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7일)은 절기상 백로(白露)입니다.
백로(白露)를 풀이하면 흰 백(白), 이슬 로(露), 즉 '하얀 이슬'입니다. 이 무렵엔 밤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잎 등에 이슬이 맺힌다는 데서 유래했습니다. 이슬점은 '대기 속의 수증기가 포화돼 일부 수증기가 물로 응결할 때의 온도'입니다.
하지만 예년과 달리 아직도 전국의 낮기온이 30도를 넘어서 늦더위가 기승을 부립니다. 폭염과 이슬 이 함께하는 절기라니 좀 역설적이긴 합니다. 아침에 이슬, 낮엔 무더위가 혼재하는 올해 절기입니다.
지난해 백로 절기 기사를 보니 태풍 '힌남노'가 경남북의 남동 지역을 휩쓸고 가 피해를 입었네요. 올해는 폭염 때문인지 아직껏 큰 태풍 하나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24절기 중 벌써 15번째입니다. 처서(處暑)를 보냈고 추분(秋分)을 맞는 자리입니다. 대개 양력으론 9월 7~9일에 듭니다. 대개 백로는 음력으로 8월 초순에 듭니다. 지난해는 음력으로 추석 이틀 전인 8월 13일이 백로였네요.
올해는 백로가 추석(17일)을 10일 앞둔 토요일로 가정에서는 조상의 묘를 찾아 벌초를 많이 하는 듯합니다.
백로는 음력으론 간혹 7월 말에 들기도 하는데 '7월 백로' 땐 계절이 빨라 오곡의 작황이 좋아진다고 합니다.
백로 절기엔 '포도순절(葡萄旬節)이란 말을 합니다. 백로에서 추석까지가 포도순절인데, 이전엔 포도가 나오는 철이지요. 요즘은 기온이 높아지고 품종 개량도 많이 돼 포도가 많이 빨리 출하됩니다.
포도가 익는 철이어서 정성스레 키운 첫 포도를 따면 사당에 먼저 올리고 이어 맏며느리가 한 송이를 통째로 먹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주렁주렁 달린 포도알이 다산(多産)을 상징하기 때문이지요. 조선백자에 포도 무늬가 많은 것도 이 같은 뜻을 담은 것입니다. 거꾸로 시집 안 간 처녀가 포도를 많이 먹으면 망측하다며 야단을 맞기도 했다네요.
관련해 부모에게 배은망덕한 짓을 했을 때를 가리켜 '포도지정(葡萄之情)'을 잊었다고 합니다. '포도의 정'이란 어릴 때 어머니가 포도를 한 알씩 입에 넣어 껍질과 씨를 가려낸 다음 입에 넣어주던 그 정을 말합니다.
백로 무렵은 고된 여름농사를 끝내고 추수 때까지 잠시 일손을 쉬는 때여서 부녀자들은 근친(覲親)을 가기도 했습니다. 여기서의 근친은 시집간 딸이 오랜만에 친정을 찾아 부모님을 뵙는 것을 말합니다. 근(覲)은 '뵙고, 만난다'는 뜻이어서 가까운 친척이란 근친(近親)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옛날에는 '출가외인'이라 해서 친정 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사돈집(처갓집)과 뒷간(화장실)은 되도록 멀리 있는 것이 좋다는 말이 그 말입니다. 이웃 동네에서 시집을 오는 경우가 많아 가능한 한 왕래가 덜하게 하려는 게 풍습으로 자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근친은 특별한 날(명절, 친정부모님 생신, 제삿날)에만 허락이 됐습니다. 다만 간혹 시댁에서 첫 농사를 지은 뒤 근친을 허락하기도 했답니다. 근친을 갈 때에는 햇곡식으로 떡을 만들고 술을 빚어 가져가는데 형편이 넉넉하면 버선이나 의복 등도 마련해 친정부모님께 드렸습니다. 시댁으로 돌아올 때도 보답으로 떡과 술 등을 마련해서 왔다고 합니다. 일부 경상 지방에서는 이 떡을 '차반'이라고 합니다.
흥미롭다고 해야 할지, 씁쓸하다고 해야 할지 다소 엉뚱한 관련 속신(俗信)도 있습니다.
출가 후 3년 안에 근친하지 못하면 평생에 한번도 못했답니다. 3년 후에 근친하면 단명한다는 속신 때문이랍니다. 가능하면 친정을 못 가게 하려는 봉건시대의 유산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시댁이 엄해 근친을 못하거나 어떤 사정이나 액(厄)이 있어 친정에 가지 못해도 양가(兩家)에서 미리 연락해 중간 쯤 경치 좋은 곳에서 친정 식구를 만났다고 하네요. 이를 '반보기(中路相逢)'라고 합니다. 장만해 간 음식을 먹으며 회포도 풀고 하루를 즐기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근친은 결국 유교적인 엄한 가족제도가 빚어낸 풍속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에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고 가족의 가치관과 제도도 많이 바뀌어 사라졌거나 달라져 있겠지요.
옛 사람들은 편지를 보낼 때 첫머리에 '포도순절에 기체만강하시고...'라고 썼답니다.
기체만강(氣體萬康)은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을 준임말입니다. 체후(體候)는 안부를 물을 때 그 사람의 기거(起居)나 건강 상태를 높여 이르는 말입니다. 만강(萬康)은 아주 편안함을 뜻합니다.
다시 절기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백로에서 추분까지를 5일씩 나누어 시기별로 특징 지었는데 이를 삼후(三候)라고 합니다. 초후(初候)에는 기러기가 날아 오고, 중후(中侯)에는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가며, 말후(末候)에는 뭇 새들이 먹이를 저장한다고 했다네요.
백로 전후에는 여름철 장마가 걷히고 맑은 날씨가 계속되지만 간혹 태풍과 함께 오는 집중호우로 곡식의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백로 다음에 오는 '중추'는 찬이슬과 서리가 내리는 때라고 합니다. 여기에서의 중추는 추석을 뜻하는 '중추(中秋)'가 아니고 가을이 한창인 때라는 뜻의 '중추(仲秋)'로, 음력 8월을 달리 하는 말이라고 하네요.
참고로 음력 8월 보름은 한가위라고 부르는 추석 명절인데 가배절, 가우절로도 불립니다.
벼논의 나락은 백로 절기가 되기 전에 패고 여물어야 합니다. 찬바람이 불고 서리가 내리면 수확량이 줄어들고, 백로가 지나서 여문 나락은 알곡이 부실합니다. 농작물이 일부 시들고 말라버리지요.
늦여름~초가을에 내리쬐는 하루 땡볕은 전국에 걸쳐 쌀 12만 섬(1998년 기준)을 더 거두게 한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오곡이 익어가는 시절의 날씨는 매우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제주에 '백로전미발(白露前未發)'이란 속담이 있는데 이때까지 패지 못한 벼는 더 이상 크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충남 지역에서는 늦게 벼를 심었다면 백로 이전에 이삭이 패어야 그 벼를 먹을 수 있고, 백로가 지나도록 이삭이 패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비슷하게 경남 지역에서도 백로 전에 패는 벼는 잘 익고 그 후에 패는 것은 쭉정이가 된다고 합니다.
다행히 요즘은 기후 온난화로 오곡의 자람과 익음에 크게 영향 줄 기온은 아닌 듯하고, 종자 개량과 재배 기술이 향상돼 큰 영향은 안 받는 듯합니다.
결론적으로 백로는 농사 흉풍의 변곡점이 되는 절기네요. 농부가 벼이삭을 유심히 살피는 것도 이때이고요.
관련해 백로 전후에 바람이 불면 벼농사에 해가 많고, 나락이 여물어도 색깔이 검게 된다고 여겼답니다.
거꾸로 "백로에 비가 오면 대풍년이 든다"는 말도 있습니다. 다소 엉뚱한 말이라서 고개가 갸웃해지지만, 경남의 섬 지방에선 '8월 백로에 비가 오면 십리 천석을 늘린다'는 말이 실제 전해집니다. 역설적으로 한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해 봅니다.
저 산모퉁이에는 가을의 풍성함이 다가서 걸려 있습니다. 요즘엔 온갖 과일이 철없이 나오지만 제철 과일을 꼽자면 포도, 배, 사과, 석류, 은행 등이 있습니다. 길가엔 노란 은행이 떨어져 있고요. 대하, 광어 등 수산물도 이때쯤 나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