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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들 밥 챙길 생각에 그만"…자전거 훔친 고교생의 말 못했던 집안 속사정 들었더니

'투병' 엄마 대신 동생들 돌봐
14평 임대아파트 사는 7남매의 맏이
경찰, 관계 기관과 협의해 복지 지원

천진영 기자 승인 2024.02.26 04:06 | 최종 수정 2024.02.26 04:07 의견 0

경기 오산시에서 자전거를 훔친 고교생의 사연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고등학생 A 군은 지난해 11월 20일 오산경찰서의 란 지구대를 찾아 이틀 전 자전거를 훔쳤다며 용서를 빌었다.

그는 저전거를 훔쳐 타고간 경위를 밝혔다.

A 군은 이틀 전인 18일 밤 9시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걸어 30분 거리의 집으로 가다가 모 아파트 단지 자전거 보관대에 잠금 장치 없이 세워져 있던 자전거 한 대를 타고 갔다.

자전거 주인은 몇 시간 뒤 "누군가 내 자전거를 훔쳐 갔다"며 112에 신고했고, 경찰의 수사가 시작됐다.

경기 오산경찰서 전경. 경기남부경찰청

그런데 경찰 수사에 나서기 전에 A 군이 자전거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지구대를 찾아 잘못을 털어놓았다. 자전거 주인이 경찰에 신고했다는 것을 알려준 것으로 보인다.

A 군은 "친구가 타던 자전거와 비슷하게 생겨 친구의 자전거로 착각했다. 잠시 빌려 타려고 한 것인데, 뒤늦게 다른 사람의 자전거라는 사실을 알고 돌려줬다"고 진술했다.

그는 이어 "일을 끝내고 귀가하다가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아, 빨리 동생들의 밥을 챙겨줘야 한다는 생각에 서두르느라"라며 말끝을 흐렸다.

지구대는 A 군의 집안 사정이 꽤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사건 서류는 상급기관인 오산경찰서 여성청소년과로 보냈다.

A 군은 6남 1녀 다자녀 가정의 장남이었다. 고등학생인 A 군은 집안 생계를 위해 집 근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A 군의 아버지는 물류센터에서 다니고 어머니는 심부전과 폐 질환으로 투병 중이었다. 집안 사정이 이렇다 보니 중학생·초등학생·유치원생·생후 7개월 된 젖먹이 등 6명의 동생은 A 군이 돌보는 시간이 많았다.

9명의 가족은 14평짜리 작은 국민임대아파에 거주해 주거 환경도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A 군 아버지가 월 소득이 있고 차량도 보유하고 있어 기초생활수급이나 차상위 등 취약계층 대상이 아니었다. A 군의 부친은 "애가 많고 아내를 자주 병원에 데려다줘야 해 차량이 꼭 필요해서 보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A 군의 가정이 복지 사각지대에 있다고 판단, 지방자치단체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보고 여러 차례 가정 방문을 하며 구체적인 가정 형편을 조사했다.

이어 주민센터, 보건소 관계자와 함께 A 군의 보호자를 면담하고, 아이들의 건강 상태를 살폈다. 심리상담도 했다.

이어 오산시, 오산경찰서, 주민센터, 청소년센터, 보건소, 복지기관 등 7개 기관은 지난 6일 통합 회의를 열고 A 군 가정에 실질적인 복지 지원을 하기로 결정했다.

생활지원으로는 긴급복지지원(320만원×3개월), 가정후원물품(이불, 라면 등), 급식비(30만원), 주거환경개선(주거지 소독), 자녀 의료비(30만원)·안경구입비(10만원) 등을 지원했다.

또 교육지원으로는 초·중등 자녀(3명) 방과후 돌봄 제공, 중학생 자녀 대상 운동프로그램 제공 및 진로 상담을 했고, 주거지원으로는 기존 주택 매입임대제도(최대 8년 임대)를 지원할 수 있는지 검토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A군이 경찰에 고맙다는 뜻과 함께 앞으로 중장비 관련 기술을 배워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동생들을 보살피겠다는 말을 전해왔다"며 "경찰은 향후 7남매가 건강하게 잘 자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 위기청소년 발굴 사례는, 자전거 절도 사건에서 범인 검거 및 피해품 회수에만 그치지 않고, 범죄소년이 처한 가정 환경 등을 면밀히 살펴 복지 사각지대를 찾은 사례"라고 덧붙였다.

한편, 경찰은 A군의 자전거 절도 사건과 관련, 지난달 11일 선도심사위원회를 개최했다.

선도심사위는 소년이 저지른 범죄 중 사안이 경미하고 초범인 경우, 피해자와 합의한 경우 등에 한해 사건 내용과 동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 훈방·즉결심판·입건 등의 처분을 내리는 역할을 한다.

선도심사위는 A군에게 즉결심판 처분을 내렸다.

최근 법원은 A군에게 벌금 10만원의 선고를 유예했다. 선고유예는 가벼운 범죄에 대해 일정 기간 형의 선고를 미루고, 유예일로부터 2년이 지나면 사실상 없던 일로 해주는 판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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