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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남명 조식 선생의 '유두류륙' 번역본 '조식의 지리산 유람기, 유두류록'

정창현 기자 승인 2023.11.23 06:58 | 최종 수정 2023.11.23 16:31 의견 0

강직한 조선 중기 유학자로 알려진 남명 조식 선생이 지리산을 유람하며 직접 느끼고, 몸으로 직접 실천해 보고자 했던 것들을 담은 '유두류록(遊頭流錄)' 번역본인 '조식의 지리산 유람기, 유두류록(遊頭流錄)'이 출간됐다. 경남 창원 소재' 뜻있는 도서출판' 출간했고, 이상영 씨가 주해해 옮겼다. 188쪽에 1만 3000원.

조식 선생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체득한 지리산을 이야기한다. 1558년 4명의 벗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며 썼다.

조식 선생은 현재 지명으로 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서 나고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서 임종을 했다. 평생을 이론보다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강한 학풍을 수립했다.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받았으나 대부분을 거절하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다. 그의 제자들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정인홍, 김우옹, 정구 등 수백 명에 이른다.

■참고 자료

▶책 소개

조선의 지식인들은 왜 지리산에 갔는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생각했는가?

조선시대 산수 유람기의 전범(典範)!

조선의 지식인들은 지리산을 방장산(方丈山)으로도 불렀다. 지리산을 신선이 살고 있는 곳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유학자들에게 지리산은 온갖 꽃이 피고 청학이 날아오르는, 답답한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어떤 이상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조식에게 지리산은 현실 밖의 신선이 사는 곳만은 아니었다. 기이한 경치를 감상하는 곳만은 아니었다.

조식은 현실적인 삶과 동떨어진 이야기는 공허하다고 생각하는 유학자였다. 조식은 지리산을 유람하면서도 거경(居敬)과 행의(行義)를 강조한 유학자로서의 이념을 잃지 않는다. 조식에게 지리산은 자신의 심신을 닦아서 덕을 쌓는 계기를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일에 대응하고 사물에 접하는 응사접물(應事接物)’의 공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은 옛사람의 자취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무도한 세상에서 당당한 삶을 살았던 현자들의 역사가 남아 있는 곳이었다.

조식은 지리산을 유람하며 자신이 책에서 보았던 것을 마음으로 직접 느끼고, 몸으로 직접 실천해 보고자 했다. 그리고 '유두류록'을 통해 자신이 체득한 지리산을 이야기한다.

조식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유학자 이황(李滉)은 조식의 '유두류록'을 읽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명승을 두루 찾아다니며 구경한 것 외에도 일에 따라 뜻을 붙여놓았습니다. 분개하고 격앙하는 말이 많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들도록 합니다. 뿐만 아니라 조식의 그 사람됨을 상상해 볼 수 있도록 합니다. 특히 하루 동안 햇빛을 쪼여주는 것만으로는 유익할 것이 없다거나, 위로 올라가는 일이나 아래로 종종걸음치는 일은 한번 발을 들어 올리는 순간에 달려 있다는 말은 지극히 옳은 말입니다. 또 명철(明哲)한 현자들의 다행과 불행에 대한 이야기는 진실로 일천 년 영웅들에 대한 탄식을 자아낼 만합니다.”

이후 조식의 지리산 유람과 '유두류록'은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하나의 전범(典範)으로 여겨진다. 많은 이들이 지리산을 찾아 조식이 보았던 것을 보고 조식이 느꼈던 것을 느끼고자 한다. 조식과 같은 생각을 담은 유람기를 쓰고자 한다. 평생 이를 소원한다.

조식의 '유두류록'이 조선시대 산수 유람기의 흰눈썹(白眉)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그래서이다.

▶저자 소개/ 조선의 유학자 조식

1500년대 경상도 일대의 산림에 머물며 학문에 몰두했던 유학자다. 성리학 이론보다는 실천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황과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당대의 학문적 위상이나 이후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이황 이상이었다.

여남은 번 이상 벼슬을 제수 받았지만 단 한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간신들이 권력을 잡고 얼토당토않은 정치를 펼치는 때에 벼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555년 명종에게 '을묘사직소'로 일컬어지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당대 조정의 정치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1558년 네 명의 벗들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고 '유두류록'을 썼다. 이 유람기에서 “우리는 모두 길 잃은 사람들”이라고 썼다. 경(敬)과 의(義), 쇄소응대(灑掃應對)를 강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1501년 경상도 삼가현(현재의 합천군 삼가면)의 외가에서 태어났고, 1572년 지리산 덕산동(현재의 산청군 시천면)의 산천재(山天齋)에서 일생을 마쳤다.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이다. 제자들이 그의 글을 모아 묶은 '남명집'을 통해 그의 삶과 학문을 접할 수 있다.

▶목차

◎ 조식의 <유두류록>에 대하여

주해(注解) 번역 유두류록

㊀ 벗들과 함께 지리산으로

十一㊐ 유람 길에 나서다

十二㊐ 진주목 가방의 이공량 집에 머무르다

十三㊐ 이공량의 집으로 김홍이 오다

十四㊐ 이정의 집에서 갖가지 음식을 먹다

㊁ 현자들의 다행과 불행

十五㊐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오르다

十六㊐ 한유한의 삽암, 정여창의 악양정을 지나다

㊂ 겹겹의 비와 구름 속

十七㊐ 쌍계사에서, 김홍이 급히 떠나다

㊃ 콸콸 살아있는 청학동

十八㊐ 비가 내려 쌍계사에 머무르다

十九㊐ 청학동에 올라 불일폭포를 보다

㊄ 격렬하게, 가장 아름답게

二十㊐ 신응동으로 들어가 마음을 씻다

二十一㊐ 신응사에서 냇물을 구경하다

二十二㊐ 부역을 줄여달라는 편지를 쓰다

㊅ 신묘한 힘을 응집시키는 곳

二十三㊐ 지리산에서 나가 악양현 현창으로 가다

㊆ 세 군자, 하나의 덕

二十四㊐ 삼가식현을 넘어 조지서의 옛 마을에 이르다

㊇ 박덩굴 같은 신세로

二十五㊐ 벗들과 이별하다

축어(逐語) 번역 유두류록

▶책 속으로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이 우리 집에 있는 나의 물건을 갑자기 빼앗아가 자신의 소유로 삼는데도 이를 알지 못합니다. 이는 우리가 흐리멍덩한 꿈의 세계에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 38쪽

나라가 이제 막 망해갈 때는 임금이 현자를 좋아하는 일 따위는 없습니다. 아!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 43쪽

이날은 종일토록 큰비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어두컴컴한 구름이 사방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산 밖 인간 세상에서 보면 몇 겹의 비와 구름이 이곳을 막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마치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 관아의 공안(公案)과도 같았을 듯합니다. - 62쪽

여암은 “세 번 악양 땅에 들어갔으나 사람들은 나를 알지 못한다”고 읊었고 또 “낭랑하게 시를 읽으며 동정호 위를 날아 지나간다”고 읊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스스로를 감추는 천둔검법(天遁劍法)을 깨우쳐 세상을 돌아다니며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했습니다. 여암과 비교한다면 나는 아직 크게 미치지 못했습니다. - 76쪽

약수(弱手) 일천 리는 백약(百藥)이 자라는 땅을 둘러싸고 있는 물입니다. 이 물은 기러기 털조차 뜨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건너갈 수 없습니다. 누구도 건너갈 수 없습니다. - 82쪽

'맹자'에서는 “하루 동안 햇볕을 쪼여 주고 열흘 동안 춥게 내버려 두면 생생하게 자랄 수 있는 생물이 없다”고 말합니다. 군자가 군자인 것은 날마다 높고 밝은 곳으로 나아가기 때문이고 소인이 소인인 것은 날마다 낮고 흐린 곳을 찾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씻지 않고 하루 이틀 마음을 씻는 것만으로는 유익할 것이 없습니다. 나날이 새롭게 하지 않고 어느 날 하루만 새롭게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 99쪽

부역에 나가는 승려들의 발걸음으로 산길은 오히려 북새통을 이룹니다. 부역에 나가서는 먹을거리조차 제공받을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은 모두 자신이 먹을 쌀자루를 짊어지고 다닙니다. 토목 공사와 공물 생산에 시달린 승려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배울 겨를도 없습니다. 결국 모두 절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습니다. - 102쪽

“산은 지리산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한눈에 바라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아도 오히려 볼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현명함이라면 어떻겠습니까?” - 122쪽

지난 열흘,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었습니다. 장암 포구에서 이곳까지 삼백 리 길을 지나왔습니다. 그리고 어제와 오늘 하루 사이에 세 군자의 흔적을 만나 보았습니다. - 132쪽

당나라 시인 왕발(王勃)은 “부평초와 같은 사람들이 서로 만났으니 누가 이 길 잃은 사람들을 슬퍼해 주겠는가?”라고 읊은 적이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모두 길 잃은 사람들입니다. 어찌 나만 세상일을 잊지 못하고 정처 없이 사방을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나만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 147쪽

▶출판사 서평

어렵기로 유명한 조식의 '유두류록'을 실감나는 ‘주해 번역’으로 읽는다!

조식의 '유두류록'을 읽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몇 편의 한글 번역문이 나와있지만, 이 번역문조차 읽기 어렵습니다. 기본적으로 한문으로 쓰인 글은 많은 전고(典故)를 포함합니다. 전고란 경전이나 역사책에 나오는 사건과 인물, 과거의 제도나 관습 등을 말합니다. 전해오는 성현의 말씀이나 옛날의 사실 이야기를 근거로 삼아 현재의 일을 말하고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한 것입니다. '유두류록'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까닭에 전고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유두류록'의 기본적인 문맥조차 파악하기 힘듭니다.

게다가 글쓰기에 대한 조식의 태도가 우리의 어려움을 가중시킵니다.

조식은 표현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바람처럼 달리고 우레처럼 빨리 써서 더 손대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전고를 끌어오면서 또 이 전고를 변형시키기까지 합니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조차 ‘기이한 표현과 깊은 함축(奇辭奧義)’를 제대로 읽어내기 힘들다고 하소연할 정도였습니다. 조식은 글과 말로 표현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조식은 “말은 간략한 것을 귀하게 여긴다(言以簡爲貴)”고 생각했습니다. 학자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스스로 이치를 터득하여 몸으로 실천하는 일입니다. 일상적인 현실의 일을 버리고 높은 이론을 입으로만 말하는 구상지리(口上之理)의 학문은 껍데기일 뿐입니다.

이에 이번 번역서에서는 현재의 독자가 '유두류록'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글자 한 글자 가능한 한 자세하게 풀이하고자 합니다. 전고의 경우, 어떤 상황에서 이 전고가 만들어졌는지 전고의 출전과 유래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해당 전고의 출전은 물론, 때에 따라서는 원문의 일부까지 인용하여 소개합니다. 당대 사람들의 법과 제도, 지방 행정, 의식주, 생활환경 등에 대해서도 부연합니다. 500년 전의 유학자들이라면 대부분 이미 알고 있어 굳이 길게 말할 필요가 없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에게는 별 다른 사전 지식이 없다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생소하기만 한 것입니다. 이 책의 의도는 이러한 생소함을 가능한 한 줄이는 것입니다.

‘포계(匏繫)’라는 말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존의 번역은 이 말을 보통 ‘매달린 박’이라고만 풀이하고 맙니다. 그런데 원문은 물론 번역문을 보아도, 현재의 우리는 이것이 무슨 말인지 갈피를 잡기 힘듭니다. 이 표현이 포함된 문장 전체를 읽어보면 더욱 난감합니다.

“시골집에 매달려 있는 박처럼 걸어 다니는 시체가 되어버렸다.” 무슨 난해한 현대 시의 한 구절인가 싶습니다. 사실 ‘포계(匏繫)’는 '논어'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을 줄인 것입니다. “내가 어찌 박덩굴이겠는가? 내가 어찌 한곳에만 매달려서 아무것도 먹지 않을 수 있겠는가?(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 이로써 이 ‘포계’라는 표현은 흔히 ‘뜻을 펼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말로 쓰입니다. 조식 또한 이런 뜻으로 썼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번역은 ‘매달린 박’이라고만 풀이할 뿐 더 이상의 정보는 제공해주지 않습니다. 각주조차 달아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현재의 우리는 한문학자가 아닌 이상 이 말의 출전이 '논어'라는 사실조차 알기 힘듭니다. 이번 번역서에서 이 전고의 출전, 이 전고의 원문과 기본적인 의미 등에 대해서까지 세세하게 풀어준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 책은 조식의 '유두류록'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번역서라 하기에는 지나친 점이 있습니다. 번역서가 아니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이 책은 구구절절 소상하게 풀이합니다. 풀이하고 또 풀이합니다. 때로는 원문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내용까지 말합니다. 당연히 이와 같은 번역은 위험합니다. 조식이 '유두류록'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를 왜곡할 수도 있고 터무니없는 오류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의도와는 다르게 지루하고 장황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독자를 위해 이런 위험은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식에게 지리산은 콸콸 살아 있는 생명의 공간이었습니다. 생기발랄한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두류록'은 이러한 지리산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 번역서는 다만, 이와 같은 이야기를 현재의 독자들에게도 실감나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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