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6월 25일, '6·25전쟁'이 터진 날입니다. 이 전쟁을 달리 '한국전쟁'이라고도 하는데 영어로는 'the Korean War'다. 유엔이라든가 외국에서 주로 씁니다.
기사를 쓰는 이 시간대는 72년 전 북한군이 이전에 그어놨던 38선을 부수고 침공해 남으로 내려오는 시간대입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6·25'란 단어를 머리 속에 앉혀봅니다.
기자는 전쟁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아~아 잊으라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로 시작하는 노래 가사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때 이날이면 선생님의 풍금 소리에 맞춰 불렀던 곡입니다. 집집마다 빠뜨리지 않고 조기를 달아 전장에서 고귀한 목숨을 바친 이들을 추념했습니다.
이 말고도 기자는 6·25에 관해 수십 줄을 단번에 요약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이대가 중년 이상이면 대부분 기자와 비슷할 듯합니다.
가장 많이 들었던 것은 '김일성의 북한 괴뢰군(꼭두각시 정권 군대)이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에 남북군사분계선인 38선을 넘어 불법남침했다'는 내용입니다.
전쟁이 시작됐던 해는 1945년 해방된 지 5년 되는 해입니다.
해방 이후 당시 나라의 분위기는 지금과 비슷한 '좌와 우의 이념 논쟁'으로 밤낮을 지새웠다고 기록들은 전합니다. 교수 등 '하이칼라'로 일컫던, 즉 먹물 깨나 손에 묻혔던 상당수 지식인들은 좌파 대열에 섰다고 합니다.
이들의 의식엔 '내가 배워서 아는데···, 곡괭이 들고 땅만 파는 너들보단 내가 세상 도는 이치를 더 잘 안다'는, 요즘 쓰는 말로 하면 선민(選民)의식이 꽉 차 있었다는 것이지요. 특히 '모든 일에 튀거나 삐딱하게 말하면 그게 지식인처럼 보였던'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민주주의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당시 민초(民草)들로선 식자층의 이 같은 말이 신선하게 들렸을 법합니다. 봉건왕조시대의 고관대작과 대주주,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수탈을 겪어오면서 억눌려 살던 백성들에게는 응어리져 있던 울분에 덧대져 잘 먹혀들었지요.
실제 지주 등 가진 자들의 반사회적 행위는 숱하게 많았던 시절입니다. 전근대적인, '있는 놈'이 잘 살고, '가진 놈'이 떵떵거리며 허세를 부리는 사회였지요.
주장이 다를 수 있지만 38선 이북을 차지한 김일성 정권은 이런 분위기를 적극 활용해 남한에 숱한 이념 성향의 분위기를 조장했고, 좌우 갈라치기를 하면서 사회 분열을 꾀했습니다. 몇 년간 꽤 성공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보면 민중해방, 이런 틀이지요.
기자의 머리에 자리한 또 하나의 6·25의 조각은 새벽 4시 20분에 기습남침을 했다는 것이지요. 초등학교 때 선생님은 '그것도 일요일이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날 국군은 전 군(軍)에 휴일을 맞아 모심기 등을 도우라며 대대적인 휴가 및 외출을 내보냈습니다. 전방 병력의 3분의 1일 이상이 병영 바깥에서 한가롭게 휴일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지요. 국군 수뇌부마저 휴일을 맞아 미군들과 파티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자료들에 따르면 김일성은 25일 새벽 3시에 긴급내각회의를 소집해 "이승만 정권이 북침했다"고 주장하며 남침을 명령했습니다. 당시 38선을 두고 쌍방 간에는 작은 도발들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전에 준비한 남침 계획은 지난 1994년 6월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건네준 KGB 외교문서에서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이 외교 문서엔 북한과 소련 간에 오간 6·25전쟁 준비와 관련한 내용이 기록돼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적하통일을 한 뒤 그해 8월 15일 광복절 행사를 서울에서 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었지요.
옐친은 우리나라의 대규모 원조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이 극비문서를 김영삼 대통령에게 준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6·25전쟁은 북한 김일성이 만들었고 소련 스탈린의 승인, 중국 마오쩌뚱(모택동)의 참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남침 3일만에 서울은 속수무책으로 함락됐습니다.
국군은 부산까지 후퇴하면서 3년간의 전쟁을 치렀습니다. 전쟁을 반전시킨 인천상륙작전이란 유명한 세계적인 전투사가 만들어졌고, 세계 63개국에서 참전해 도왔습니다. 무려 195만명이라고 합니다.
최근 몇 년간 6·25전쟁은 통일이란 미명아래 폄훼됐던 게 사실입니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바로 옆의 전우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본 생존자들은 그 트라우마를 어떻게 이겨내며 살아왔을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꽤 무겁습니다. 지금의 나라가 그냥 있는 게 아님을 느낍니다. 지금 우리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양국의 국민들이 겪는 전쟁 공포를 실시간으로 보고 있습니다.
기자는 오늘 6·25전쟁 노래 가사가 바뀌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시대에 따라, 상황에 맞지 않으면 바꿀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내용을 살펴보고 놀랐습니다.
6·25 노래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간 금지곡이 됐더군요. 가사도 바뀌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모시 ‘별이 되신 님이시여!’를 지은 심재방 시인이 개사했다고 합니.
다음은 '신(新) 6·25 노래' 가사 내용입니다.
1절='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조국의 산하가 두 동강나던 날을/ 동포의 가슴에다 총칼을 들이대어/ 핏물 강이 되고 주검 산이 된 날을/ (후렴) 이제야 이루리 그 날의 숙원을/ 동포의 힘 모아 하나의 나라로 피의 원한 풀어/ 하나의 겨레로 이제야 이루리 한나라 한겨레'
1절에는 북한군이 남침했던 내용 대신 남북한이 서로 총칼을 들이댔다는 것만을 보여줍니다.
2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동포 형제를 원수로 만든 그들을/ 겨레의 이름으로 부수고 또 부수어/ 선열의 흘린 피 헛되지 않게 시리'
2절에서는 6·25전쟁의 책임은 북한이 아니라 '외세'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외세는 소련과 미국으로 본 듯하네요.
3절='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자유와 민주와 평화와 번영 위해/ 민족의 공적과 싸우고 또 싸워서/ 통일의 그 날이 기어이 오게 시리'
3절은 민족의 공적과 싸워서 통일을 이루자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오늘(25일) 기준 네이버의 데이터랩에서는 '6·25' 단어 검색을 10대와 30대, 그리고 여성이 많이 했네요. 의외로 50대 이상은 적습니다.
아마 10대는 학교에서 6·25를 맞아 자료를 찾아보라는 과제를 낸 영향으로 보이고, 50대 이상이 적은 것은 6·25전쟁을 그러려니 하는 생각을 가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기자는 문재인 정권이 남북정상회담을 잇따라 갖고 '종전선언'을 한다는 분위기가 있던 언젠가, 국밥집에서 30~40대 두 명이 국가와 전쟁을 두고 주고받는 말을 듣고 말의 내용이 고마워 음식값 계산을 해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잊으면 안 됩니다.
남북의 이산가족이 1000만명이 넘고 한국군 전사자가 13만 8000명, 민간인 사망 25만명, 행방불명이 36만여 명에 이르는 등 그냥 잊기엔 너무 큰 전쟁의 상흔입니다. 부상자와 물적 피해는 또 어떠했습니까?
당시의 처절함은 잊지 앟고 기억하면서 추모하고, 시대에 맞춰 발전적인 변화를 모색해가는 것이 오늘에 나는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을 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망한다'는 게 역사계의 바이블입니다. 역사를 잃은 민족은 당연히 국가도 없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행히 우리는 전쟁의 폐허를 딛고 반세기를 넘게 나라 발전을 지속해 세계 10대 경제강국이 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