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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기획] '3대 재벌 탄생지' 지수 승산을 가다-'만석꾼' 허만정과 그 후손들(3-4)

정기홍 기자 승인 2022.05.01 22:36 | 최종 수정 2022.06.27 16:26 의견 0

※ 더경남뉴스의 창간 기획인 '지수 승산을 가다'의 6번째 글에서 승산마을의 터줏대감 '허 씨의 가문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7번째 글에서는 '만석꾼 허만정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를 짚어봅니다.

승산마을의 허 씨와 구 씨 두 가문의 이야기는 7개 분야로 나눠 ▲허 씨의 생가와 본가(3-1) ▲구 씨의 생가와 본가(3-2) ▲허 씨의 가문(3-3) ▲'만석꾼' 허만정과 그 후손들(3-4) ▲구 씨의 가문(3-5) ▲구인회와 그 후손들(3-6) ▲두 가문의 공동창업(3-7) 순서로 싣습니다.

승산마을의 이병욱 전 이장(79)이 취재에 동행하면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 연재 순서

1. 들어가는 글

2. 승산마을의 산세와 지세

3. 승산마을의 유래와 변천사

4. '승산 터줏대감' GS의 허 씨-'허 씨의 사돈' LG의 구 씨 가문

- 허 씨 가문의 생가와 본가

- '허 씨 사돈' 구 씨 가문의 생가와 본가

- 허 씨 가문 이야기

- '만석꾼' 허만정과 그 후손들

- 구 씨의 가문(예정 글)

안내도에서 한옥 위치를 알아두면 글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정창현 기자

승산마을 만석꾼인 '지신(止愼)' 허준 선생(許駿·1844~1932년)의 윗대의 자료는 외부에 알려진 게 많지 않다. 허준 선생의 아들인 효주(曉洲) 허만정(許萬正·1897~1952년) 선생이 지금의 LG그룹의 효시가 된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에 창업 자금을 대줬다는 것과 만석꾼으로서의 여러 가지 선행이 당대는 물론 후대에 회자되고 있다.

진주 만석꾼 허만정 선생

허준 선생은 재령 이 씨와 결혼해 큰아들 허만종과 딸을 낳았고 이어 함안 조 씨를 통해 허만정·허만옥 형제를 낳았다.

허준 선생의 둘째아들이자 만석꾼으로 알려져 있는 허만정 선생은 부인이 둘이다.

첫번째 부인은 초계 정 씨(참봉 정연기(鄭演祈)의 딸)로 슬하에 ▲첫째 허정구(許鼎九·1911~1999·전 삼양통상 명예회장) ▲둘째 허학구(전 새로닉스 회장) ▲셋째 허준구(전 LG건설 명예회장, 구인회와 LG그룹 공동창업자) ▲넷째 허신구(전 GS리테일 명예회장) ▲다섯째 허완구(전 승산 회장) 등 5명의 아들을 뒀다. 모두 고인이 됐다.

허만정 선생은 41세 때인 1938년에 초계 정 씨가 별세한 뒤 둘째부인 진양(진주) 하 씨를 맞아 슬하에 ▲여섯째 허승효(알토전기 회장) ▲일곱째 허승표(피플웍스 회장) ▲여덟째 허승조(GS리테일 부회장) 등 3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들은 지금도 현업에 종사하고 있다.

허만정 선생의 아들 모두는 승산마을에서 태어났다.

허만정 선생의 큰아들인 허정구 전 삼양통상 명예회장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삼성을 세울 때 아버지의 청을 받고서 삼성에서 함께 일했고 이후 초대 삼성물산 사장을 지냈다.

생전에 골프를 즐겨 한국의 '미스터 골프', 한국 골프계의 대부로 불렸다.

허정구 명예회장의 부인 이행좌 여사는 한옥마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양동의 여주 이 씨 가문이다.

여주 이 씨는 퇴계 이황 선생과 함께 영남 남인의 정신적인 지주로 받들어지는 조선 중기 문신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의 후손이다. 이언적 선생은 문묘(文廟·공자 모시는 사당)에 종사되고 종묘(宗廟·조선 왕과 왕비 신주 모시는 유교 사당)에 배향 됐다.

허정구 명예회장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허남각(1938~) 삼양통상 회장 ▲장녀 허영자(1941~·남편 김희철 벽산그룹 회장) ▲차남 허동수(1943~) GS칼텍스 명예회장 ▲3남 허광수(1946~) 삼양인터내셔날 회장 ▲2녀 허영숙(1952~·남편 윤후명 한국문학원 원장) 등이다.

허남각 회장의 장남 허세홍(1969~)은 현재 GS칼텍스 대표다. 범GS 가문의 3세 중에 유일하게 '수'자 돌림자가 아니다.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허세홍 대표의 부인 이희정 여사는 주방 전기제품 기업으로 알려져 있는 쿠첸(부방그룹)의 이동건 회장의 딸인데, 허정구 명예회장의 부인 이행좌 여사와 마찬가지로 양동 여주 이 씨이다.

3남 허광수(1946~) 삼양인터내셔날 회장은 특이하게 1녀 1남 자녀를 모두 언론사 사주와 연을 맺었다.

그의 장녀 허유정(1974~) 씨의 남편은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의 장남 방준오(1974~) 조선일보 대표이사 부사장이다.

또 3남 허광수(1946~) 삼양인터내셔날 회장의 아들인 허서홍(1977~) GS에너지 전력·집단에너지사업부문장도 중앙일보그룹 홍석현 회장의 장녀 홍정현(1980~) 온지음 기획위원과 부부다.

허정구 회장대로 다시 올라가 살펴보자.

허정구 회장의 바로 밑 동생인 허학구 새로닉스 회장(1912~1999년)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다. 슬하에는 1남 3녀를 두고 있다.

그는 경기고를 다닐 때 운동을 해서 힘이 좋았다고 한다. 어느 날 허학구는 조선 학생들을 괴롭히던 일본 형사 요시다를 서울 종로 계동 골목에서 두들겨팼다.

이때 함께있던 인물이 훗날 남로당(南勞黨)의 거물이 된 박갑동(朴甲東)이었다. 둘은 퇴학을 당하고 일본 유학을 떠났는데 허학구는 메이지(明治)대를, 박갑동은 와세다대를 다녔다. 이때 박갑동의 학비를 허씨 집안에서 댔다고 한다.

해방 후 박갑동이 남로당 박헌영(朴憲永)의 비서로 있을 때 허학구는 고향 지수에서 이장을 하고 있었다. 해방 후 좌익과 우익이 충돌하던 시기부터 6·25때까지 유학파인 엘리트 허학구가 공직 대신 고장을 지키는 이장을 했다는 것은 또다른 의미가 있다.

하학구는 좌익 인사들을 학살한 보도연맹사건(1949년 좌익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이 조직한 반공단체) 때 좌익으로 지목된 이들에게 우익의 살생을 미리 알려줘 목숨을 구해줬다. 그는 보도연맹 연루자들에게 “내일 자네에게 나오라고 하거든 나가지 말게. 나가면 죽을 테니 오늘 밤에 피신하는 게 좋겠네”라고 귀띔해 줬다고 한다.

셋째 허준구 LG건설 명예회장(1923~2002년)은 일찍 작고한 작은아버지 허만옥(허만정 선생의 동생) 집안에 양자로 갔다. 허만옥 선생도 형과 같이 만석꾼 대열에 올랐다,

고 허준구 LG건설 명예회장(GS그룹 명예회장)

허준구 명예회장은 일본 도쿄 간토중과 진주고등보통학교(현 진주고)를 졸업하고 고려대 경영대학원을 수료했다. 그는 1947년 구인회 LG그룹 창업주가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할 때 아버지 허만정 선생의 권유로 영업부장으로 입사했다.

첫째 형인 허정구가 삼성에 가서 동업을 했고 그는 LG에서 몸을 담았다. 두 형제가 지금의 삼성과 LG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운 셈이다.

이후 1950~60년대에 금성사(현 LG전자)로 자리를 옮겼고, 국내 처음으로 생산한 라디오와 TV는 그의 손을 거쳐 팔려나갔다.

그는 또 우리나라의 빨래 문화를 바꾼 ‘하이타이’를 탄생시킨 주역이었다. 1966년 빨랫비누를 사용한 세탁 방식을 가루비누로 전환시켜 세제 시장에 일대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1968년 초대 럭키금성그룹(현 LG그룹) 기획조정실장을 맡았고, 다음해에 민간기업 최초로 LG화학을 증권거래소에 상장시켜 기업공개를 했다. 이후 LG전자와 LG전선의 대표를 거쳐 1984년 LG전선 회장 겸 LG그룹 총괄 부회장을 지내는 등 LG그룹의 주요 계열사의 임원직을 두루 맡았다.

그가 거친 직책은 ▲반도상사 사장(1968년) ▲금성전선 사장(1971~1982), 회장(1984~1995) ▲럭키 사장 ▲금성사 사장(1979년) ▲럭키금성그룹 부회장 ▲럭키석유화학 회장(~1995년) ▲LG건설 명예회장 등이다.

옳다고 믿으면 밀어붙이는 타입으로 성장기의 럭키금성그룹이 사업 영역을 확대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구자경 LG그룹 회장이 1995년 은퇴를 선언하자 "창업세대는 동반퇴진해야 한다"며 함께 물러나 두 가문의 화합에도 힘썼다.

허준구는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조카사위(구인회의 아랫동생인 구철회 LIG그룹 명예회장의 딸)로 촌수로도 범GS 가문에서 LG그룹 일가와 가장 가깝다.

민간기술단체의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민간기술연구소협회 회장, 한국과학기술원 부이사장 등을 거쳤다. 또 1986년 대한조정협회 회장, 1987년 아시아조정연맹 회장을 역임했으며 한일경제협회 부회장을 맡았다.

허준구 명예회장의 자손은 ▲잘 알려진 장남 허창수 GS그룹 명예회장 ▲둘째 허정수 GS네오텍 회장 ▲셋째 허진수 GS칼텍스 부회장 ▲넷째 허명수 GS건설 부회장 ▲다섯째 허태수 GS그룹 회장이 있다.

허창수 명예회장은 GS건설 회장직도 맡고 있고, 현재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이다. 허창수 명예회장의 아들 허윤홍은 GS건설을 맡고 있다.

GS그룹은 다섯째인 허태수 회장이 큰형 허창수의 뒤를 이어 총괄하고 있다. LG와 GS의 반세기가 넘는 동업도 칭송이 자자하지만, 그룹이 분리된 이후 GS도 형제 간의 경영 대물림도 본 받을 만하다.

허태수 GS그룹 회장은 서울 중앙고,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 조지워싱턴대 대학원(MBA)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미국 컨티넨탈은행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LG투자증권에서 M&A팀장·IB사업본부장 등을 거쳤다.

허태수 GS 회장

지난 2007년 GS홈쇼핑 대표이사 사장에 이어 2015년 GS홈쇼핑 대표이사 부회장을 거쳐 2020년 GS 회장에 취임했다. 부인 이지원 여사는 이한동 전 국무총리의 딸이다.

지금의 GS그룹을 이끌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 허준구 명예회장의 직계 자손들이다.

허만정 선생의 4남 허신구 GS리테일 명예회장은 2남 2녀를 두고 있다. 장남 허경수는 코스모그룹 회장이다. 둘째딸 허지연의 남편 박철완은 박정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장남이다. 2남 허연수는 GS리테일 부회장이다.

허만정 선생의 다섯째 아들인 고 허완구 승산 회장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윈게이트대를 졸업한 뒤 1969년 ㈜승산의 전신인 대왕육운을 창업해 운영해 왔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작은아버지다.

고 하완구 승산 회장

승산은 투자 사업, 부동산 및 레저 사업, 물류 사업 등을 했다. 지난 1991년에 미국의 대형 철강기업인 파웨스트스틸을 인수하고 사업을 확장시키며 매출 규모를 4배 이상 성장시키기도 했다.

초대 한국민속씨름협회장을 역임하며 민속씨름의 부흥과 저변 확대에도 힘썼다.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도 맡았다.

그는 한국의 글로벌화에 관심이 많아 미국 오레건 주립대 박물관에 한국실을 만들어 기증했고, 이홍구 전 국무총리와 함께 서울국제포럼을 만들어 한국의 우수성을 세계에 전파하기도 했다.

부친(허만정)의 하던 교육 사업에도 지속 관심을 가졌다. 부친이 설립한 진주여고 건물 현대화 사업에 사재 100억원을 기증했다. 지난 1986년부터 지금까지 진주여고 학생 1000여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교육도시인 진주 사람들이 특히 잊어선 안 될 인물 중의 한 명이다.

부인 김영자 여사는 ‘와사등’을 지은 김광균 시인의 딸이다. 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겸 이화여고 장학재단 이사장으로 있었다.

자녀로는 아들 허용수 GS에너지 대표, 딸은 허인영 승산 대표가 있다. 허용수 대표는 GS에너지 에너지자원사업본부장과 부사장을 역임한 뒤 승산레저 대표, 승산 대표 대표(2000년)를 거쳤다.

허만정 선생의 둘째 부인 진양(진주) 하 씨에게서 난 여섯째 허승효 알토그룹 회장은 2남 1녀를 두고 있으며 장남 허영수 씨가 알토 대표를 맡고 있다.

일곱째인 허승표 피플웍스 회장도 1녀 1남을 두고 있다. 여넓째인 허승조 전 GS리테일 부회장도 1남 1녀를 두고 있다. 처가 태광그룹 창업주 이임용의 장녀다.

하지만 허 씨와 구 씨 집안은 창업주로부터 3대로 내려오면서 승산마을을 찾는 후손들의 왕래는 대부분 끊어져 있다. 승산마을에는 터줏대감 격인 허 씨 집안의 사람들이 지금도 많이 산다. 하지만 대체로 한옥을 관리하는 정도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허정구 고 삼양통상 회장(삼양통상 창업주)의 3남인 허광수(1946년~) 삼양인터내셔날 회장이 승산마을 생가에서 멀지 않은 선영에 한 번 씩 다녀간다고 한다.

허 씨 집안인 관리인 허성호 씨는 일부 언론에 “최근 추석 때 가족이 성묘하러 왔다 갔는데 최근에도 부인과 함께 예고 없이 다녀갔다. 그날 아침 일찍 ‘조용히 다녀가고 싶으니 소문 내지 말고 선영으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부인과 단 둘이 음식을 준비해 왔었다고 전했다.

그는 허성호 씨에게 간밤에 어머니와 아버지 생각이 너무 많이 나 달려왔다고 했다고 한다.

※ 다음은 '구 씨 가문'(3-5) 기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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