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합천 황강가에 자리한 옥전고분군의 유구(遺構·유적 구조)는 몇 개의 능선에 나눠져 넓게 분포하고 있다.
대부분의 무덤은 봉분이 남아 있지 않아 겉으로 볼 때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특이하게 언덕의 한쪽 지역에는 지름 20~30m 내외의 높은 봉분을 가진 무덤이 27기가 모여 있으며 전체 고분의 숫자는 1000여 기로 추정된다.
유적은 1985년 여름 경상대박물관의 황강 주변의 정밀지표조사 과정에서 많은 양의 토기, 갑옷과 투구, 금동제 유물 조각이 채집되면서 그 중요성을 확인하게 됐고, 그해 겨울에 1차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1987년 겨울, 1989년 봄에 걸쳐 3차의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1991년 여름부터 1992년 봄에는 4, 5차 발굴조사가 이뤄져 이 고분유적이 4~6세기 전반에 걸쳐 조성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따라서 이 유적은 약 200년 가까이 이 지역에서 살았던 가야 사람들이 남긴 흔적임을 알 수 있다.
옥전고분군은 언덕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묘역을 넓혀가면서 축조됐다.
무덤 형태는 일반적인 덧널무덤과 덧널의 바깥쪽에 돌로 보강한 이 지역의 독특한 덧널무덤, 구덩식돌덧널무덤, 앞트기식 돌방무덤, 굴식 돌방무덤 등 다양하다.
이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가야고분뿐 아니라 우리나라 고분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획기적인 자료다.
이 출토 유물을 중심으로 옥전고분군의 발굴조사 성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화려한 장신구/ 귀걸이, 목걸이, 팔찌, 가락지 등 출토
귀걸이는 40쌍이 발견되었는데 지금까지 조사된 어느 가야고분보다 수량이 많고 화려한 장식과 정교한 세공 기술은 당대의 백제나 신라의 귀걸이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
또한 쿠마모토현 에다후나야마고분군, 덴사야마고분 등에서는 합천 옥전고분군의 것과 유사한 금귀걸이가 출토돼 두 지역의 교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옥전 28호분에서 출토 금귀걸이는 가야 귀걸이를 대표하는 유물로 일본 금속 공예에 영향을 준 점을 인정받아 2019년 12월 보물 제2043호로 지정됐다.
목걸이는 옥전(玉田·구슬밭)이라는 유적의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구슬로 만들어졌다.
특히 M2호분에서는 한꺼번에 2000여 개가 넘는 구슬이 발견되기도 했다. 가야고분에서는 처음으로 28호분에서는 이러한 구슬을 다듬는 데 사용되었던 사암제의 옥을 갈던 숫돌이 발견되어 이 지역에서 직접 구슬을 제작했다는 것을 입증했다.
▶고리자루 큰칼 등 신분 상징 유물들
신분을 상징하는 유물도 많이 출토됐다.
23호분에서는 맨 윗부분에 금동봉이 있어 국내에는 그 예가 없는 희귀한 자료로 평가되는 금동관모(金銅冠帽)가 출토되었고, 용이나 봉황문양으로 장식한 고리자루 큰칼은 35호분과 M3, M4, M6호분에서 출토됐다.
특히 M3호분에서는 용봉문양 2점, 봉황문양 1점, 용문장식 1점 등 장식 고리자루 큰칼 4자루가 함께 부장된 것을 확인했다. 이는 우리나라 최고 지배자급 무덤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이를 인정 받아 2019년 12월 보물 제2042호로 지정됐다.
▶무말갖춤 등 철제 유물들
옥전고분군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철제품들이 출토됐는데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종류는 무기와 갑옷, 말갖춤들이다.
특히 말머리가리개는 부산 동래 복천동 10호분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이래 여러 고분에서 출토되었는데, 옥전고분군에서는 이 말머리가리개가 무려 6점이나 출토됐다.
일본의 경우 오타니고분과 쇼군야마고분, 후나바루 고분군의 출토품 3점 정도가 전부인데, 이처럼 단일고분군에서 6점이나 발견되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이 유적의 중요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옥전고분군에서 출토된 말머리가리개는 일본의 것보다 시기적으로 빠르고 수량도 휠씬 많아 당시 우위의 무장력을 갖춘 일본이 가야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에서도 그 근거를 잃게 됐다.
옥전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는 여러 지역과 연계된 유물들도 있다.
M3호분에서 출토된 금동장식 투구는 고구려 계통의 유물이며, 용봉문양고리자루큰칼과 말 안장틀의 거북등무늬는 백제 또는 중국의 남조(南朝)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또 M1호분에서 출토된 유리잔과 편원어미형말띠드리개[扁圓魚尾形杏葉], 금동제허리띠, 창녕식토기, M6호분에서 출토된 출자형(出字形) 금동관은 창녕, 신라와의 교류를 통해 얻어진 산물이다.
M11호분에서 출토된 금제귀걸이와 나무널에 붙이는 연화문장식, 널못 등도 백제 계통의 유물이다.
한편 옥전고분군에서는 가야 고분에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의 로만글라스가 발견됐다.
이 유리그릇은 지중해 연안에서 제작된 유물로서 실크로드를 통해 유라시아 대륙 전체로 확산했으며 동서 문물 교역의 중심에 있던 신라가 이것을 받아들여 가야지역에 전했다고 본다. 5세기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옥전고분군 축조 세력의 대외교섭 능력을 보여주는 자료라 할 것이다.
▶'다라' 명칭 공통 사용
‘다라’라는 명칭은 현재 옥전고분군 동쪽에 위치한 ‘쌍책면 다라리’라는 지명으로도 전해지고 있으며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는 나라 이름이다.
대표적으로 중국의 외교문서인 양직공도(6세기)와 일본서기(8세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양직공도는 530년대 중국 양나라에 조공 온 외국사절을 묘사한 그림으로 '다라'라는 국명이 확인되고 있다. 일본서기는 백제본기 등 백제 삼서를 인용하고 있어 한국고대사 관련 내용이 많으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기록된 내용과 부합되는 것도 많아 학계에서는 비교분석과 사료비판을 통해 삼국시대 연구에 활용하고 있다.
북한의 가야사연구자인 조희승도 그의 저서(북한학계의 가야사 연구)에 6가야 외에도 가야지명이 있을 수 있으며, 합천 일대에 다라국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일본열도의 다라와 관련된 지명도 다라사람들의 일본 진출 및 정착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밀양 박 씨 관련 문건에서도 ‘다라’라는 지역명을 발견할 수 있어 지속적으로 사용된 지명임을 알 수 있으며, 무엇보다 옥전고분군에 출토된 많은 양의 비늘갑옷, 투구, 말투구, 말갑옷 등 고고학자료들을 통해 이 고분군을 다라국의 지배묘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옥전고분군은 최고 수장급의 고분에서 발견되는 유물을 거의 모두 포함하고 있는 가야 최고 지배자의 무덤이다.
용봉문양 고리자루큰칼이나 철제갑옷, 금동장 투구, 말머리가리개에서 가야문화뿐 아니라 우리나라 고분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되며, 합천 지역의 고대 역사와 문화를 증명하는 유산으로서 그 가치가 있다.
또 이러한 유물은 고구려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삼국시대의 정치적 환경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한국세계유산도시협의회 회장인 김윤철 합천군수는 “10여 년의 부단한 노력 끝에 가야고분군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축하 하며,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힘써 준 여러 관계자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하다”면서 “옥전고분군을 비롯한 가야고분군의 우수한 역사와 세계유산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최선 다하겠으며 이를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