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소월님의 시를 소개합니다.
소월의 시야 학창시절부터 접한 '진달래꽃'을 비롯해 '초혼' '산유화' '접동새' 등 유명한 시가 워낙 많습니다.
'먼 후일'은 정서적으로 소월의 시 '진달래꽃'과 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진달래꽃)
'헤어짐과 그리움'의 분위기가 흠뻑 적셔지는 시입니다.
이 시에서는 '헤어짐'이 모든 분위기에 관통하고 관여를 하고 있습니다. 헤어진 후, 그 그리움에 한없이 빠져서 그래도 잊지 않고 있다며 반어법으로 변명하는 애틋함이 절절이 묻어나네요.
감상해 봅니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는 시구대로 풀이하면, 훗날 다시 만날 땐 "잊었었다"고 말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는 반어입니다. 이별 후 그토록 바라던 재회 상황을 가정한 것이지요. 재회를 간절히 바라고 있고, 재회 때는 "잊지 못했다"고 말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냅니다.
이어지는 시구에서도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라며 헤어짐-그리움의 속마음을 실토하겠답니다.
소월은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에서 왜 찾지 않았냐고 다그치면 자신이 그리던 님을 믿을 수 없었다며 님을 탐살(탓의 진주 사투리)합니다. 님에 대한 그림움이 진하게 그려지네요.
마지막 시구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아니 잊고/그 훗날 그 때에 "잊었노라"'고 합니다. 끝까지 반어법을 구사해 마무리하네요.
재회할 때엔 지금까지 전혀 잊지 않았다는 마음을 강하게 내놓습니다. 말 표현과 속내가 어긋집니다.
소월의 짧은 시 한편을 감상했습니다. 시구 속의 '님'의 대상은 연인일까요? 나라일까요? 그가 살았던 시절이 일제강점기란 점에서 잠깐 멈춰 서서 언질을 해봤습니다.
해석의 몫은 읽는 이의 판단으로 남겨야지요. 어떤 평론가가 답을 달겠습니까?
'먼 후일'은 소월이 1920년(18세)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다닐 때 '학생계(學生界)'에 처음 발표한 시입니다. 3음보 민요풍으로 이별의 슬픔과 임에 대한 사랑을 반어법으로 잘 나타낸 시입니다.
소월은 오산학교(당시 4년째) 다닐 때 같이 수학을 하던 '오순'이란 여학생과 사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월은 이미 '홍단실'과 결혼한 상태였지요. 이런 의미로 이 시의 대상을 '연인'으로 해석하면 한결 와닿긴 합니다. 소월의 대표시 중 하나인 '초혼'은 오순의 장례식 참석 직후 쓰여졌다.
독자분들도 헤어진 첫사랑이 애틋해지면 한번 더 읽고 그리움에 젖어보시기 바랍니다.
시인 소월(1902~1934년)은 32세에 생을 마감해 요절했다는 표현이 맞을 듯합니다.
그는 일본 도쿄상과대(현 히토쓰바시대)로 유학 갔으나 입학 직후 관동대지진(1923년 9월 1일)과 일본의 한국인 학살사건 발생 등으로 신변 위험을 느끼고 이듬해 중퇴 한 뒤 귀국했습니다. 이후 고향 정주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하다가 문을 닫은 뒤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며 술에 의지하다가 193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소월은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토속적인 한과 정서를 잘 담아낸 시들을 써냈습니다. 한국 서정(抒情·자기 감정이나 정서)시의 원류, 민족시의 발원지로 불리는 대표시인입니다. 또 '진달래꽃'은 고교 교과서에 맨 처음 실렸고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개여울'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등 소월의 많은 시는 노래로도 불렸습니다.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인데 본명보다 호인 소월(素月)이 더 잘 알려져 있지요. 소월은 본디 소, 흰 소(素)와 달 월(月)로 '흰 달'이란 뜻입니다. 요절을 해 제대로 된 사진이 별로 없습니다.
문학의 스승인 김억의 영향으로 문단에 등단했고, 1922년 '개벽'에 그의 대표작이자 국민시로 자리한 '진달래꽃'을 발표했습니다. 진달래꽃은 국민 애송시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지요.
주로 민요적인 서정시를 썼으며 작품에는 '산유화(山有花)' '접동새'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등이 있고 시집으로는 '진달래꽃' '소월시집'이 있습니다. 김소월 문학관은 충북 증평에 있습니다
참고로 시는 단편을 의미하고, 시집은 여러 작품을 한권의 책에 수록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