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본명 제임스 얼 카터) 미국의 39대 대통령이 29일 오후 3시 45분쯤(현지 시각)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고 그의 고향인 조지아주 언론들이 보도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역대 미 대통령 중 가장 장수했다. 고인은 지난해 2월부터 자택에서 호스피스 간호를 받아왔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77~1981년 대통령 재임 중 주한미군 철수를 압박해 한미동맹 관계에 심각한 상황이 연출됐다.
대통령 재임 시절 고 실업률, 물가 상승 등 경제 문제에 대외 악재까지 겹치며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퇴임 후 봉사 활동 등을 통해 재평가를 받았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 미·북 사이의 중재자로 나서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간 만남을 도모하기도 했다.
하지만 1953년 아버지가 암으로 사망하자 전역 후 조지아로 돌아와 아버지의 땅콩 농장과 농기구 등을 취급하는 상회를 물려받아 운영했다.
그는 이후 교육위원에 출마하며 정치에 입문했고 1970년 조지아 주지사에 선출됐다.
▶대통령 재임 시절
카터 전 대통령은 4년의 주지사 임기를 마치고 1976년 11월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공화당의 제럴드 포드 대통령을 꺾고 당선됐다.
대선 출마 당시 유권자의 인지도는 2% 정도였지만 워터게이트 사건 등으로 국민들의 기성 정치에 대한 환멸 분위기에 대통령이 됐다.
집권한 카터 전 대통령은 서민적인 이미지를 앞세웠고 외교 노선에서도 인권, 도덕 등의 가치를 강조했다.
하지만 재임 당시 대외 악재가 줄을 이었다.
1978년 파나마운하 통제권을 파나마에 넘기면서 미국의 이익을 내버리는 대통령이라는 비난을 크게 받았다.
또 임기 말에는 2차 오일 쇼크, 이란의 미 대사관 인질 사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사태 등을 겪으며 지지율이 급락했다.
1979년 이란혁명 이후 학생들이 테헤란의 미 대사관을 점거해 53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삼자 이듬해 특공대를 투입한 구출 작전을 감행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1980년 대선에서 레이건에게 패배하며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했다.
▶한국과의 악연
카터 전 대통령은 대선 때 미군 철수 공약을 했고 1977년 취임하자마자 “향후 4~5년 내에 주한미군(3만 명)을 단계적으로 철수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 주한미군 철수 반대론이 일었고, ‘북한 군사력이 과소 평가됐다’는 국방부 정보 부서 보고서 등이 나오며 철수 계획이 백지화됐다.
그는 2015년 발간된 회고록에서 “당시 한국은 경제력으로나 기술력으로나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다고 봤다”고 밝혔다.
카터 전 대통령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9년 6월 정상회담에서 이를 놓고 설전(舌戰)을 벌인 사실이 기밀 해제된 외교 문서를 통해 뒤늦게 공개되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은 카터 전 대통령에게 “북한이 대남 적대 정책을 바꿀 때까지는 미 2사단이 남고 한미연합사령부가 계속 유지되기를 희망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훗날 이 회담과 관련해 “동맹국 지도자와 가진 토론 가운데 가장 불쾌한 토론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퇴임 이후 활동과 업적이 더 빛을 발했다.
고향인 조지아로 돌아가 1982년 비영리단체인 ‘카터 센터’를 애틀란타 에모리대 내에 설립했다.
이 센터는 세계의 분쟁 종식, 민주주의 실천, 인권 보호, 질병 및 기아 퇴치 등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그는 해비타트(사랑의 집짓기 운동), 질병 퇴치 등 인도주의 활동에 특히 자부심을 갖고 활동했다.
2001년 방한해 충남 아산 등에서 사랑의 집짓기에 참여한 적도 있다.
그는 수십 개국을 돌며 인권·평화 메시지를 전하고 사회 운동에도 힘쓴 공로로 2002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특히 1차 북핵 위기 당시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했지만 그의 평양 방문 직후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무산됐다.
▶일생
카터 전 대통령은 1924년 10월 조지아의 작은 마을인 플레인스에서 농부이자 사업가인 아버지, 간호사인 어머니 사이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해군사관학교 졸업 후 장교로 임관해 해군 잠수함 부대에서 복무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46년 7월 7일 플레인스의 작은 교회에서 자신보다 세 살 어린 로절린 여사와 결혼했다.
둘은 아주 어린 시절 때부터 알고 지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첫 만남에 대해 “우리 동네에서 새로 태어난 아기를 보려고 요람 안을 들여다봤다”고 회고했다.
두 사람은 지난해 11월 로절린이 96세의 나이로 별세할 때까지 미 대통령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인 77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한 부부였다.
카터 전 대통령은 결혼 75주년을 앞두고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오랫동안 결혼 생활을 지속하고 싶다면 딱 맞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최고 비결”이라고 말했다.
카터 전 대통령이 암 투병을 하고 로절린이 치매 진단을 받은 후에도 사랑이 변하지 않았다고 손자 조시가 전했다.
부부 사이에는 잭(78)·칩(74)·제프(72)·에이미(68) 등 3남 1녀와 11명의 손주, 14명의 증손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