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경남뉴스의 창간기획인 '지수 승산을 가다' 5번째 글에서 ''허 씨의 사돈' 구 씨 가문의 생가와 본가'를 짚었습니다. 이번에는 '허 씨의 가문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두 가문의 이야기는 7개로 나눠 ▲허 씨의 생가와 본가(3-1) ▲구 씨의 생가와 본가(3-2) ▲허 씨의 가문(3-3) ▲허만정과 그 후손들(3-4) ▲구 씨의 가문(3-5) ▲구인회와 그 후손들(3-6) ▲두 가문의 공동창업(3-7) 순서로 싣습니다.
이번 글도 취재진과 동행한 승산마을의 이병욱 전 이장(79)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 연재 순서
1. 들어가는 글
2. 승산마을의 산세와 지세
3. 승산마을의 유래와 변천사
4. '승산 터줏대감' GS의 허 씨-'허 씨의 사돈' LG의 구 씨 가문
- '마을 터줏대감' 허 씨 가문의 생가와 본가
- '허 씨의 사돈' 구 씨 가문의 생가와 본가
- '허 씨 가문 이야기'
- '만석꾼 허만정과 그 후손들'(예정 글)
■ 허문손, 1400년대 중반에 터 잡고 가문 일궈
앞서 언급했지만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은 허 씨와 구 씨의 집성촌으로 이들 집안에서 국내 주요 대기업의 창업주들이 나고 자란 동네다.
김해 허 씨의 가문은 1400년대 중반 허문손(許文孫)이 이곳에 터전을 잡았고, 이후 1700년대에 능성 구씨 가문이 들어왔다. 마을 앞에서 보면 작은 개울을 경계로 왼쪽이 구 씨 집안(상동)이고 오른쪽이 허 씨의 집안(하동)이었다. 많을 때는 한옥만도 150여채에 이르고 300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김해 허 씨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35대 자손인 허염을 시조로 한다. 그는 고려 중기 삼중대광(三重大匡·문관의 품계)으로 가락군(駕洛君)에 봉군(封君)됐었다.
허문손은 시조인 허염의 11세손이다. 허문손은 관향(貫鄕·시조가 난 곳)인 김해에서 살다가 진양(晉陽·진주) 지수와 합주(陜州·지금의 합천)의 삼가(三嘉), 전남 순천(順天) 등지로 흩어져 살았다. 대표 집성촌은 지수면 승산리다.
허 씨 가문의 후대들은 한국전쟁(1950~53년) 이후 사업을 하기 위해 하나 둘씩 서울로, 부산으로, 진주로 떠났다. 지금은 이 마을 200여가구 중 허문손의 후손 100여가구가 살고 있다.
■ 승산마을 '600년 터줏대감' 허 씨 가문
▶ "그치고 삼가라"···'지신(止愼)' 실천한 허준
허 씨 가문은 이곳에서 600년 간을 터전으로 삼고 살아와 마을의 터줏대감이다.
허 씨 가문은 남강을 낀 넓은 들판을 지근에 두고 살았지만 선대 때는 넉넉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허준(許駿·1844~1932년) 선생 때 와서야 '만석꾼의 꿈'을 이루고, 승산마을도 '승산동 만석꾼 동네'로 알려졌다고 보면 된다.
허준 선생이 승내리(지금 승산리)에서 태어난 해가 1844년(12월 7일)이니 지금으로부터 178년 전이고, 허 씨 가문이 이곳에 정착한지 400년 후에야 비로소 만석꾼의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인근 의령, 함안, 합천 등지에도 농지가 많았다고 전한다.
만석꾼이란 돈 1만마지기를 짓는 사람을 말한다. 1마지기는 200평이니 여의도 면적(90만평)의 2.3배나 된다.
허준 선생은 조선시대 무과 급제 후 평안도 병마절도사와 5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연당(蓮堂) 허동립(許東岦) 옹의 10대손이다.
그는 송시열 선생의 후손인 송병선과 의병장 최익현의 문하에서 수학해 선공감감역을 지낸 뒤 1891년 진사시에 급제했다. 1902년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거쳐 1904년 비서원승(秘書院丞)으로 봉직(奉職)했으나 세상이 시끄럽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구한말 외세의 개입으로 정세가 격동하던 시기였다.
▶노블리스 오블리주 모범 허준 선생
그는 어려서부터 근검절약해 재산을 모았는데 나이 마흔 전후에 천석꾼이 됐다. 부가 넉넉해질 이 무렵 지수와 근처에 사는 가난한 농가 한집당 땅 200평씩, 모두 800두락을 무상으로 나눠줘 자자한 칭송을 들었다고 전한다.
두락(斗落)이란 논밭의 넓이 단위로, 한 두락은 볍씨 한 말의 모나 씨앗을 심을 만한 넓이다. 지방마다 다르지만 논은 약 150~300평, 밭은 약 100평 정도다. 800두락은 엄청난 규모다.
허준 선생은 이어 만석꾼이 된다.
허준 선생 이후 만석꾼과 천석꾼이 많이 생겼다. 구한말에는 허 씨 가문의 재산을 모두 합하면 3만석에 이르렀다고 한다. 기존 자료에는 허 씨 가문에 만석꾼이 두집, 5천석꾼도 두집이 있었고 천석꾼은 12집이나 돼 합하면 5만석이 됐다고 전한다.
풍수가들은 "부자는 터만 좋다고 나오는 게 아니고 주위에 많이 베풀고 처신을 잘해야 한다"고 한다. 주억거려지는 말이다.
이 때는 '한양 땅에서 진주는 몰라도 승내리(현 승산리)는 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부유했다. 한양의 명문세도가에서도 승산동 만석꾼과 교류하길 원했다니 허 씨 가문 부의 위세를 짐작된다.
진주 등 인근에서도 승산마을로 시집을 가면 한양의 부잣집에 시집을 가는 것과 같은 정도로 여기고 부러워했다고 한다.
마을이 번성했을 때는 마을에서 키우는 마소 우는 소리와 소작농과 우마차가 오가는 소리가 공장의 기계소리만큼 시끌벅적했다고 전한다. 후세인들이 부자마을의 상징성을 '뻥을 튀긴듯'도 하지만 하루에 서너집에서 소를 잡는 경우도 있었다 하고, 고소한 냄새가 골목에 넘쳐났다니 풍족한 마을이었던 것은 맞아보인다.
여기서 짚고 가야할 게 허준 선생의 호 '지신(止愼)'이다. '그칠 지를 알고, 삼간다'는 뜻이다.
허전 선생은 그의 호처럼 만석꾼 부자였지만 평생을 멈출 줄을 알고(止), 삼가는 것(愼)을 인생길로 삼았다. '부가 쌓이면 멈출 때를 알고, 스스로 삼갈 줄을 아는 삶'이다. 허준 선생이 지어 별장처럼 거처하던 정자는 ‘지신정’이란 이름으로 지금도 동네 뒤편에 단아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의 검소함 일화도 전해진다.
허준 선생은 논밭에 농사일을 나갈 때 사람들이 오가는 집 앞에서는 짚신을 신고 가다가 사람이 없는 곳에선 짚신이 닳을까봐 손에 들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자린고비가 보고 울고갈 정도다.
마침내 평생을 '지신 정신'으로 살아온 허준 선생은 일흔일곱(77세) 되던 해인 1920년 평생 모은 재산을 ▲자식 ▲조상 ▲동네주민 ▲국가로 4등분해 나누도록 자식들에게 언질을 해둔다.
특히 흉년이 들거나 춘곤기 때 곳간을 열어 때거리가 없는 이웃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고, 어려울 때는 밭이나 논을 절대 사들이지 않았다. 700마지기 규모의 논과 밭을 나눠줬다니 놀랍다. 77세를 '오래살아 기쁜다'는 뜻으로 희수(喜壽)라고 하는데 희수까지 건강하게 산 게 이웃 덕분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승산마을에는 1921년과 1961년에 세워진 '수혜불망비(受惠不忘碑)'가 있다. 1921년의 비는 허만정 선생의 별채에서 수년간 숙식을 해결하던 걸인(乞人) 가운데 어느 식자(識者)가 은공을 잊지 못해 세웠다고 한다.
허준 선생의 '지신 정신'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후손들이 이를 지키지 않을 것을 염려해 '허씨의장비(許氏義莊碑)'란 비까지 세워 잊지 않도록 했다. 의장(義莊)은 토지에서 나는 곡식 등으로 친족을 돕거나 빈민을 구제하는 것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는 공동생산 토지를 뜻한다.
의장비에는 '일곱 딸에게 20마지기씩 총 140마지기를, 조상의 묘지기 자본으로 140마지기 외에 70마지기는 팔촌 이내 빈곤한 친척에게 주고, 120마지기는 문중의 의장자금으로 한다. 500마지기는 진주일신학당(현 진주여고)에 의연금으로 내고, 7000원은 궁핍한 자를 돕는 의연금으로 내놓는다'라고 적혀 있다.
이충도 지수초교 총동창회 사무총장은 "7000원이란 돈은 당시 쌀 한가마의 가격 28원이었으니 250가마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요즘 한가마는 20만원을 훌쩍 넘긴다.
허준 선생은 이어 국고(國庫)가 비면 먼저 나서 채웠고, 독립운동 지원과 육영(育英)사업에도 크게 기여했다.
기록에 의하면 1894년 갑오년에 군량미 조달에 1만냥을 출연했고, 그 해 7월에는 곡식 100여섬을 내놓아 배를 곯는 사람들을 도왔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수탈로 인해 세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전 마을의 세금을 내주기도 했다고 하니 가히 칭송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허준 선생은 또 의령의 천석꾼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1885~1943년) 선생이 1914년 국내 독립운동단체에 자금 지원을 위해 부산에 백산상회를 세웠는데, 경북 경주의 최부자인 최준(崔浚·1884~1970년)과 함께했다.
백산 선생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삼백(三白)’ 중의 한 사람이다. 삼백은 ▲백산 선생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년) 선생 ▲청산리대첩의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1889~1930년) 장군이다.
이후 백산상회는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돼 상하이임시정부와 만주의 독립운동 자금조달 중심 창구 역할을 하게 된다.
안희제 선생의 생가는 의령군 이병철 창업주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다. 승산마을에서 가는 도중에는 곽재우 장군의 생가도 있어 지수와 의령 땅은 외세에 휘들리던 우리의 근대 역사에 걸출한 자취를 남긴 '거인의 고장'이라고 할 만하다.
▶부친의 '지신' 이어간 둘째 허만정 선생
허준 선생의 차남이자 만석꾼 허만정(許萬正·1897~1952년) 선생은 어머니 함안 조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의 주소는 진양군 하봉면 승산리였다.
그를 이해하려면 사돈 간인 LG그룹이 창업할 때 자금을 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지난 1997년 LG와 계열 분리한 GS의 실질적인 창업주로 불린다. 구인회 LG 창업자와 락희화학공업사 창업 때 돈을 대 공동창업을 했고 이는 LG그룹의 모태다.
허준 선생의 '지신 정신'의 맥은 그의 아들인 효주 허만정 선생에서도 이어졌다. 아버지를 이어 빈민들을 구휼하고,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도 나섰다.
1914년 상하이임시정부에 독립운동 비밀자금을 조달한 백산상회 설립에 부친과 함께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참여했다. 나중에 백산무역(주)의 주식을 사들여 대주주로 있기도 했다.
이어 1920년 4월 주식회사 주일상회(主一商會)가 설립되자 취체역에 취임했고, 같은 해 9월 주식회사 협성상회가 설립될 때는 감사에 취임해 1923년까지 역임했다. 1922년 대한청년단원 황임성(黃壬性)에게 30원을 빌려주기도 했다.
허만정 선생은 경남 남해대교 아래쪽,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 충렬사에도 돈을 보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 일부러 자신의 이름 정(正)에 갓머리(宀)를 씌워 피했다고 한다.
허만정 선생은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백정(白丁) 신분 해방운동인 '형평사운동' 때도 적극 지원했다. 이를 두고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는 허 씨 집안의 '불살지덕(不殺之德)' 유풍 때문이라고 세평을 한다.
기자는 여기서 1991년에 나왔던 시인 정동주의 대하소설 '백정'을 떠올렸다. 1862년 무장 봉기였던 진주 농민항쟁을 기점으로 1890년대 말까지 백정의 삶과 투쟁을 통해 조선민중사의 한 단면을 그린 작품이다. 원고지만도 1만2000장에 이른다. 자료 수집 6년에, 집필 4년이 걸렸다. 정동주 시인은 처음엔 시(대서사시)를 쓰려고 했지만 시로서는 담을 수 없어 바꿨다고 한다.
이 소설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초년 기자 때 읽었는데 한꺼번에 10권 전부를 다 읽지 못했다. 서부경남의 진한 사투리가 많아 진주에서 자란 기자도 사전을 지주 들춰야 했다. 입으로 구전되던, 가축보다 대접을 못 받던 백정들의 억압과 울분의 삶이 당시의 민주화 물결에 투영됐다고 여겨진다.
사투리를 적당히 썼으면 조정래의 '한강', '태백산맥' 못지 않은 베스트셀러가 됐을 것으로 여겨진다. 정동주 시인은 서울대 법대에 다니다가 학생운동으로 구속 되는 등으로 고초를 겪다 서울생활을 접고 1979년 경남 사천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면서 서사시 '논개' 등을 발표하는 등 농군 시인으로 글을 썼다.
잠시 곁길로 빠졌지만 허만정 선생을 중심으로 한 허 씨 집안은 개·돼지의 목숨보다 못한 백정의 한을 감싸안았다는 말이다.
그에 대한 찬사는 더 이어진다.
한국사에서 '이념의 암흑기'인 해방 직후에서 한국전쟁 때까지 좌우 이념 진영에서 살생까지 거림낌없이 할 때에도 승산마을 등 지수에서는 단 한 건의 살생이 없었다. 승산마을에서 한 사람의 부자도 이념 때문에 화를 당하지 않았다.
청년 30명이 죽창을 들고 일제강점기에 친일 성향을 보인 지수면장을 죽이려고 하자 허만정 선생은 "내 배를 먼저 찔러라"며 몸으로 막았고 청년들은 물러섰다고 전해진다. 평소 궁핍한 이웃들을 돌봐온 허만정 선생의 인품에 이들도 그의 말을 거부하기 힘들었다.
승산마을은 한국전쟁 때도 화를 피했다. 전쟁 전 우익들이 좌익을 해치려 하면 중간에서 설득해 좌익을 살렸고, 전쟁 통에는 인민군이 우익을 검거해 살해하려 하자 중간에 나서 말렸다. 빨치산들도 그의 의로움을 알았기에 지수면을 해치지 않았다.
한마디로 좌와 우에서 모두 존경받은 허만정의 도덕적 카리스마가 막은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전쟁 중이던 1952년 5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허만정 선생은 육영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LG 구인회, 삼성 이병철, GS 허정구, 효성 조홍제 창업주들이 졸업한 지수공립보통학교 부지 제공에 힘썼다.
1925년 진주여고의 전신인 진주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해 근대여성을 길러냈다. 진주여고는 1924년 허만정 성생 등 지방 유지 10명이 일신재단을 만들었고, 이듬해 4월 4년제인 사립학교인 진주일신여고를 설립했다. 진주여고는 경남의 명문 여고 자리를 오래도록 이어왔다. 이 사실을 진주 사람들도 아는 이가 많지 않다.
허만정 선생이 학교를 세우는 과정에 부친 허준 선생이 “돈을 어떻게 썼느냐”고 물었다. 허만정은 “학교 세우는데 한 번에 털어 넣었습니다”라고 답했다. 지신정은 “잘했다. 돈은 그렇게 써야 한다”고 했다고 했다니 영락없는 부전자전이다.
진주여고, 즉 진주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를 위해 ‘털어 넣은’ 자금은 논 3만3000평, 밭 470평과 대지였다.
허만정 선생은 1927년 8월 5일 동아일보사 진주지국 승산분국이 설치되자 고문에 임명됐다. 1928년에는 중외일보사 부사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 '작은 승지' 허만정 동생 허만진
승산마을의 또다른 만석꾼으로는 허만진 선생이 있다. 만석꾼 둘째형인 '큰 승지' 허만정에 이어 '작은 승지'로 불렸다.
허만진 선생도 부친과 형 못지 않게 근검절약과 노동의 가치를 강조했다.
어려운 이웃들이 농번기가 아닌 춘궁기에 양식이 없을 때는 그저 곡식을 주지 않았다. 마을에서 10리(4km) 떨어진 방어산에 있는 돌을 집 앞마당에 가져다 놓으면 쌀 한 되나 한 말씩을 줬다. 쌀을 얻어가는 사람이 구걸이 아니라 노동의 대가로 쌀을 갖도록 해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다고 한다.
그 돌들이 쌓여 그의 생가였던 마당에는 돌무덤이 아직도 있다. 금강산을 닮았다고 해서 '승산마을 금강산'으로 불린다.
허만진 선생의 후손도 한국전쟁 때 유명을 달리해 '금강산'만이 그의 집터를 지키고 있다.
베품도 내림이다. 허 씨 가문의 천석·만석꾼들은 부지런하고, 아끼는 것을 생활화 하고, 베풀고 나눠주기를 실천해왔다. 도덕적 기품을 유지하면서 가진 만큼 베풀었다. 요즘 말로는 프랑스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s)를 실천한 것이다.
▶ 허준구→허창수로 이어지는 GS그룹
허만정 선생은 슬하에 ▲허정구(첫째) ▲허학구(둘째) ▲허준구(셋째) ▲허신구(넷째) ▲허완구(다섯째) ▲허승효(여섯째) ▲허승표(일곱째) ▲허승조(여덟째)를 두었다.
허만정 선생은 첫째 부인 초계 정 씨(참봉 정연기 딸) 사이에 허정구·허학구·허준구·허신구·허완구 등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고, 부인이 1938년 별세하자 둘째 부인으로 진주 하씨를 맞아들여 슬하에 허승효·허승표·허승조 등 세 명의 아들을 두었다.
셋째아들 허준구 선생은 사돈인 구인회 LG 창업주가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할 때 부친이 일부 자금을 대면서 도와주라고 권해 영업이사로 참여했다. 두 가문의 동업이 시작된 것이다. 허준구 선생은 허창수(許昌秀) GS 명예회장의 부친으로 GS의 창업주다. 현재 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다.
배다른 알토전기 허승효 회장 등 삼형제도 독립적으로 기업을 설립해 경영하고 있다.
※ 다음은 '허만정과 그 후손들'(3-4) 기사가 이어집니다. 만석꾼 허만정 선생의 후손들은 GS그룹 등에서 경영 일선에 일하고 있고 내용도 많아 따로 분리해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