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원의 선관위 비리 감사 결과 발표 이후에도 '누가 날 건드려'라는 듯이 버티던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4일 고위직 자녀 특혜채용 논란 및 복무기강 해이 문제 등에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어 "국회에서 통제방안 마련 논의가 진행된다면 적극 참여하겠다"고 했다.

국민들의 감정선이 비난을 넘어 격앙해지고, 언론의 집중 취재가 시작되자 급히 사과에 나선 느낌이다. 언론 매체들은 감사원 감사 결과를 다시 들여다보고서 후속 취재에 나섰고, 감사 결과 발표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내용들을 후속 보도로 내놓고 있다.

선관위의 이날 사과를 믿는 국민은 많지 않다. 진정성에 의구심을 갖는 사람이 많다. 그동안의 선관위 사과 행태를 볼 때 이번에도 '소나기 피하기식'이란 지적이 잇따른다.

노태악 중앙선관위원장이 2023년 신년사를 하고 있다. 중앙선관위

선관위는 이날 입장문을 통해 "감사원의 직무감찰이 종료되지 않아 징계 절차가 중단됐던 직원들도 관련 규정에 따라 신속하고 엄중하게 조치할 예정"이라고 했다.

'감사원 직무감찰이 중단되지 않았다'는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 어리둥절하다.

선관위는 앞서 감사원 감사를 못 받겠다며 자체 감사를 하겠다고 했고 '셀프 감사'에서 같은 채용 비리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헌법재판소에 감사원 직무감찰 권한쟁의 심판을 제기한 당사자다. 감사원이 자신들을 감사할 자격이 없다며 헌재의 판단을 받겠다고 했던 것이고, 이어 헌재는 선관위의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 사과문에서 '감사원 감사가 끝나지 않아서'라며 감사원의 직무감찰을 인정하는 해명을 해놓은 것이다. 실소가 나온다. 변명에 가깝다.

어줍잖은 권력에 오래 취해 있다가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하려니 앞과 뒤가 맞지 않고, 논리 전개도 뒤죽박죽 된 게 아닌가 싶다.

이번 감사원 감사 결과를 대충 훑어만 봐도 분개할 내용이 너무 많다. 도가 지나쳐 기자도 분을 참기 힘들 정도였다.

감사 시작과 진행 과정에서의 선관위 행태를 보면서는 아직도 대한민국 땅에 삼한시대 '소도(蘇塗)'와 같는 곳이 있나 싶었다. 소도란 하늘에 제사를 모시던 곳인데 성역처럼 여겼다. 기자는 감사원을 2년 넘도록 출입처로 두고서 수많은 비리 취재를 했었지만 선관위와 같이 뻔뻔한 '범죄 조직'을 경험하지 못했다. "누가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조직인 줄 알겠다"는 댓글이 딱 어울린다.

감사원이 2023년 6월부터 실시해 지난달 27일 발표한 ‘선관위 인력관리실태’에 따르면 선관위는 전·현직 직원들의 자녀를 합격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또한 광범위하게, 무려 수십 년간 불·편법으로 특혜채용을 했다.

비위 사례(아래 '관련 기사' 참조)가 너무 많다.

선거사범 잡겠다는 조직이 되레 이처럼 부패해 있었다니 종일 혀를 차도 모자랄 지경이다.

선관위는 이날 이에 대해 “2023년 5월 일부 고위직 자녀 채용 특혜 의혹에 대해 자체 특별감사를 해 사무총장·차장을 면직 의결하고 사무총장 등 고위직 4명을 사직 당국에 수사 의뢰했으며 관련 업무 담당 직원 4명을 징계 요구했다”며 특별감사 성과처럼 포장했다.

하지만 이 내용은 감사원 감사 과정에서 다 드러났던 것들이다. 감사원이 감사 결과 중간발표를 할 즈음에 이른바 "감사원 너들이 우리를 건드려?"라며 자체 감사 카드를 끄집어내고서 '셀프성 조사'에 나섰다. 이어 마치 자기들이 조사해 밝혀낸 것처럼 포장했다. 국민을 졸로 보는 전형적인 공직 사회의 행태다.

선관위는 이어 “이와 같은 문제가 불거진 뒤 같은 해 7월 조직 내부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35년 만에 외부 출신인 김용빈 전 사법연수원장을 신임 사무총장으로 임명했다. 동시에 인사·감사 관리의 공정성 확보 및 독립성 강화를 위한 제도도 개선해 시행 중”이라고 했다.

이 또한 선관위의 '35년 외부 출신' 주장과 달리 여론은 김 신임 사무총장더러 '그 나물에 그 밥'이라며 잘라 폄훼하고 있다. 김 총장이 부임한 이후 국민들의 눈에 변하려고 하고 있다는 느낌이 '요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자기들 권한 지키려는 요식 행보만 보였다는 말이 많이 돈다.

헌재에 낸 감사원의 직무감찰 권한쟁의 심판이 대표적이다.

헌재는 이 심판에서 최근 감사원이 선관위를 상대로 인력관리 실태에 관한 직무감찰을 벌인 데 대해 위헌·위법 하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현재 헌재 재판관 8명 중 6명이 각급 선관위원장 출신이다. 아무리 바른 결정이었다 한들 국민은 안 믿는다.

선관위의 사과에 이어 내놓은 조직 쇄신안도 '말 성찬' 수준이다.

인사 분야에서 채용 과정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동안 ▲지방직 경력채용 폐지 ▲100% 외부 면접위원 위촉 ▲다수인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경쟁채용제도(비다수인 경채) 폐지 등의 조치를 취했다고 했다.

감사 분야에서는 감사기구의 독립성 강화를 위해 지난해 1월 ▲다수의 외부위원으로 구성한 독립된 감사위원회 설치 ▲감사관 외부에서 임용 ▲감사기구를 사무처에서 분리 ▲인사감사 업무를 전담하는 감사부서 신설 등을 했다고 덧붙였다.

이들 인사 채용이나 감사 기구 등은 다른 조직에선 수십 년 전부터 해오는 것이다. 내놓을 것도 자랑할 것도 없는, 그냥 조용히 하면 되는 것들이다. 일부는 재탕이다. 선거에서 엄격한 잣대를 대는 선관위로선 누구보다도 먼저 챙겨야 했던 사안들이다.

선관위는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믿음과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공정과 신뢰가 생명인 선관위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선거 과정에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에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고 사과성 언급을 했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못 쓰던 우리 윗대들이 자주 쓰던 말, "말(변명)이나 하지 않으면 밉지나 않지"라는 경구가 있다. 촌로가 뱉은 이 말을 선관위는 곱씹어야 한다.

또 있다. "배우면 뭐하나"다. 배운 것으로 죄 짓고, 배운 머리로 그럴듯한 변명거리 만들고, 아래 위 모르고 으스대고···. 막살면 안 된다는 이웃집 촌로의 경구성 명언이다.

선관위의 이번 사과가 마지못해 하는 변명성이 아니길 바란다. 숨긴 것이 없길 바란다. 선관위가 자꾸 의심스러워진다. 진정성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선관위 소속원들은 사과문에서 언급했듯 '공정'과 '신뢰'만 잘 지키고, 각종 선거에서도 이를 잘 지켜가는지를 감시만 잘 하면 된다. 권위를 내세울 이유도, 사과를 할 이유도 없다. 또한 '끊임없는 자정'이란 말을 굳이 동원할 이유도 없어진다.

간단한 게 아닌가. 선관위는 수십 년간 이걸 못했다.

국민들은 지금 사과 말에 써놓은 저 간단명료한 것들을 못 지켰나라고 묻고 있다. 반면교사로 삼기를 바란다. 고인물은 꼭 썩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