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경남뉴스가 일상에서 무심코, 대충 넘기는 말을 찾아 그 정확한 뜻을 짚어보겠습니다. 뜻을 정확히 알고 하는 언어 생활은 일상을 편하게 하고, 또한 말을 줄여서 쓰면 매우 경제적입니다. 일상에서 말로서 보는 이익과 말로서 잃는 손실은 적지 않습니다. 좋은 제보도 기다립니다. 한글 세대인 젊은층을 위한 코너이기도 합니다. 편집자 주

"갸 요즘 두문불출인가, 코빼기(코의 속된 말)도 안 보이네"

자주 쓰는 '두문불출'에 흥미롭지만 애틋한 숨은 유래가 있네요.

두문불출은 음의 뜻을 따라가면 감이 와닿는 일반 사자성어와 달리 지역에서 유래된 사자성어입니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의 한자를 풀어보면 막을 두(杜), 문 문(門), 아닐 불(不), 날 출(出)입니다. '문을 막고 나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두문이란 지명 이름을 딴 것인데, 이 이름 또한 '두문이란 곳을 나오지 않는다'는 뜻을 넣어 만든 것입니다.

그 유래를 알아봅니다.

고려시대 수도였던 송도(지금의 개성)의 북쪽 성거산(聖居山) 서편에 고을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두문동(杜門洞)이란 이름을 가졌습니다. 지금의 경기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廣德山) 서쪽의 골짜기라고 하네요.

이곳은 고려가 멸망해 조선 왕조가 시작되자 고려의 유신(遺臣·왕조가 망한 뒤 남아 있는 신하) 72명이 벼슬을 거부하고, 외부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은거하며 살던 곳입니다. 이곳이 두문동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이들이 살면서부터가 아닌가 합니다.

이들 유신 72명은 고려 왕조에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이른바 '부조현(不朝峴·개성 경덕궁 앞 고개)' 앞 고개에서 조복(朝服·조선 시대의 문무백관이 입던 관복)을 벗어던지고 두문동에 들어와 끝까지 조선 왕조에 출사(出使) 하지 않았습니다. 부조현은 한양의 남문밖 남쪽에 있는 고개로 고려의 충신들이 이곳에서 다시는 벼슬하지 않기로 맹서하고 구신골(舊臣谷)로 들어가 살았다ㅓ는 데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곳 두문동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던 이들 충신은 중심 인물이던 간의대부(諫議大夫·정4품) 차원부가 사망하자 대부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성사제 등의 13명은 조선의 회유에 굴하지 않다가 가시덤불 불에 타 죽었다고 합니다.

달리 전해지기로는 조선 왕조가 두문동을 포위하고 이들 72명을 불살라 죽였다고 합니다.

이들 중 맹호성, 조의생, 임선미를 '두문삼절(杜門三絶)'이라고 부릅니다.

조선 중기 정조(1783년) 때 조정에서 이들이 죽은 자리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고 전합니다.

지금 전하는 두문동 기록은 조선 순조 때 72명 유신의 한 사람인 성사제(成思齊)의 후손이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에 실려 알려졌습니다.

조선의 어진 재상으로 알려진 황희(黃喜) 정승의 조선 왕조 참여 일화(逸話)도 두문동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두문동에 은거하던 황희가 어느 봄날 농부가 흰소와 검은소로 밭을 갈고 있었는데 황희가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합니까?"라고 물었더니 한참 후 농부가 소들을 나무 그늘에 묶어두고 황희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말 못 하는 소도 비교하는 걸 싫어합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황희가 여기에서 크게 깨달아 고려 왕조와 비교하지 않고 조선 왕조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조정에서 황희에게 국사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은 두문동에서 비롯됐습니다.

그 당시 고려의 유생들이 은거한 곳이 많아 두문동으로 불리는 곳이 전국 여러 곳에 남아 있습니다.

두문불출은 '집 안에 들어앉아 밖에 나가지 않는다'는 다소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지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君)'이란 충절(忠節)의 표상의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