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시작됨을 알리는 입하(立夏)는 24절기 중 일곱 번째 절기입니다. 곡우(穀雨)와 소만(小滿) 사이에 들어 있고, 올해는 어린이날과 겹쳤습니다.
입하는 보리 맥자를 써서 맥량(麥凉), 맥추(麥秋)라고도 합니다. ‘보리가 익을 무렵의 서늘한 날씨’란 뜻입니다. 초여름이란 뜻으로 맹하(孟夏), 초하(初夏), 괴하(槐夏), 유하(維夏)라고도 부릅니다. 음력으로는 4~6월 3개월을 여름으로 보지만 절기상으로는 입하에서부터 입추까지를 여름철로 칩니다.
이때가 되면 봄날의 기운은 완전 퇴색하고 산과 들에는 신록이 넘실대기 시작하며 연초록이 진녹색으로 옷을 갈아입습니다.
물가엔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요. 실제로 집 근처 호숫가 산책로를 지날 때면 '개굴개굴' 합창이 대단해졌습니다. 만화방창 앞다퉈 피던 꽃들도 잎사귀들에 자리를 내주는 지금의 시절에 찾아온 '천상의 소리'이자 '치유의 소리'가 아닌가 합니다.
다만 이 무렵 유독 자태를 뽐내는 꽃이 있습니다. 이팝나무입니다. 입하 즈음에 꽃을 펴 '입하목'이라고 부릅니다. 조팝나무도 아류에 속하지요. 요즘은 지자체에서 도심에 많이 심어놓아 어렵지 않게 봅니다.
이팝 꽃은 흰쌀밥처럼 생겨 입에 풀칠하기 힘들던 옛날에는 이팝나무를 보며 쌀 풍년을 기원했다고 합니다. 이팝나무가 습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어 꽃이 흐드러지게 활짝 피면 여름철 가뭄 없이 풍년이 될 것으로 점쳤다네요. 천수답이 많았던 옛날 농부들의 지혜입니다.우아함의 대명사인 연꽃도 이날 이후 조금 지나면 꽃봉오리를 터뜨리지요.
또 습한 마당에는 지렁이들이 나와 꿈틀거리고, 집 옆의 남새밭에는 참외꽃이 피기 시작한다고 하네요. 개미들도 나와 다니기 시작합니다. 자연을 벗삼아 사는 분들은 쉽게 보고 느끼는 것들입니다.
옛글을 보면 입하 후 다음 절기(소만) 때까지 15일을 5일씩 쪼개 초후엔 청개구리가 울고, 중후엔 지렁이가 꿈틀대고, 말후엔 쥐참외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 무렵엔 씨를 뿌려놓은 모판에서는 볍씨의 싹이 터 모가 한창 자라고, 밭의 보리이삭도 패기 시작합니다. 이 같은 들과 밭의 정취를 보는 것만으로 '영혼의 찌듦'이 살살 녹아 없어집니다.
이번 주말이나 다음 주말에 야외로 나선다면, 영화 '서편제'에서 나오는 완도의 외딴섬 청산도를 찾지 않아도 충분한 힐링이 될만한 요즘입니다. 꽃피는 춘삼월과는 다른 자연 그대로의 풋풋함을 맛볼 수 있겠지요.
야외 길가의 논밭 언덕배기에 난 쑥을 캐 와서 쑥떡이나 쑥버무리(쌀가루에 무쳐 시루에 찜)를 해먹는 것도 별맛 중의 별맛일 겁니다.
찻잎도 무럭무럭 자랍니다. 본래 녹차 중 곡우(穀雨) 전에 제일 먼저 나온 어린 찻잎을 따서 만든 것을 '우전차(雨煎茶)', '세작(細雀)'이라고 하는데 입하 무렵의 찻잎도 버금가게 좋답니다. '입하차'로 알려져 있습니다.
참고로 우전차는 이른 봄에 가장 먼저 딴 찻잎으로 만든 차로 첫물차라고도 하는데 여린 찻잎으로 만들어 은은하고 순한 맛과 향이 와닿는 차입니다.
유명한 전남 보성 녹차축제(다향제)도 5월 중순부터 열립니다. 올해도 작년처럼 현장 행사는 하지 않고 비대면 온라인으로 열리겠지요.
요즘은 보기 힘들어졌지만 집안에서는 아낙네들이 누에치기에 바쁜 시기가 됩니다. 뽕나무 잎이 누에들이 먹기에 적당하게 자라 있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뽕잎을 따다 넣어주면 누에들이 어느샌가 잎을 다 갈아먹어 "입이 없는데 어떻게 먹었지" 하며 신기했던 적도 있습니다. 시골에서 자란 분들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참고로 뽕나무 잎은 양잠용(누에먹이)으로, 뿌리를 포함한 나무 껍질은 약용과 제지용으로, 열매는 식용 및 약용으로 쓰입니다. 열매인 오디는 옛날엔 배고플 때 요긴하게 따서 먹던 최상의 군것질이었습니다.
입하 절기에 농사는 어떨까요? 논밭에는 해충이 많아집니다. 날씨도 좋아 해충이 활동하기에 딱 좋습니다.
또한 이때부터 잡초와의 전쟁을 각오해야 합니다. 풀뽑기에 손이 자주 가는 시기입니다. 지금부터 내리는 비는 잡초의 영양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고요. 밭메기를 하고서 비온 뒤 가보면 잡초가 무성해져 있음을 말합니다. 개인적으로 "돌아서면 무성하게 자라 있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자주 들었습니다.
◇ 입하 관련 속담
- 입하 바람에 씨나락 몰린다
재래종 벼로 이모작을 하던 시절, 입하 무렵에 못자리 만드는 작업이 한창입니다. 이때 바람이 불면 씨나락이 몰리게 되는데, 못자리 물을 빼서 피해를 방지하라는 뜻입니다. 어느 지역에서나 바람이 세지는 때입니다. 동해안은 높새바람 등 바람이 엄청 세게 분다고 합니다. 높새바람은 늦은 봄에서 초여름에 동해에서 태백산맥을 넘어 부는 고온 건조한 바람입니다.
- 7월 동풍이 벼를 말린다
입하란 단어가 들어가는 속담은 아니지만 이때 강원 영서지방에 부는 동풍이자 건조한 바람인 높새바람으로 인해 초목이 말라 비틀어 죽었다고 합니다. 녹새풍(綠塞風), 심지어 곡살풍(穀殺風)이라고 불렀습니다. 높새바람은 주로 영서지방과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에 걸쳐 영향을 미치지만 때로는 이 외의 지역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영동지방 사람들은 농사철에 동풍이 불기를 바랐지만 영서지방 사람들은 서풍이 불기를 바랐다고 하네요. 고려사(高麗史)에는 “인종 18년(1140)에 간풍(艮風·샛바람)이 5일이나 불어 백곡과 초목이 과반이나 말라 죽었고, 지렁이가 길 가운데 나와 죽어 있는 것이 한줌 가량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고 합니다.
- 입하물에 써레 싣고 나온다
입하가 다가오면 모심기가 시작되므로 농가에서는 들로 써레를 싣고 나온다는 뜻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써레를 잘 모르는데 소가 쟁기를 끌어 갈아낸 논바닥의 흙을 평평히 고르는 농기구입니다.
- 입하 일진이 털 있는 짐승날이면 그해 목화가 풍년 든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 해는 목화 풍년이 든다는 뜻입니다.
- 입하에 물 잡으면 보습에 개똥을 발라 갈아도 안 된다
재래종 벼를 심던 시절 입하 무렵에 물을 잡으면, 근 한 달 동안을 가둬두기 때문에 비료의 손실이 많아 농사가 잘 안 된다는 뜻이랍니다. 땅을 가는 데 쓰는 쟁기, 극젱이, 가래 등 농기구의 술바닥에 끼우는, 넓적한 삽 모양의 쇳조각입니다. 농기구에 따라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