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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경남뉴스 기자들이 푸는 '미주알고주알'] 수십년 만에 나타난 빈대···되새기는 정주영 회장의 '빈대론'

정기홍 기자 승인 2023.11.16 16:26 | 최종 수정 2023.11.17 16:31 의견 0

미주알고주알 어원이 흥미롭습니다. 미주알은 '창자의 끝 항문'을 뜻하는데, 미주알고주알은 '미주알'에 '고주알'을 합친 말입니다. 어문학계는 고주알이 미주알과 운을 맞추기 위해 덧붙인 말로 해석합니다. 창자 밑구멍의 끝인 미주알은 '눈으로 보기 어려워 숨은 사소한 일까지 속속들이 말하거나 캐묻는 것'을 뜻합니다. 더경남뉴스 기자들이 숨은 기삿거리를 찾아 '사랑방 이야기식'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이번 '미주알고주알'에서는 요즘 이슈화 한 빈대와 현대그룹 정주영 창업주에 얽힌 이야기를 엮어봅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수십년 동안 사라졌던 빈대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모양새입니다.

얼마 전만 해도 수도권을 중심으로 띄엄띄엄 발견되었는데 남하를 하는 양상이라고 합니다. 자칫 전국에서 '빈대 기승'이란 말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방역 당국은 이미 빈대가 영국, 프랑스 등 유럽에서 창궐하고 있고 이들 지역인들의 가방과 옷 등 소지품에서 들어와 옮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방의 어느 대학에선 여름방학 때 영국 교환 학생이 머물다 간 기숙사에서 빈대가 나왔다니 설득력이 있습니다.

빈대 '썰'(이야기)을 풀려면 빈대를 알아야 하기에 먼저 살펴봅니다.

빈대는 흡혈, 즉 사람의 피를 빨아먹습니다. 그런데 밤잠을 설치게 하는 모기보다 수 배는 더 빨아먹고 더 간지럽답니다.

이는 빈대가 모기와 달리 혈관을 잘 찾지 못해 2~3곳을 연달아 물기에 때문입니다. 주로 잘 때 사람의 피부를 빨아 괴롭히지요. 대체로 침대, 매트리스, 이불 등에 서식합니다. 그러고 보니 사람 피를 빨아먹고 사는 것들이 주로 밤에 활동라는가 봅니다.

빈대가 가장 빨리 자라는 온도는 27~28도이며 이때는 알에서 부화해 성충이 되기까지 36일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온도가 18~20도일 때 무려 9~18개월 생존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피를 빨아먹지 못해도 최대 150일간 삽다고 하네요.

하지만 고열에 매우 약합니다. 50도 이상만 되면 죽습니다. '고온 스팀', '고온 헤어드라이'가 방제 수단으로 언급되는 이유이지요. 거꾸로 영하 20도 이하에서도 30분 정도밖에 못 삽니다.

다음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와 빈대 이야기입니다.

정 창업주는 한국을 10대 경제강국을 만든 주역이지만 '빈대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이른바 '정주영의 빈대론'입니다.

정 창업주는 직원들을 혼낼 때 "빈대만도 못한 놈"이란 말을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정 창업주가 인천 부둣가에서 하역 막노동을 할 때 일입니다. 합숙소에 빈대가 꽤 극성스러웠나 봅니다. 말하자면 드글드글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당시 시절도 그렇고, 생활 여건이 꽤 열악했겠지요.

합숙 노동자들은 잠을 밥 먹고 난 밥상 위에서 잤는데 밤새 빈대가 밥상 다리를 타고 올라와 물어 간지러워서 견디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능히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합숙을 하던 사람들이 궁리 끝에 양재기에 물을 담아 상다리를 가운데 담가놓고 잤습니다. 빈대가 바닥에서 상다리를 타고 오르지 못하게 하려는 묘수였지요. 덕분에 하루 이틀간은 잠을 제대로 청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빈대는 집요했습니다.

자다가 간지러워 불을 켜고 보니 빈대들이 옆 벽을 타고 올라가 자는 사람들의 몸에 툭툭 떨어졌다고 합니다.

질병관리청

정 창업주는 이후 사업을 하는 내내 그때 본 '빈대의 집요함'을 떠올렸고, 자주 인용을 했다고 전합니다.

밀어붙이기식 정 창업주의 일 타입을 보면 무슨 말인지 짐작됩니다.

인간이 하찮게 여기는 빈대도 살기 위해 저토록 머리를 굴리고 처절한 노력을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 무얼 못하겠나 하는 생각이지요.

여기에 더해 "실수는 있어도 실패(포기)는 없다"든가 "이봐, 자기. 해봤어?"로 유명한 어록들이 등장합니다.

빈대 일화는 정 창업주의 또다른 일화들을 이어서 냅니다.

경부고속도로 초단기간 건설, 현대중공업 건설 당시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일화, 부산 유엔묘지 잔디 입히기 일화 등 많습니다. 물론 현대그룹의 주력인 자동차업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장면

1975년 12월 생산된 ‘포니’의 차체를 공개한 행사. 포니는 현대차의 첫번째 독자 생산모델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국산 자동차다.

그의 '빈대론 썰'을 풀다보니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입에 오르내리던 '낡은 구두' 이야기가 다시 떠오릅니다. 구두가 닳지 않도록 징을 박고 굽을 갈아 30년을 신고 다녔다고 알려져 있지요.

정 창업주에게서의 빈대는 매사에 꾀를 부리지 않고 우직하리만큼 밀어부치는 그의 사업관으로 깊숙히 자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미주알고주알 '잇발(말)'을 여기까지 풀다 보니 '정주영 창업주'보단 '정주영 회장'이 훨씬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정주영 하면 '회장'이 바로 와닿습니다.

다음은 정 창업주의 부산 유엔군묘지(부산 유엔기념공원) 일화입니다.

'창업주'를 '회장'으로 돌려서 써 보겠습니다.

1952년 겨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부산 유엔군묘지를 방문하기로 했는데 정 회장에게 '빛바랜 묘지 잔디를 푸르게 보이게 하라'는 특명이 떨어졌습니다.

요즘처럼 잔디를 기르거나 겨울에도 푸른 잔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고민 끝에 번뜩 떠오른 게 겨울에도 푸른 색을 띠고 있는 보리밭이었습니다. 정 회장은 푸른 보리를 떠와 깔았고 정부 당국자는 이를 보고 감탄을 했다고 하지요. 주위에선 놀랐지만 정 회장이 농촌에서 자라 아이디어가 어렵지 않게 떠오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유엔기념공원. 재한유엔기념공원관리처 제공

현대중공업(당시 울산조선소)의 조선소 건설 일화도 빈대론과 관련지을 수 있습니다.

정 회장은 허허벌판 울산 앞바다를 메워 조선소를 짓기로 하고 외국 돈을 구하려 다녔지요. 그는 1970년 영국 런던으로 날아가 은행 관계자에게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조선소 건설을 위한 차관 도입을 이끌어냈습니다. '무일푼'이지만 세계 최초의 철판선을 만든 창조적인 민족의 후손이고 돋만 꿔주면 기필코 조선소를 완공해 최신 배를 수출하겠다는 믿음을 강하게 심었다고 합니다.

1974년 조선소 건설과 유조선 건조를 동시에 한, 세계 조선사에서 없었던 기록을 세웠습니다. 도크가 일부 완성되면 바로 그 위에서 선박을 제조하고 다른 곳에선 도크를 만들고 했던 것이죠. 약속한 기일에 배를 완공해야 했기 때문이지요.

충남 서산 천수만을 메워 농지로 만든 간척사업도 그의 업적에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물살이 거세 긴 방조세 사이를 잇는 마지막 작업에 폐 유조선(22만 6000t급)을 울산에서 바다로 끌어와 이를 가라앉혀 물의 흐름을 멈추게 한 뒤 모래와 흙을 퍼부어 막았습니다. 여기서도 이른바 ‘정주영 공법’이란 기발한 발상이 나왔지요.

충남 서산 천수만 간척사업을 현장에서 지휘하는 정주영 현대 창업주

소양강 다목적댐(1967~1973년) 또한 정 창업주의 남다른 발상이 통한 사업입니다. 당시 설계와 기술 용역을 맡았던 일본의 업체는 콘크리트댐을 제안했지만 철근과 시멘트 대신 주변에 널린 모래와 자갈로 쌓는 사력댐을 관철시켰습니다. 공사비를 무려 30% 절감했다고 합니다.

트럭에 소떼 싣고 방북한 것도 그가 만들어낸 이벤트입니다. 1998년 6월에 1차 500마리, 이어 10월에 2차 501마리 등 1001마리였습니다.

그의 억척같은 사업 행적을 살펴보니, 학벌 등에 좌절하는 지금의 사회라면 과연 정주영이란 인물이 나왔을까 하는 의구심도 갖게 됩니다. 물론, 시절이 요구하는 인물상은 다릅니다.

그는 때마다 당당히 말했습니다.

“나는 인간이 스스로 한계라고 규정짓는 일에 도전해 그것을 이루어내는 기쁨을 보람으로 기업을 해왔고, 오늘도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서산 간척지 사업 직후)

“무슨 일을 시작하든, 된다는 확신 90%와 반드시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 외에 안될 수 있다는 불안은 단 1%도 갖지 않는다”(울산조선소 건설 이후 언론 인터뷰)

2021년 정주영 현대 창업주 별세 20주년 온라인 추모사진전 모습. 이상 현대자동차 제공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약력

1915년 강원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출생
1924년 송전소학교 입학
1931년 네번째 가출 중 첫 가출(원산 고원 철도공사현장)에서 일함.
1932년 세번째 가출(경성실천부기학원 등록)
1933년 네번째 가출(인천부두 등에서 막노동)
1934년 쌀가게 서울 '복흥상회' 취업
1938년 복흥상회 인수해 경일상회 시작
1940년 아도서비스 자동차 수리공장 인수(서울 서대문구 아현동)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 설립(서울 중구 초동)
1947년 현대토건사 설립
1950년 현대건설주식회사 설립(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사 합병)
1957년 한강 인도교 복구 공사
1964년 충북 단양시멘트 공장 준공
1967년 현대자동차(주) 설립
1970년 현대시멘트(주) 설립. 경부고속도로 개통
1973년 현대조선중공업(주) 설립
1975년 현대미포조선(주) 설립
1976년 아세아상선(현 현대상선) 설립
1981년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24회 올림픽 개최지 서울 확정)
1984년 충남 서산간척지 물막이 공사에 '정주영 공법' 적용
1989년 북한 방문해 금강산 공동개발 의정서 제시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 출마 후 낙선
2000년 현대그룹 경영권 다툼(형제의 난)
2001년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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