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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무(農舞)', '가난한 사랑노래'···대표 민중 서정시인 신경림 씨 88세 일기로 별세

민초들 애환을 질박한 생활 언어로 노래

천진영 기자 승인 2024.05.22 13:03 | 최종 수정 2024.05.25 13:07 의견 0

시집 '농무(農舞)'와 '가난한 사랑노래' 등을 쓴 문단의 원로 신경림(본명 신응식) 시인이 지병인 암으로 22일 오전 8시 17분쯤 별세했다. 향년 88세.

22일 동국대 출신 문인들에 따르면 암으로 투병하던 신 시인은 이날 오전 경기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숨을 거뒀다. 의과대 재학 시절부터 고인과 연을 맺어온 서홍관 국립암센터장(시인)이 고인의 임종을 지킨 것으로 알려졌다.

신경림 시인 생전 모습. 창비 제공

대표 시집으로 ‘농무’(1975년), ‘가난한 사랑노래’(1988년), ‘낙타’(2008년) 등이 있다.

고인은 1936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충주고와 '문학의 최고 명문' 동국대(영문과)를 졸업했다.

동국대 재학 중이던 1956년 '문학예술'지에 '갈대', '묘비' 등의 작품이 추천돼 등단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1957년 고향으로 내려가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며 10여 년간 시를 쓰지 않았다.

이후 절친이던 시인 김관식 씨와 함께 상경했고, 1971년 계간 '창작과 비평(창비)' 가을호에 자신의 생생한 체험을 담은 '농무', '전야(前夜)' '서울로 가는 길'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며 시작을 재개했다.

농민과 서민 등 민중의 한과 고뇌를 담은 그의 첫 시집 '농무'는 1973년 나왔다.

'농무'는 최근 500호를 맞은 창비의 '창비시선’'1호로 출간됐다. 창비 대표를 지낸 문학평론가 백낙청은 '농무'의 발문(跋文··책의 끝에 본문 내용이나 간행 경위를 간단히 적은 글)에서 "민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받아 마땅한 문학"이라고 적었다.

신 시인은 이후 반세기 동안 '새재'(1979년), '달 넘세'(1985년), '민요기행 1'(1985년), '남한강'(1987년), '가난한 사랑노래'(1988년), '민요기행 2'(1989년), '길'(1990년), '갈대'(1996년),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9년), '낙타'(2008년), '사진관집 이층'(2014년) 등의 시집을 써냈다.

그의 시 '가난한 사랑노래'는 여전히 많은 독자들이 즐겨 찾는 애송시로 꼽힌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신경림 시 '가난한 사랑노래' 중에서)

고인은 민초들의 슬픔과 한, 굴곡진 삶과 애환을 질박하고 친근한 언어로 노래해온 '민중적 서정시인'이었다.

일찍이 문학평론가 최원식 씨는 그를 "우리 시대의 두보(杜甫)"라고 평가했다.

시론과 평론집으로는 '한국 현대시의 이해'(1981년),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1982년), '역사와 현실에 진지하게 대응하는 시'(1984년), '민요기행'(1985년), '우리 시의 이해'(1986년) 등을 남겼다.

제1회 만해문학상(1974년), 제8회 한국문학작가상(1981년), 제2회 이산문학상(1990년)을 수상했고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시카다상, 만해대상, 호암상 등을 받았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민족예술인총연합회 공동의장, 동국대 석좌교수를 지냈다.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고인이 마지막으로 낸 시집은 2014년 출간한 '사진관집 2층'(창비)이다. 창비 측은 미발표작 등을 모아 유고시집을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문인들은 고인과 그의 작품이 한국 현대시와 문단에서 차지하는 높은 위상을 고려해 장례를 주요 문인단체들이 함께하는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치를 계획이다.

발인은 25일 오전 5시 30분이며 빈소는 혜화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이다. 장지는 충주시 노은면 연하리 선산이다. 연락처는 신병규(아들) 010-3010-1386.

임종을 지킨 서 센터장은 “7년 전 대장암에 걸려 치료를 잘 받아 하루 5000보를 걸을만큼 정상적인 활동을 했는데 재발돼 그동안 호스피스 병동에 모셨다”며 “선생께서 워낙 깔끔하셔서 남에게 폐가 될까봐 아픈 걸 알리는 걸 꺼려해 가족 외에는 거의 오지를 못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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