)의 생가와 본가도 허 씨 가문 만큼이나 많다. 두 가문이 절반씩 나누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번 연재 기사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LG그룹을 일군 고 구인회(具仁會) 창업주를 중심으로 윗대 조부-부친 세대와 아래의 아들-손자 세대로 나눠서 쓴다.

구 창업주의 생가에서는 그의 할아버지 구연호 선생부터 그의 손자인 고 구본무 LG 명예회장까지 5대가 태어났다.

동네길에 인접한 구인회 LG 창업주의 생가 대문. 그의 장남 고 구자경 명예회장, 손자 고 구본무 명예회장도 여기서 태어났다. 구 창업주의 아내 허을수 여사의 집도 담너머에 있다. 정창현 기자

먼저 구 LG 창업주의 윗대를 살펴본다.

능성 구 씨 가문은 전남 화순군 능성면(현 능주면)을 본관으로 한다. 구 씨 가문이 승산마을에 터전을 잡은 시기는 1720년 전후로 알려져 있다. 승산마을에서 상동(윗동네)으로 불리는 곳에 주로 살았다.

구 창업주의 생가는 120년 전인 1900년 전후에 지어졌다고 전한다. 그의 할아버지 만회(晩悔) 구연호(具然鎬) 선생과 아버지 춘강(春崗) 구재서(具再書) 선생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

만회 선생은 조선 철종 때(1831~1863년) 과거시험(대과)에 급제해 고종 때(1863~1907년)에는 홍문관에서 임금에게 경서(經書)를 강의하는 시독관(侍讀官·교리)과 사서를 기록·관리하는 춘추관의 기주관(記注官)을 지냈다. 두 관직은 5품에 해당한다. 이런 이유로 마을 사람들은 구 창업주의 집안을 '구교리댁'으로 불렀다.

그는 학문이 깊어 당대의 선비와 유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고종의 총애도 받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에게 일생의 큰 전환점을 맞는 시기가 다가선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 고종이 폐위되고 홍문관도 문을 닫자 그는 1907년 8월 27일 승산마을로 낙향했다. 이후 집에서 은거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하며 손자 구인회에게 한학과 유학을 가르치는데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구인회 LG의 '인화 경영'이 여기서부터 싹이 텄다고 말할 수 있다.

구 창업주의 아버지인 춘강 선생은 그의 부친이 관직을 버리고 낙향을 해서인지 관직 기록은 없다. 하지만 부친과 비슷한 가풍을 이으며 평생을 선비로 살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아들 구인회와 함께 중국 충칭(重慶)임시정부와 상하이(上海)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 LG의 '인화정신'의 발상지 '방산정'과 '모춘당'

구인회 LG 창업주는 이 집에서 구재서 선생과 진양 하 씨 가문의 하근(河近) 여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연암문화재단으로 잘 알려진 연암(蓮庵)이다.

이 집에서 6남4녀가 태어났는데 ▲구인회(첫째) ▲구철회 LIG그룹 초대회장(둘째) ▲구정회 LG 사장(셋째)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넷째) ▲구평회 E1 명예회장(다섯째) ▲구두회 예스코 명예회장(여섯째) 등이다.

지난 2016년 5월 구태회 명예회장이 형제 중 마지막으로 별세해 LG 가문의 '회'자 6형제시대(1세대)는 끝이 났다.

마을 중간 쯤에 있는 구 창업주의 생가 크기는 3300㎡(1000평) 정도로 본채와 별채, 사랑채가 있다.

집의 입구인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잔디 정원과 한옥 두채가 나온다.

동남향으로 앉은 네 칸 한옥은 본채(생가)이고 서남향의 한옥은 별채다.

본채는 구 창업주의 조부 구연호 선생을 추모하는 '방산정(芳山亭)'이다. 오른쪽의 별채는 부친 구재서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모춘당(慕春堂)'이다.

LG 구인회 창업주와 장남 구자경, 손자 구본무가 태어난 생가. '방산정'(왼쪽)과 '모춘당'으로 이뤄져 있다.
LG 구인회 창업주가 태어난 본채인 방산정. 조부와 부친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4칸 짜리인 '방산정'은 구 창업주가 동쪽으로 옮겨 다시 지었다. '방산정'의 대들보에는 지은 연대를 단기 4289년(서기 1956년)으로 써놓았다.

마루의 기둥 누상주(樓上柱·누의 상층부분 기둥)에는 구 창업주의 조부가 지은 칠언절구의 한시가 새겨져 있다.

한시의 제목은 ‘견국사(見國事) 일비결귀(日非決歸)’로 ‘국사를 보니 날로 그릇되어 가 되돌아갈 것을 결심하다’는 뜻이다. 관직을 버리고 승산마을로 낙향한다는 한 수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인 셈이다.

조정은 1893년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민심은 날로 사나워자 수습을 하지 못하고 청나라에 원병을 청했고, 이는 일본이 조선 땅에 들어오는 빌미로 줬다. 구연호 선생은 날뛰는 외세의 모습을 보고 지인들을 규합해 상소를 올리는 등 백방의 노력을 했지만 기울어진 국운을 다시 세울 수는 없었다.

승산마을로 내려온 구연호 선생은 죽을 때까지 단 두 번의 외출을 했다고 전한다. 1905년 5월 순종(1874~1926년)이 경부선 철도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을 순행(巡幸)할 때 알현하려고 부산 외출을 했고, 1931년 손자 구 창업주가 진주 읍내에서 포목상으로 성공해 번창하자 격려차 들렀다.

생가를 들어서면 오른쪽에 구 창업주의 아버지 구재서 선생을 추모하는 '모춘당(慕春堂)'이란 사당(祠堂)이 있다. 구 창업주와 아들 구자경(具滋暻) 전 LG 명예회장이 6·25때 폭격으로 불타 없어진 생가의 일부 터에다 새로 지었다. 선대를 기린다는 뜻에서 구재서 선생의 호 춘강에서 '춘'자를 따왔다.

구인회 LG 창업주의 아버지 구재서 선생을 모신 모춘당

모춘당에는 춘강 선생이 내린 가훈(家訓)이 걸려있다.

구 씨 가문의 후대들에게 충효와 우애, 선비정신을 강조한 내용인데 ▲어버이 섬김에는 효성을 다하고, 임금을 섬김에는 충성을 다한다 ▲형제 간과 종족 사이에는 서로 좋아하고 따지지 마라 ▲선대 훈계를 삼가고 바르게 할뿐 변하게 하지 말라 ▲선비가 세상을 살아감은 도를 좋아하고 분수를 지키는 것이다 ▲작은 분을 참지 못하면 마침내 어긋나게 된다 등 10계 덕목이 새겨져 있다.

구 씨의 가문에서는 며느리나 사위를 맞으면 그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가훈을 새기고 가풍을 익히도록 한다. 행사는 주로 종가(宗家)의 맡며느리가 주도한다.

모춘당 정신은 지금의 LG그룹 사훈인 '인화경영'으로 이어졌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구 창업주의 생가는 훼손 우려로 일반인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현재 구 창업주 생가의 소유권은 능성 구 씨의 도원 수공파 제23세인 조만해 공종중이 갖고 있다. 제23세의 항렬은 ‘연’인데 구 창업주의 조부 구연호 선생이 이 항렬에 해당된다.

구광모 현 LG그룹 회장의 고조부가 구 창업주의 생가를 소유하고 관리를 하는 셈이다. 현대식으로 지은 바깥채엔 구 창업주의 먼 친척(70대 초반) 어르신이 살면서 집을 돌보고 있다.

또 구 씨 가문에서는 1년에 한 번 시제(時祭)를 지낼 때마다 이곳에 집안의 사람들이 모인다. 시제란 음력 10월에 5대 이상 조상의 묘를 찾아 내는 제사다. 제사는 LIG 구자원 회장의 본가에서 지낸 후 바로 옆집인 구 창업주 생가에서도 지낸다.

▶ 구 씨 가문의 다른 생가들

특별한 것은 구인회 LG 창업주의 처가가 그가 태어난 집의 바로 옆집이란 사실이다. 또 그 옆에는 GS그룹의 시조격이자 '만석꾼'인 허만정(許萬正) 선생과 그의 손자인 허창수(許昌秀) GS그룹 명예회장의 생가가 있다.

구 창업주는 14세 때인 1920년, 담 하나 사이인 옆집에 살던 허만식(許萬寔)의 맏딸 허을수(許乙壽) 여사와 결혼했다.

구 창업주는 이 연재의 중심 인물의 한 명인 허만정 선생과는 6촌 사위 관계다.

앞서 허만식 선생의 차남이 구 창업주의 고모와 결혼을 한 터라 두 집안은 겹사돈이 됐다. 훗날 허만정 선생의 셋째아들인 고 허준구(許準九) LG전선 명예회장도 구 창업주의 첫째동생인 구철회 LIG그룹 초대회장의 맏딸과 결혼했다.

두 집안은 모두 9번에 걸친 겹사돈을 맺어 지금은 촌수를 따지기 힘들 정도다.

요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옛날에는 집안 간의 정략결혼이 많아 이웃이나 이웃 마을에 사는 이들 간에 인연을 이었다.

구인회 LG 창업주의 생가 바로 옆집인 처가 대문. 구 창업주는 허만정 선생의 조카사위다. 정창현 기자

또한 구 창업주 생가 옆으로는 고 허준구 LG전선(현 LS전선) 명예회장의 생가가 있다. 허 명예회장은 지난 1947년 LG의 모태가 된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 창업 때 자금을 댄 아버지의 권유로 영업이사로 참여했다.

왼쪽에는 구 창업주의 바로 아래 동생인 고 구철회 LIG그룹 초대회장이 큰아버지의 양자(養子)로 들어가 살던 집이 있다. 고 구자원 LIG그룹 명예회장의 생가이기도 하다.

그 옆에는 쿠쿠밥솥으로 유명한 쿠쿠그룹(옛 성광전자)의 구자신(具滋信) 회장의 생가가 있다. 구 회장은 LG그룹의 2대 회장을 지낸 고 구자경 명예회장과는 14촌간이다. 마을의 맨 왼쪽에 위치한다.

마을의 한옥들은 모두 한결같이 잘 보존돼 있었다.

특히 구 창업주의 생가의 본채(방산정)는 120년 전에 지어져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쳤지만 화를 면했다. 두 가문이 평소 이웃들이 어려우면 성의껏 도와 좌우 이념이 지배하던 때에도 무사했다고 한다. 지금의 고택은 이후 구 창업주가 그대로 동쪽으로 옮겨 다시 지었다.

▶구인회 창업주의 아들

구인회 LG 창업주는 슬하에 6남 4녀를 뒀는데 모두 구 창업주의 생가에서 태어났다.

아들은 ▲고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첫째) ▲고 구자승 반도상사(LG상사) 회장(둘째) ▲구자학 아워홈 회장(셋째) ▲구자두 전 LB인베스트 회장(넷째) ▲구자일 전 일양화학 회장(다섯째) ▲구자극 현 엑사이엔씨 회장(여섯째) 등이다.

상남(上南) 구자경(具滋暻) 명예회장은 일제강점기였던 1925년 4월 24일 태어나 3년 전인 지난 2019년 12월 14일 9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승산마을 이 전 이장은 “구자경 회장은 승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 생전에 자주 내려와 생가 관리에도 신경 쓰고 동네 주민들을 만나고 했다"고 전했다. 그는 “생가가 훼손될 우려가 있어 가문에서 공개할 생각이 없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고 구자경 명예회장은 4남 2녀를 뒀고, 장남인 고 구본무(具本茂) LG그룹 명예회장, 회장과 구본능(具本綾) 희성그룹 회장, 구본준(具本俊) LX그룹 회장, 구본식(具本植) LT그룹 회장 등도 이 집에서 나고 자랐다.

구철회 전 LIG그룹 회장의 장남인 LIG 구자원 회장 생가 대문(왼쪽)과 구인회 LG 창업주의 생가 대문. 정창현 기자
승산마을 서남쪽 맨 끝에 위치한 쿠쿠전자 구자신 회장의 생가. 승산마을 한옥 중 가장 깔끔하다. 정창현 기자

위에서 언급했지만 구 씨 가문은 승산마을에서 1년에 한 번 시제를 지낼 때 모인다.

특별해 보이는 것은 허 씨와 구 씨 두 가문은 같은 날에 시제를 지낸다는 것이다. 허 씨 가문은 바로 옆집('만석군' 허만정 선생과 그의 아들들 생가)에서 시제를 지낸다. 그 때마다 두 가문의 사람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자주 만나지는 못 하지만, 두 가문 간의 돈독함을 지속 이어간다는 뜻이 담겼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마을을 찾는 발길이 점점 뜸해진다며 서운해 했다. 최근 들어서는 두 가문 사람들의 얼굴 보기는 무척 힘들다고 한다. 현재 LG그룹을 이끌고 있는 이는 구인회 창업주의 4대 후손인 구광모 회장이다.

생가 말고도 승산마을에는 학문을 숭상하는 구 씨 집안의 가풍을 접할 수 있는 곳이 여럿 있다.

선비들이 교유하던 '창강정(滄江亭)'과 구 씨 가문의 후손들이 공부하던 '양정재(養正齋)'다. 한 울안에 자리한다.

창강정은 구인회 LG 창업주의 할아버지인 구연호 선생이 주축이 돼 건립했다고 한다. 지금은 구 씨 대종중의 제각 역할을 하고 있다. 경남 함양 덕유산에서 발원해 진주를 거쳐 낙동강으로 흐르는 남강(南江)을 지수에서는 염창강(濂滄江)이라고 부르는데 창강정의 이름을 여기서 취했다.

양정재란 고려 예종 4년 국학(國學)에 설치한 7재의 하나로 춘추(春秋)를 공부하던 곳이다. 가문의 후손들이 학문을 배우던 곳이란 뜻에서 따온 것으로 여겨진다.

구 씨 대종중 재실인 창강정
창강정으로 들어서는 골목. 정창현 기자
창강정 입구

승산마을 구자표 현 이장이 지난 2월 6일 카카오스토리에 올린 '창강정' 시구를 옮긴다. 기자가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창강정]

고즈넉한 창강정에/ 집안곳곳 둘러보니/ 적막감이 맴돌구나

먼지쌓인 마루바닥/ 닭고쓸면 빛이나고/ 그냥두면 뽀오얗네

오랜만에 들렸건만/ 누구하나 반기는이 없네

처마자락 토종벌도/ 겨울잠에 푹빠졌네

바쁜일과 재춰두고/ 쉬엄쉬엄 마루딱네

반짝반짝 마루바닥/ 내마음도 반짝이네~~~

▶ 고 구본무 명예회장의 대곡면 외가 이야기

두 가문의 이야기는 거의 승산마을을 중심으로 이뤄지지만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진주시 대곡면 이야기도 있다.

고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부인 고 하정임 여사)의 처가는 승산마을에서 21.9km 떨어진 대곡면 단목(丹牧)리에 있다.

아들인 고 구본무 명예회장이 자랄 때 외가를 자주 찾아 마을 어르신들의 입에서는 지금도 일화가 자주 나오고 있다.

고 구본무 회장의 진주 대곡면 외가 대문. 지수초교 총동창회 제공
고 구본무 회장의 진주 대곡면 외가 모습. 지수초교 총동창회 제공

나이 지긋한 승산마을 주민들은 "구인회 창업주의 손자인 구본무 전 명예회장은 유년시절에 친가보다 외가를 더 좋아했다"고 전했다. 구본무 전 회장은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어릴 때 방학이면 걸어서 4~5시간 걸리는 외가를 찾곤 했다고 한다.

고 구본무 명예회장의 '단목 외가'는 솟을대문이 있는 중심채와 그 좌우에 담장으로 나눠진 아해채, 윗채 등 12채의 한옥이 있다.

꽤 오래된 한옥이다. 안채는 1864년에, 사랑채는 1871년에, 나머지 한옥은 1916년과 1923년 지어 조선 후기의 전통 한옥 형태를 갖추고 있다. 진양 하씨 담산 공종중의 소유로 돼 있어 담산고택으로 불린다. ​

고 구본무 명예회장이 프로야구 LG트윈스 선수들을 이곳에 초대해 ‘단목 행사’를 열었던 일화도 알려져 있다. 일설에는 고 구본무 명예회장이 어머니가 시댁에서 가서 낳았다는 말도 있지만 공식으로는 승산마을에서 났다고 적시된다.

▶ 허 씨와 구 씨 생가를 둘러본 소회

승산마을 두 가문의 생가와 본가를 연이어 살펴보았다. 일부 한옥에는 들어갈 수 없어 자취를 마음껏 기사에 녹여내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다. 코로나 등의 문제로 닫아놓았다고 한다. 다음을 기약한다.

“한옥 안에 들어갈 수 없으니 대문고리를 잡아 보는 사람도 있어요”

주민들로부터 이 말을 들은 취재반은 승산마을 방문객들은 두 가문이 잇고 있는 '삼가고 베품'의 정신과 '대부자의 기운'을 담아가고 싶은 마음 때문으로 여겼다. 취재반도 당연히 이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런데···.

승산마을을 취재하면서 떠나지 않은 생각이 이제 시작 단계인 '마을관광사업'이었다. 글로벌 관광지로 거듭날 수 있는 콘텐츠들을 두루 갖춘 승산마을에 대한 욕심이 가득차 올랐다.

마을이 부흥했던 구한말에는 기와한옥이 150채가 넘었다고 한다. 한옥을 둘러보는 돌담길도 5km 정도 된다. 남에게 베풀면서도 대부호가 된 두 가문의 정신도 마을 곳곳에 오롯이 깃들어 있다. 전국에서 이만한 다양한 스토리를 가진 곳이 드물다.

마을을 지금 그대로 두고 볼 수도 있고, 옛 마을 영화를 재현하는 것도 가치일 수 있다. 하지만 엄청난 마을 스토리를 보고 듣고선 머뭇거릴 이유는 없어보였다.

승산마을에는 고택들이 있던 자리가 논밭으로 변한 터가 많다. 취재반이 둘러본 바로는 잊혀진 옛 이야기를 그려낼 공터가 많았다.

취재 중에 옛 방앗간 주인의 자제가 옛것을 살리면서 부지에 4~5층 건물을 올려 공공기관이나 단체에 관리를 맡기겠다는 제안을 했다는 말도 들었다. 마을이 번성할 때는 방앗간이 3군데나 됐다고 한다.

실제 지난 3월 대선 때는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허경영(許京寧) 국가혁명당 후보의 생가를 보려고 대형 버스를 빌려타고 찾아온 방문객이 있었다. 이 전 이장은 한해에 몇 팀은 온다고 한다. 이처럼 지금에 살려볼 옛 이야기 거리가 많을 것이다.

최근에방문한 이들은 허경영 후보밭 가운데서 설명만 듣고 떠났다.

취재 과정에서 승산마을에 건립 중이던 한옥 게스트하우스가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방문객들이 한옥들이 늘어선 마을 토담길을 걸으며 도시 생활의 번잡함을 떨치고 쉬고 가도록 만든 숙박형 공간이다. 토담 너머로 성공한 기업가들의 흔적을 더듬고, 덤으로 부자의 기운도 품고 그러라고···. 한옥 게스트하우스는 지난달 22일 공사를 마무리했다.

※ 다음은 '허 씨 가문(3-3)' 글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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