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성어 '하로동선(夏爐冬扇)'은 여름 하(夏), 화로 노(爐), 겨울 동(冬), 부채 선(扇)입니다. 여름철의 화로와 겨울철의 부채라는 뜻으로, 여름에 뜨거운 화로를 곁에 끼고 겨울에는 부채질을 한다는 것입니다.
더운 여름에 화로가 필요 없듯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말이나 재주'를 비유하는 말입니다. 또한 '철에 맞지 않거나 쓸모없는 사물'을 비유하기도 하지요.
더불어 여름에 화로를 잘 관리하고 겨울에 부채를 잘 챙겨야 다음 해에 오는 무더위와 추운 겨울을 잘 견딜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 사자성어가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은 오래 전 서울 강남에 야권 정치인들이 차린 고깃집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해 놀던 이들이 의기투합해 "놀면 뭐하냐"며 차린 식당이지요.
하로동선과 반대의 의미를 지닌 '하갈동구(夏葛冬裘)'란 사자성어도 있습니다. 여름 하(夏), 칡 갈(葛), 겨울 동(冬), 갖옷 구(裘)입니다. 갖옷이란 짐승의 털가죽으로 안을 댄 옷입니다.
한자가 무척 어렵네요. '여름의 서늘한 베옷'과 '겨울의 따뜻한 갖옷'이란 뜻입니다.
여름엔 더위를 잊게하는 서늘한 베옷을, 겨울엔 추위를 막아줄 따뜻한 갖옷이 있으면 겨절 나기에 한결 수월합니다. 격이나 철에 맞다는 의미이며, 상황에 맞는 대처를 해야 한다는 뜻으로도 활용됩니다.
다시 하로동선 이야기를 해봅니다.
지난 1995년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더불어민주당 전신)를 창당합니다. 하지만 야권의 비주류들은 김 전 대통령의 정계복귀에 반대하며 따로 '국민통합추진회의'를 만들었지요. 이들은 이듬해 제15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에서 국민통합추진회의 후보로 출마했지만 대부분 낙선합니다. '정치 낭인(浪人)'이 된 것입니다.
어느 날 이들의 모임에서 유인태 전 의원이 “먹고도 살아야겠고, 훗날 그럴듯한 연구소 하나 만들려면 ‘쇼부(승부(勝負)의 일본어 발음)’가 빠른 음식점 하나 차리는 게 어때?”라며 농반진반 제안을 했답니다.
이들은 자신이 처한 신세와 훗날을 기약하는 의미로 지금으로부터 26년 전인 1997년 3월 7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하로동선'을 개업합니다. 10명이 의기투합해 보증금 2억원에 월세 1000만 원 하는 2층 건물(172석)을 빌린 식당입니다.
김원웅, 김홍신(현역 의원), 노무현, 박계동, 박석무, 원혜영, 유인태, 이철, 제정구, 홍기훈 등 전·현직 국회의원이 공동출자해 공동경영 방식으로 운영하기로 합니다. 총선을 치른 직후여서 모두 돈이 없어 서로 맞보증을 서면서 은행 빚을 얻었다고 합니다. 초대 사장은 얼마 전에 사망한 김원웅 전 의원(전 광복회장)이 맡았지요.
식당 상호를 하로동선으로 정한 사연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낙선한 사람이 많아 '낙동강 오리알'로 지으려고 했으나 비하의 의미가 너무 강하다며 후일을 도모한다는 차원에서 '하로동선'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정치인들이 개업한 식당이란 소문이 나면서 한동안 손님이 붐볐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이들은 하루에 2명씩 당번을 정해 손님 자리를 돌며 고기를 굽고 ‘술시중’도 드는 등 꽤 열심히 했답니다. 노무현은 한때 국회 청문회 스타였고 제정구 등 대부분이 재야 인사들이라는 ‘청결 이미지’ 덕분에 단골손님이 늘었습니다. 식당 문에 붙인 ‘오늘의 당번’ 이름을 보고 찾아온 손님도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의 '경영 미숙(?)'으로 1년 남짓 운영하다가 문을 닫게 됩니다. 개업 첫해에 1억 원의 부가가치세를 내는 등 대부분의 식당이 하는 이중장부 없이 식당을 운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높은 인건비에 어려움을 겪던 중 'O-157 장관(腸管·장 출혈성 대장균) 파동'이 겹치면서 결국 문을 닫습니다. O-157은 익지 않은 소고기를 먹으면 걸릴 수 있어 대부분의 소고기집들이 크게 힘들었지요.
때마침 15대 대선(1997년 12월 18일)이 다가오면서 정계 개편으로 공동창업한 이들도 정치 이해관계에 따라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들은 ‘제3후보론(조순)’, ‘정권교체(김대중)’, ‘3김 청산(이회창)’을 놓고 논의를 벌이다가 대선 한달 전쯤 제주의 호텔에 모여 '국민통합추진회의' 해체를 선언합니다.
하로동선은 이후 ‘백두산’, ‘신(新)하로동선’, ‘삼도갈비’로 바뀌었고 지금은 삼겹살 전문점 ‘육시리®’로 영업 중입니다.
하로동선은 '쓸모없이' 사라졌지만 후대를 기약한다는 상호의 또다른 의미처럼 대통령(노무현)을 탄생시켰고, 공동창업한 이들은 힘 있는 정치인으로 다시 돌아왔었습니다. 화로는 겨울과 조우하고, 부채는 여름을 만난다는 계절의 진리가 맞아떨어졌습니다.
여담인지 식당을 할 당시 일요일이면 꼭 들르던 등산객 차림의 팔순 노부부가 "정치 하듯 식당 하면 망할 거고, 식당 하듯 정치 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애매합니다. 정치 하듯 해서 식당은 1년 만에 문을 닫았고, 식당 하듯 정치를 해서 대통령도 나왔다고 해석하면 맞는 건지요? 노부부 말에 맞춰 이들의 행보를 해석하려니 헷갈립니다.
※ 참고로 기자도 이 무렵 동료 기자들과 이들 정치인과 함께 식당 2층에서 고기를 구워먹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풀무원을 경영하던 원혜영과 유인태, 박석무 씨 등이 주위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눈 듯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오지 않은 자리였지요.
지난해 3월에는 이런 이야기를 담은 영화 '하로동선'이 개봉됐는데, 이 식당에 ▲음흉한 스님 ▲장풍 쏘는 교주 ▲첩보원처럼 생긴 사내 ▲우뢰매를 닮은 덩치 큰 자폐아 ▲빤질빤질한 부동산 사장 ▲건방 떠는 강남 졸부 ▲노숙견 누렁이가 문지방 드나들듯 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기자는 이 중 어느 부류에 속했는지를 잠시 생각해 봅니다.
사자성어 '하로동선'을 좀 장황하게 짚어봤습니다.
글이 길었던 만큼 사연도 많은 사자성어입니다. 독자 분들도 사자성어 '하로동선'이 떠올려지면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길흉화복은 항시 바뀌어 미리 헤아리지 못함)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