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시절 장날에 아부지(아버지) 따라 소 몰고 20리 길을 갔다오고 했던 추억이 많은 곳이제"
기자가 경남 진주시 동부 지역에 있는 '반성 5일장'을 취재차 들른다고 하자 60대 후반의 지인 어르신이 전한 말이다. 어르신이 말한 20리길이란 옛 경전선 진성역에서 반성 소전(우시장·소를 팔고사는 시장)까지 8km 정도의 길로, 소를 몰고가면 짐짓 2시간 걸리는 거리다. 지금은 폐선된 철로가 자전거길로 바뀌어 자전거를 타면 30분 정도 걸린다.
"어릴 때니 따라가기 싫었제. 내 뺄 수는 없는 기고···. 소전 주위엔 국밥집이 몇 곳 있었어. 소를 판 큰 돈이 왔다갔다 하니 장날엔 엄청 붐볐지. 선친은 큰소를 팔고서 송아지를 사고 남은 돈을 보케토(호주머니)에 넣고 국밥집에 들러 막걸리 몇 사발에 기분 좋게 취하시고, 난 송아지를 몰고, 그 먼길을 우리 부자는 걸어 왔어. 날이 어둑해질 무렵 집에 도착하지. 물론 아부지 옆에서 시장터 돼지국밥 한 그릇 얻어뭇지. 가물가물하는 추억이제. 취재를 잘 하면 좋은 글이 나올낀데, 당시를 아는 사람이 있을지···"
어르신의 말씀을 듣다보니 궁금증과 기대감에 취재 구미(口味·호기심)가 더 당겼다. 촌동네 시장이라고만 알고 있는데 우시장이라니···. 이를 테면 이효섭이 쓴 소설 '메밀꽃 필무렵'의 두메산골 강원 평창의 봉평장 이야기를 듣는 듯했다. 지금의 시간이 시계의 태엽을 되감아 옛날 그 당시로 달려가 순간 멈춰서 줄는지?
경남 진주시 진성의 더경남뉴스 편집국을 출발했다. 그냥 들르던 때와 취재차 가는 마음은 사뭇 다르다. 9.9km, 25리 길을 차로 15분 정도 걸려 반성시장에 도착했다.
▶ 반성시장 현황
반성시장은 진주시 일반성면 창촌리, 진주~마산간 구(舊)도로 옆에 있다. 이쪽 지역 사람이면 잘 아는 옛 반성역에서 700m 거리이고, 반성버스터미널에서도 걸어서 10분 정도밖에 안 걸린다.
시장 입구에서 기와 지붕을 얹은 '반성시장'이란 큼지막한 간판이 기자를 맞는다. 간판엔 3일과 8일이 장날이란 문구도 써넣어 5일장임을 알려준다. 시장 건물을 둘러싸고 자리한 좌판의 분위기는 영락없이 시골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반성시장은 진주시 도심에서 창원으로 가는 쪽인 진주 동부 지역에 위치한 중형 규모의 시장이다. 좌판 등 30개 안팎의 가게가 있고 주요 거래품은 인근 주민들이 직접 생산한 농특산물이 대부분이다. 특히 좌판 물품들이 그러하다.
노천 시장 형태로 손님을 맞다가 60년 전인 1962년 7월 3일 정식 시장으로 개설돼 한동안 진주시 동부 5개면의 상업 중심지 역할을 했다. 지금은 시장이 현대화 돼 천장을 장옥형으로 만들어 사시사철 날씨에 관계없이 가게를 열 수 있다.
항시 개장은 하지만 여느 시골장이 그렇듯 5일마다 장날이 정해져 있어 매월 끝자리가 3일과 8일이면 인근 지역 주민들이 어김없이 찾아 시장터는 늘 붐빈다. 한달에 최소한 6일 이상은 장이 선다.
지금도 중노년층에선 옛 5일장을 기억하며 찾고 있어 옛 시장 정취가 많이 남은 곳이다.
▶ 시장 스케치
시장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5일장의 번잡함을 단순하고 담백하게 담아내려고 애를 썼다. 시장 르포 기사를 으레 흥정과 함께 인심이 꽃 핀다고 말하지만 이날은 쉬는 날 5일장이어선지 방문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인근 창촌에 산다는 70대 이 모 할머니는 "초가을 공일이라 손님이 별로 없다"면서 "휴일 5일장에는 요즘 내남 없이 놀러다녀 손님이 없는 편"이라고 시장의 형편을 일러준다.
이런 탓인지 가게 주인들마다 손님을 많이 그리워하는 분위기가 물씬 와닿았다. 흔하다는 호객 행위도 거의 없다. 지나다가 가게에 눈길을 주면 한 개라도 사 갔으면 하는 눈치다. "머 찾심니꺼? 구경하이소". 서부경남 사람의 무뚜뚝하고 투박한 단발성 말투가 와락 엄습한다.
취재 내내 흥청대던 5일장은 옛일이고, 이젠 손님이 더 그리운 시장이 된 듯했다. 평일 5일장은 좀 붐빌랑가?
저 건너편 노천 가게에 빼곡히 걸린 수수한 옷가지들이 더 크게 눈에 들어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농촌 지역이어서 대체로 생활복이다.
반성시장은 진주 중앙시장 등 도심의 전통시장과 달리 시골 5일장이다 보니 이날도 거의가 인근 지역에서 생산된 농특산품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노점 가게 주인이 집에서 직접 수확한 것과 이동트럭이 한 움큼 식고 5일장을 찾지만 분위기는 매 비슷하다.
두부 등 집에서 직접 만들어 와서 홀로 노점에서 앉아 파는 어르신도 더러 있다. 알고보면 이 분들이 이곳에서 오랫동안 노천 가게를 꾸려온 터줏대감들이다.
시골 시장에는 사람 인심이 폴폴 난다고 하지만, 오늘 만큼은 오히려 미사여구이고 한 개라도 팔면 좋다는 시골의 풋풋함이 시장 여기저기서 뭍어난다. 시골장의 진풍경 중 하나가 물건 값 깎는 재미라고 하지만 이날은 흥정을 하는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지나다가 좌판 장사를 하는 어르신이 지인 손님과 하는 말이 들려왔다. "많이 팔려고 나온 건 아이야, 내가 심어 거둔 거 팔고, 사람 구경도 하고···".
썰렁해서 더 초라해 뵌다. 한적해서 더 생각이 많아지는 게 요즘의 시골장터다. 시장에서 머지 않은 곳엔 농협축협마트가 있어 이미 많은 주민들은 이곳을 애용한다. 그만큼 북적북적 하던 장터의 옛 영화는 많이 줄었다.
인근 사봉에서 왔다는 윤 모 할머니는 "마늘을 사 볼까 하고 나왔다"면서 "마트는 마트대로, 시장은 시장대로 살 끼 따로 있다”고 명료하게 구분 짓는다.
기자는 5일장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힘은 '사람 냄새요, 끈끈한 정'이란 말을 애써 되뇌었다.
수산물 가게가 있는 다른 한쪽에선 시국 이야기가 들렸다. 상인 3분이 각자 가게에 앉아 러시아 전쟁(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언급한다. 한 상인은 "(남아 도는 러시아 가스를) 중국이 사 가서 그걸 다시 비싸게 유럽에 판다더라"며 기자도 제대로 모르는 전쟁 내막을 주고 받았다. 손님이 뜸하니 무료함을 달래는 이야기판이다.
시장 안의 국밥집은 손님이 더러 앉아 있었다. 동부 5개면 주민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국밥집들이다. 평소에도 단골들이 찾지만 5일장날이면 꼭 들러 한 그릇 비우고 가야 하는 필수 코스로 붐빈다고 한다.
이곳 국밥집들은 인근에 성했던 소전과 뗄래야 뗄 수 없다. 옛날 농삿일이 천하지대본이던 시절 5일마다 서던 우시장, 즉 소전은 꽤 번창했다. 농가에서 정성을 들여 키웠던 큰소를 팔고, 키워서 농삿일에 활용할 송아지를 사고선 '남은' 돈으로 같이 간 마을 사람들과 국밥에 막걸리를 들이키던 식당들이다.
먹을 거리가 많아진 지금엔 그 맛이 덜해졌지만 국밥집 유명세는 지금도 이어진다. 반성장에 오는 주민들은 이곳 식당들에서 국밥 한 그릇 비우고 가는 것이 일상화 돼 있다. 시장에 외지인을 불러들이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지금은 눈 대중으로 서너집 정도가 자리하고 있다.
골목에 있는 국밥집 한 켠에서는 돼지머리 수육과 국밥을 안주로 잔을 부딪친다. 지나가는 지인 상인들간의 이야기 결에 이곳 특유의 희노애락이 녹아 있는 듯하다. 풋풋한 정이 오가는 시장의 모습이 아닌가.
돼지국밥에는 두툼한 돼지고기 살에 콩나물을 넣었다. 부추 대신 콩나물과 파가 들어가 얼핏 보면 소고기 국밥 같지만 돼지다. 여기에다 밑반찬인 양파와 고추, 마늘을 곁들이며 한끼를 든든히 해결하고서 시장을 나선다.
3년 반 전인 2019년 1월 21일 포털 실시간 주요 검색어에 반성시장이 올라와 화제가 됐는데 돼지국밥 때문이었다고 한다. 다만 젊은이들의 맛 평가는 '그저 그렇다'이다. 요즘은 온갖 국밥집이 제 맛들을 내기 때문이다.
소전에서 먹던 옛 맛을 잃지 않고 오랫동안 이어가기를 바랄 뿐이다. 반성시장에 와야만 먹을 수 있는 국밥, 요즘 말로 '누구나 와서 먹을 순 있겠지만 오지 않고는 아무나 먹을 수 없는' 그런 국밥을 뜻한다.
반성장에서 인근 주민들이 자주 들르는 또 다른 곳이 있다. 기름을 짜는 집이다. 말하자면 담 넘어 옆집 숫가락도 세는 '동네 참새방앗간'과 같은 곳이다. 기름이 다 짜질 동안 옆 동네 누구네 집, 누구의 이야기가 여기서 대충 풀어진다.
기름집은 두어군데 있다. 이곳에서 짜는 기름에는 중국산 논란이 없다. 수십년 전부터 가업으로 해오고 있어 손님이나 주인이나 믿고 맡기고 짜준다. 이날 기름을 짜려는 손님이 계속 이어져 물을 거리를 건네지 못했다. 다음을 기약했다.
이날의 취재는 반성장으로 잡았지만, 내심 흔적이 없어진 소전을 찾아 지난 일들을 적고 싶었다. 붐비고 번창했던 소전은 반성시장에서 북쪽으로 1km를 가야 했다. 지금은 그 터엔 아파트(월산아크로빌) 한 동과 수목원교회가 들어서 있다.
시장에서 나이 지긋한 분들에게 소전의 위치를 물었더니 대부분이 모르고 있었다. 어느 가게 어르신이 위치를 안내를 해 가보니 엉뚱한 곳이기도 했다. 소전이 없어진지가 오래돼서 그러할 것이다.
또다른 어르신은 기꺼이 기자를 안내 하려 했지만 앞의 어르신의 경우처럼 미덥지 않아 가면서 물어서 찾겠다며 사양했다. 이 어르신에게선 '시골의 무료함'이 묻어난다. 친근감이란 단어가 '사람 그리움'으로 연결됐다. 시골내기 어르신에게 말을 길게 걸어줄 사람도 마땅찮을 것이다.
반성 소전은 인근 동부 5개면 주민에겐 너무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옛날 일들로 내막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의 할아버지가 소전에서 거간(경매)일을 했다는 박두식 어르신(74)은 "장날이면 수백마리의 소와 사람으로 흥청댔다"면서 "진주 동부 지역의 돈은 여기서 나가고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전했다. 실제 박 어르신 집안은 반성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단다.
"우시장이 있을 때 소몰이꾼들이 있었어. 반성 우시장이 유명해 멀리 마산 도축장에서도 소를 사러 왔제. 소몰이꾼이란 게 소를 몇 마리 산 양반의 소들을 마산까지 몰아주는 사람이제. 마산까지 걸어 몇 시간이 걸려".
박 어르신은 젊은 기자에게 참 뜬금 없고, 언뜻 이해도 되지 않는 시절의 이야기를 불쑥불쑥 꺼냈다. 시간과 세월에 따른 세대간의 단절을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기자는 "세상에 그럴 때도 있었구나" 하며 당시와의 연결고리를 찾으려고 했으나 어려웠다.
소전 아파트 말고 보호수인 고목나무가 있는 바로 위쪽의 태완노블리안 아파트 단지(2동)는 지금은 산뜻한 외향을 지녔지만 소류지(저수지)였다. 못둑 아래의 고목나무는 두개이지만 큰 나무가 언젠가 번개를 맞았는데 가까스로 살았다고 한다. 박 어르신은 이를 두고 "박살이 났었다"는 말로 대신했다.
이 아파트 단지는 조망권 등으로 건립 과정에서 긴 송사를 겪었다.
박 어르신은 농사에 쓰일 물을 관리하는 저수지였기에 소유주인 관공서와 저수지 물을 이용하는 이 일대 5개 부락(마을) 주민 간에 아파트 건설과 관련한 이견이 커 진주 법원을 자주 들락거렸다고 전했다.
진주시의 5일장은 금곡시장(1·6일), 대곡시장(1·6일), 진주 시내 서부시장(2·7일), 반성시장(3·8일), 문산시장(4·9일), 미천시장(5·10일) 등이 있다. 장이 서는 첫날 날짜를 꼽아보니 1~5일까지 나눠져 있다. 장날에 맞춰 봇짐을 지고 이 시장 저 시장 옮겨다니던 상인을 '장돌뱅이(장꾼)'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듯했다.
반성 5일장은 이들 장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깊다. 동부 5개면의 중심이다. 번창할 때 이곳에는 과일, 채소, 곡물은 물론 옷가지 등 생필품은 없는 게 없을 정도였다. 수산물은 인근 사천 삼천포항 등 남해안 청정해역에서 잡은 갈치, 돔, 낙지, 바지락, 꼬막, 대합 등이 진열돼 손님을 맞는다.
오랫동안 장사를 해왔다는 70대 강 모 할머니는 “5일장이 서는 날에는 항시 오는 사람들이 와 얼굴이 익고 언니, 동생, 딸 같이 만난다"라며 이물없는(허물없는) 사이라고 말했다.
강 할머니는 지나던 분에게 "추석 잘 쉬었나. 본지 어북(제법의 사투리)됐네. 나는 누가, 손님 오끼라 사서(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다"며 다소 앞 뒤가 안 맞는 인사를 건넨다. 추석 이후 처음 보는 듯하다. 이래도 시장에선 서로 간에 잘 알아듣고 이해를 한다.
기자는 이 장면을 보고서 반듯한 가게 주인이나 좌판의 상인이나 어릴 때부터 옴마(엄마)나 할매(할머니)의 손을 잡고 이곳에서 생필품을 샀던 분들이란 생각을 해본다. 사람 냄새도 세대를 이어서 켜켜이, 차곡차곡 쌓아온 곳이 우리의 장터다.
"깎아주든가 한 주먹 더 주든가" "이라모 남는 기 엄따".
조용했던 반성장을 뒤로 하고 나오는데 옆에서 들어온 흥정 소리다. 진주 사람들이 주고 받는 특유의 투박한 저 말 맛에 장터를 찾는 게 아닌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