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새해는 토끼가 주인공인 계묘년(癸卯年)이다. 육십간지(육십갑자) 중 마흔 번째 해이다. 계(癸)와 묘(卯)가 만나는 '검은 토끼의 해'로 사주명리학에선 식신(食神·먹을 복)의 기운이 강하다고 한다.
토끼는 귀엽고 성질이 순해 약한 이미지이지만 여러 모로 영리함을 발휘해 자신에게 처한 위기를 잘 극복하고 헤쳐가는 것으로 상징된다. 이런 점에서 올해 매섭게 불어닥칠 '경제 한파'를 슬기롭게 극복해가는 토끼의 지혜가 더욱 필요한 상황이다.
자고이래로 늘 우리 곁에 있는 토끼는 ▲토끼전에 나오는 재치 있는 산토끼 ▲귀엽고 온순한 집토끼 ▲달에서 방아를 찧는 옥토끼는 물론 최근 인기를 끈 엽기적인 토끼 마시마로까지 다양하다.
■ 토끼의 특성과 상징
토끼는 귀엽고 순해 사람과 친숙한 동물이다. 어쩌면 가축과도 같아 설화(說話·없는 일을 사실처럼 하는 이야기)나 민담(民譚·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에서 다양한 의미로 등장한다. 시골에서 자란 중년 이상의 사람들은 집에 작은 토끼장을 만들어 토끼를 키워본 경험이 있을 정도로 친근하다.
하지만 토끼는 연약해 동물 중에 최약자다. 무림의 자연에서 호랑이나 늑대, 여우, 승냥이, 족제비 등을 피해 다녀야만 생존이 가능하다.
따라서 인간 사회는 토끼에게 영특한 지혜와 임기응변의 꾀를 부여해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동물로 상징화 시켰다.
삼국사기 속의 ‘구토지설(龜兎之說)’에 토끼는 용왕의 불치병을 고치기 위해 육지로 나온 자라에게 속아 용궁에 갔다가 "평소 간을 두고 다닌다"라는 기지를 발휘해 탈출하는 내용은 토끼의 영특함을 잘 보여준다. 이 설화는 조선 후기 판소리 별주부전의 ‘수궁가’로 이어졌다.
토끼가 호랑이를 재판하고 속이는 설화도 있다.
은혜를 모르는 호랑이를 재판한 ‘토끼의 재판’, 잡아 먹으려는 토끼에게 속아 언 얼음에 꼬리를 잘린 ‘꼬리 잘린 호랑이’ 설화가 이런 유다. 이는 힘 없는 백성(토끼)들이 권력자(호랑이)를 재치로 골탕을 먹이는 의미로 해석된다.
특히 토끼는 번식력이 강해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긴다. 농경사회에서 토끼를 통해 농가의 풍년과 가문을 잇는 다산을 기원했다.
십이지(十二支) 중에서 토끼는 해가 뜨는 동쪽을 지키고 계절적으로도 농사가 시작되는 음력 2월의 봄에 해당한다. 토끼를 뜻하는 한자 '묘(卯)'도 새싹이 흙을 밀치고 나오는 모습이나 대문을 좌우로 여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으로 해석한다. 시간으로도 묘시(卯時)는 오전 5~7시를 가리키는데 농부들이 들로 일하러 가는 때다.
토끼는 또 많으면 10여 마리를 낳는다. 저출산 인구소멸 위기에 처한 우리로서는 토끼의 해가 특별히 의미있게 와닿는다.
토끼는 달(月)과도 밀접하다.
달의 계수나무 아래에서 불로장생의 약을 만들기 위해 방아를 찧는다는 ‘옥토끼’(달에 산다는 전설의 토끼) 설화가 대표적이다. 월중토(月中兎)는 무병장수를 상징한다. 이 설화는 고대 인도의 설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한 마리’의 윤극영 작곡 ·작사 동요 '반달'도 이 설화가 배경이 됐다.
토끼는 귀가 커 많이 듣고 소통하는 상징을 가진 동물이기도 하다. 다른 동물을 해치지 않아 주변에는 항시 평화스럽다. 요즘 황량하고 살벌한 정치·사회에서 세상사를 듣고 살피는 토끼의 역할이 기대되는 대목이다.
토끼는 '행운의 표본'이기도 하다. 토끼는 클로버란 토끼풀을 주로 먹는데 풀잎이 3개일 경우 행복을, 4개 일 때는 행운을 준다고 알려져 토끼풀이 많이 난 곳은 희망의 땅이 된다.
부정적 이미지도 있다.
귀엽고 약한 토끼는 여성을 상징해 조선의 가부장적 사회에선 방정맞고 경망한 짐승으로 여겼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정월 첫 묘일(토끼 날)에 여자가 먼저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이날 여자가 남의 집을 방문하면 우환이 생긴다고도 여겼다.
반면 민화(民畵)에서는 한 쌍의 토끼가 자주 등장해 금실이 좋은 부부처럼 화목함을 상징한다. 실제 토끼는 무리를 이루어 생활한다.
겁이 많은 토끼는 항시 '사주경계'를 한다. 눈도 앞이 아니라 옆에 달려있다. 다만 약자의 운명으로 혼자 있으면 불안감을 느껴 수명이 단축된다.
흥미로운 것은 토끼는 위쪽으로 잘 달리지만 아래로는 못 달린다. 학창 시절 눈이 온 겨울에 전교생이 야산으로 토끼몰이를 하는데 나란히 서서 토끼를 아래 쪽으로 몬다. 위쪽으로 달아나는 토끼는 잡기 힘들지만 아래 쪽으로 달리는 토끼는 엉거주춤해 잘 잡힌다.
■ 전국의 토끼 유래 지명
국토지리정보원 자료(2011년 기준)에 따르면 우리나라 154만여 개 지명 중에서 토끼 관련 지명이 158개가 있다.
전남에 38개로 가장 많고 경남 28개, 충남 20개, 경북 17개, 전북 16개 순이다.
대부분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설화가 깃들어 있다. 농경생활 속에 다산과 풍요, 지혜, 평화를 상징하는 토끼처럼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토끼 관련 지명을 많이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토끼 묘(卯)는 풍성함과 왕성함, 즉 번창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토끼를 의미하는 마을은 158개 중 81개, 토끼 토(兎)자가 들어간 지명 39개, 토끼 묘(卯)자가 들어가 있는 지명이 6개가 있었다. 이 외에 지명에 토끼를 의미하는 글자가 들어가 있지 않으나 지명의 유래에 토끼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된 지명이 32개였다.
이 가운데 별주부와 관련, 경남 사천시 서포면에는 별주부전 전설이 있는 ‘비토섬’이 있다. 토끼가 용궁에서 거북이를 타고 육지로 나오던 중 바다에 비친 섬(월등도)의 그림자를 육지로 착각해 거북이 등에서 내려오다가 그만 바닷물에 빠져 죽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충남 태안군 남면 원청리에도 고전 별주부전의 발원지로 알려진 ‘별주부마을’이 있다.
비토섬에서는 별주부축제를 개최하고, 별주부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에 용왕제를 지낸다.
'토끼골' 지명은 경북 안동시 일직면 구미리 등 15곳에서 사용해 토끼 관련 지명 중 가장 많이 사용됐고, 그 다음은 '토끼섬'으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를 비롯하여 전국에 14곳이 있었다.
유래별로는 전남 영광군 홍농읍 단덕리에 있는 마을 '토골'처럼 지세가 토끼의 모양을 닮은 지명은 77개로, 이 중에는 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모양, 토끼가 달을 물고 있는 모양 등 토끼와 달을 연관 지은 유래를 가진 지명이 많았다. 그 외에 토끼가 실제로 존재해 유래된 지명 또는 설화를 바탕으로 생긴 지명 등이 있었다.
토끼 모양을 묘사한 마을은 77개였다.
이 중에 옥토끼가 보름달을 바라본다는 지형인 ’옥토망월형(玉兎望月形)’은 풍수가들이 일컫는 명당의 하나로 21개의 지명이 이런 유래를 갖고 있었다.
강원 삼척시 하장면 토산리의 '토산', 경북 안동시 남선면 원림리의 '토갓', 전남 보성군 벌교읍 지동리 '퇴산', 전남 나주시 송촌동 ‘망월촌’, 전남 무안군 ‘망월동’, 전북 남원시 ‘망동’, 충남 공주시 장기면 송문리 ‘토끼자리’ 등이 이런 유형이다.
또 산 모양이 토끼 꼬리처럼 생겼다는 전남 신안군 ‘토미산’, 토끼가 달을 그리워한다는 뜻의 구례군 ‘월암마을’ 등이 있다.
토끼의 꼬리 모양을 닮은 강진군 ‘토미재’, 마을 모양이 토끼가 일어나는 모습인 무안군 ‘토기동’, 토끼가 뛰어가려는 형상인 광양시의 '토끼재' 등이 있다.
토끼들이 자주 나타나거나 많이 살아서 유래된 지명도 있었다.
충북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토끼실'은 동네 뒷산에 토끼가 많이 살아 유래됐으며, 전남 신안군 신의면 하태동리 '토도'는 예전에 토끼를 기르던 섬이라 해서, 경북 성주군 금수면 후평리 '토구재'는 토끼가 자주 다니던 길목의 고개라 해서 유래된 지명들이다.
경남 밀양시 내이동 '토끼바위'는 옛날에 선녀가 천태산에서 바위 두개를 토끼 등에 싣고 다녔다 해서 유래됐다.
■ 토끼 관련 속담
- 눈 먹던 토끼, 얼음 먹던 토끼 제각각이다/ 겪어온 환경에 따라 능력과 개성이 다르다는 뜻
- 가는 토끼 잡으려다 잡은 토끼 놓친다/ 지나친 욕심은 손해를 끼친다는 뜻
- 영리한 토끼는 굴을 3개 판다/ 위험이 다가치기 전에 미리 준비한다는 뜻
- 토끼가 제 방귀에 놀란다/ 남 몰래 저지른 일이 들킬까봐 지레 겁 먹고 크게 놀란다는 의미와 말과 행동이 가볍다는 뜻
■ 토끼 사진전
국립민속박물관은 특별전 ‘새해, 토끼 왔네!’를 오는 3월 6일까지 개최한다.
옛사람들이 토끼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형상화했는지 현대인에겐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지 등을 볼 수 있는 기회다. 토끼의 상징과 의미가 담긴 민속품, 그림, 조각과 현대 캐릭터 상품 등 70여 점을 선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도 토끼의 해를 맞아 상설전시실 곳곳에 토끼 관련 전시품 10점을 소개하고 있다. 귀여운 토끼 세 마리가 향로를 받치고 있는 형상의 고려청자 ‘청자 투각칠보무늬 향로’, 통일신라시대의 ‘십이지 토끼상’, 19세기 조선백자 ‘백자 청화 토끼 모양 연적’ 등이다.